14장. 뭐라고! (1)
저승 던전을 클리어했다.
풍문이 전설로 완성되었고.
비활성이었던 스킬도 일부 되찾았으며.
무엇보다.
[ 이제연 (염라) ]
* 권능 – 권선, 징악, 죽음, 사후세계
* 스킬 – [L]명부, [L]도산지옥(lv.1), [L]화탕지옥(lv.1), [L]한빙지옥(lv.1) ……
* 체력 100/100
* 근력 100/100
* 마력 100/100
* ……
드디어 모든 스탯이 최고치인 100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100으로 고정된 능력치를 풍문과 신앙으로 증폭시키는 싸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아직 신앙을 모을 형편이 못 되니, 당분간은 쓸 만한 풍문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공간의 붕괴가 멈췄어요.”
주변을 돌아보며 바리가 말했다.
“아마 오빠가 힘을 계승함으로써 더 이상 던전의 신화가 왜곡되지 않기 때문이겠죠.”
어느새 새하얀 신성을 발하면서.
“오빠, 제게 잠시 시간을 주세요.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적당한 자리를 찾은 듯 그녀가 구석에서 무릎을 꿇었다.
“오빠도 이미 망자의 기억에서 뭔가를 보셨을 거예요.”
그 말에 초강의 기억에서 읽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발설지옥의 차사들과 똑같이 생긴 자들이 ‘다른 지옥은 포기한다’고 했던 것이.
“이곳에 아직 오빠가 거두지 못한 영혼의 잔해가 남아 있어요.”
바리가 말했다.
“제가 최대한 모아 볼게요. 보셔야 할 것을 보실 수 있도록.”
그러고는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 (!) 무당의 ‘천도(薦度)’가 시작됩니다. ]
“그런데 대왕님.”
그때였다.
“저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시선을 바리에게 둔 강림 형이 물었다.
……하긴 형은 바리를 이번에 처음 봤을 테니까.
나는 그가 바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새삼 기꺼웠다.
“역시 형도 바리가 이상하죠?”
“역시 바리공주님이십니까?”
동시에 튀어나온 우리의 말이 서로 엉켜 버렸다.
역시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아뇨, 아직은 모르겠어요. 모두 관련이 있겠거니 생각하지만요.”
“……그렇습니까.”
강림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치 않아도 딱히 더할 것은 없다는 듯.
“…….”
나는 더 말을 보태지 않는 형을 가만히 바라봤다.
의문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듯 그는 계속해서 바리를 주시했지만, 내 시선을 알아채고는 금세 나를 돌아보았다.
한데 이상했다.
키가 커서 늘 같은 위치에서 날 내려다보던 형이, 어째선지 내게 맞춰 고개를 숙여 오고 있었다.
나는 그 생경한 시선에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는 말문이 막혔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뒤이어 그의 공손한 질문을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바리에게 의식이 쏠려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 형 왜 계속 존대하고 있는 거지?
아까는 뭐, 저승 던전도 클리어했겠다, 다들 나만큼 고무됐을 테니까.
내가 저승의 왕위를 온전히 이었단 걸 공식화하는 차원에서, 그때만 잠깐 분위기를 잡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른침을 삼켰다.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
시스템이 새로이 명명한 나와 형의 관계가 시야 한구석에서 아른거렸다.
“……왜 계속 말이 길어요, 형?”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참, 듣는 사람 부담스럽게.”
어색해하는 걸 티 내면 더 어색해지는 법.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덧붙였는데, 형은 되레 그게 문제였냐며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 것이라면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도 똑같이 내게 웃어 보이면서.
“제가 어찌 대왕님께 말을 편히 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시금 입가에 고집스러운 무게를 담아내면서.
“……하.”
그 몇 마디로 새삼 그의 성품을 되새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형. 됐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요.”
내 만류에 형이 입을 다물었다.
검다 못해 푸른 눈이 전과 달리 조금 낮은 곳에서 나를 담았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한 걸음 물러서며 대답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고집불통.
무심코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웃음이 터졌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형의 태도에 나는 멀찍이 선 사라와 호구별성을 가리켰다.
“아니, 그냥 저 양반들처럼 편하게 말해요. 듣는 나도 그게 편하고.”
내 말에 형은 곁눈질로 그들을 훑더니.
“바로 저치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유의 완고한 얼굴로 혀를 찼다.
“예도 충도 모르는 저 무뢰배들이 신하 된 도리를 지키지 않고 발설지옥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있잖습니까.”
그렇게 짜증을 드러내다가도, 다시금 무게 있는 얼굴로 돌아와 덧붙였다.
“대왕님께 도리를 지킬 차사는 저밖에 없습니다. 제 말을 자르실 거면 제 목도 같이 베십시오.”
원래도 저승 최고의 꼰대가 아니었던가.
이렇게까지 강경하니 어쩔 수 없다.
형의 고집이 어떤지 알기에 나는 결국 한발 물러섰다.
“형, 그래도 사석에서는 편하게 해요.”
물론 지금 저승에 공석과 사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만.
“형제잖아요. 형은 나한테 그냥 형이에요.”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꺼낸 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이마저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응시하는 그 표정은 세심히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저승을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형제의 정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진중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러나 당신께서는 이제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저는 새로운 왕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저승 최고의 꼰대를 앞에 두고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저 고집불통은 들어먹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대왕님.”
그 대왕님이 부담스러워하든 말든 형은 미간을 좁히며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대관절 호구별성 저 흉물은 왜 거두신 겁니까?”
역신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언짢아진다는 듯이.
“뭐?! 흉물?!”
그 말에 사라와 대화를 나누던 호구별성이 곧장 반응했다.
“야! 내가 얼마나 맑고 깨끗한 신인데! 얻다 대고 흉물이래!”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그녀가 팔뚝을 걷어붙였다.
호구별성의 항변에 형은 불쾌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더니, 삿대질까지 해가며 말을 이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역신이야말로 차사의 적이라고.”
고집스럽고 단호하기만 하던 목소리에 그새 가시가 돋아 있었다.
“잊으셨습니까. 경신 대기근, 그 끔찍한 참사를!”
“……아.”
그 말에는 나도 작게 탄식했다.
경신 대기근.
그것은 약 400년 전 한반도 전역에 벌어진 대참사로.
내 49년 룸메이트였던 강림 형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들려준 얘기였으니까.
어느 경술년과 신해년.
유례없는 흉작이 나면서 한반도 전체가 기아에 시달렸는데.
우박에 서리에 가뭄에 홍수, 병충해까지 일면서 무지막지한 역병마저 돌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기아로 다 죽어 나가는 마당에 역병까지 돌다니.
보다 못한 한반도의 운명신들은 끝내 강남천자국의 역신들을 불러 병이라도 잠재우려 했다.
병을 퍼트리는 것도, 낫게 하는 것도 결국 역신의 권능이었으니.
“그런데 병을 막으라고 보냈더니, 이 흉물들이 신나게 날뛰면서 더 크게 퍼트렸지요.”
형이 말을 이었다.
“기근으로 141만 명이 사망했는데 역병이 돌면서 25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습니다. 그때 한반도 인구가 1,500만 명이었으니, 열 명 중 한 명이 죽었단 뜻입니다.”
경멸이 뚝뚝 묻어나는 어투였다.
“그들의 혼을 거둔 게 다 누굽니까? 저희 차사들입니다.”
최대한 차분히 말하는 듯했지만, 끝에 가서는 기어이 분노가 실렸다.
“저를 포함한 모든 차사들이, 저 흉물 때문에 자그마치 2년이나 퇴근을 못 했지요!”
오랜만에 듣는 참혹한 괴담에 나도 살짝 신음했다.
내가 저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지, 나도 한 스물세 번까지는 들을 때마다 공포에 떨었다.
참고로 던전이 발생하기 전, 2020년 한반도 남쪽 사망자 수가 30만 명이었다.
그러니 그냥 140만 명의 혼놈들을 잡으러 다닌 것만 해도 끔찍한 일인데.
역신이 권능을 발휘한 죽음은 정해진 운명을 벗어난 죽음이었으니.
역신 때문에 25만 명이 더 죽었다는 것은 그만큼 명부를 새로 고쳐 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명부를 고치기 위해 이리저리 뺑이를 치는 것은 누구냐.
바로 우리 차사들이다.
그런데 명부 25만 개 재결재라니, 말만 들어도 한 번 더 죽고 싶다.
“아니…… 그게, 우리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이것만은 저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지, 호구별성도 그새 주눅이 들어 웅얼댔다.
어느새 흘러나오는 독기도 평소와 달리 어딘가 맥이 빠져 있었다.
“우리 권능이…… 항상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 사방에 시체가 많다 보니까…….”
역신의 권능은 꼭 의지대로만 발휘되지는 않는다.
역병이란 모르는 사이 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호구별성과 강남천자국의 역신들도 일부러 25만 명이나 더 죽인 것은 아닐 테지.
“허.”
그러나 2년 동안 퇴근이 없던 차사에게 정상 참작 따윈 없었다.
“보셨습니까, 대왕님! 시체를 보면 이성을 잃는다니! 저게 신입니까! 횡액이지!”
아주 상종 못 할 개종자를 봤다는 듯, 형이 폭언을 내뱉었다.
항상 서늘하던 얼굴이 평소와 달리 격렬한 분노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
나는 그런 형의 반응이 새삼 신기해서 그를 빤히 쳐다봤다.
형이 무언가를 저리도 격하게 싫어한 적이 있었나?
그야, 원래도 역신과 얽히지 말라고 강조하긴 했지만…….
온갖 파렴치한 죄인을 끌고 오면서도 냉담하기만 했던 양반인데.
“역신, 저 빌어먹을 흉물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과로로 쓰러진 차사들이 서천꽃밭에 실려 갔다 이 말입니다!”
“아, 잠시 손님이 많았던 게 그런 이유였나?”
그때 불쑥 사라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형은 이번에는 사라를 돌아보며 도끼눈을 떴다.
“게다가 사라요?”
타겟은 호구별성에서 사라로 넘어갔다.
“역신이 저승의 일등악이라면, 사라, 저자는 저승의 이등악입니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형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을 이었다.
“잊으셨습니까, 22년 하고도 10개월 17일 전.”
……?
어, 뭔데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저 노괴가 생전의 선왕을 100일이나 능멸했던 것을!”
……!
아, 그래, 기억났다.
23년 전, ‘첫 번째 천벌’의 발생으로 저승에 우울한 전조가 감돌 때였다.
기분을 풀고 싶었던 서천꽃밭의 사라수대왕이 친구였던 염라대왕에게 제안했었다.
-내 전에 웃음꽃으로 담근 술이 여럿 있는데, 어느새 천 년을 채웠지 않겠소?
애주가셨던 우리 대왕님이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유혹을.
-어떻소, 한 판이라도 이긴다면 내 전부 그대에게 내어드리지.
그리하여 귀한 술을 두고 벌어진 바둑 시합.
우리 대왕님은…… 100일 내내 사라한테 졌다.
뭐, 아들로서 대리 변명을 하자면.
5천 년 동안 놀기만 했던 놈을 어떻게 이기겠냐고.
내가 저놈보다 4배는 더 살았어도 바둑은 저놈이 4000배는 더 뒀을 거라고.
대왕님은 그러셨다만.
하여튼 나는 손님 시중을 드는 막내라서 그걸 눈앞에서 지켜봤는데.
사라 저 양반, 진짜 기깔나게 잘 뒀다.
다섯 판을 내리 1집 차, 2집 차, 3집 차, 4집 차, 5집 차로 이겼을 땐 발설지옥 차사라는 신분도 잊고 물개박수 칠 뻔했었으니.
약이 바짝 오른 우리 대왕님은 결국 재판도 내팽개치고 100일이나 바둑판에 매달렸는데.
덕분에 저승에는 ‘염라가 사라한테 100번 졌대’라는 소문이 퍼졌다.
안 그래도 울적했던 저승에서 간만에 퍼진 유쾌한(?) 소식인지라.
다른 지옥의 대왕님들과 그 차사들까지 옹기종기 염라궁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보통 이승에 계시던 생불왕 삼신할미까지 와서 껄껄 웃으며 구경을 하셨지.
-염라 이 자식, 이거 완전 등신 새끼 아니야?
이런 희대의 명언까지 남기시고.
그렇게, 때아닌 염라와 사라의 바둑으로 저승의 모두가 즐거웠으나.
……우리 대왕님을 하늘처럼 받드는 발설지옥의 형들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장담컨대 그 치욕이 하루만 더 이어졌더라면, 우리 차사들이 직접 저 노괴의 목을 쳤을 겁니다.”
강림 형이 사라에게 삿대질했다.
하긴, 인간일 때도 저승의 염라를 치러 왔던 독종이 아니었던가.
분명 진심일 것이다.
“소식을 들은 원강아미께서 치도곤을 내리시고서야 굴욕의 세월이 끝났지요.”
……아, 그래. 그랬었다.
염라가 재판도 때려치우고 사라랑 바둑만 둔다니까, 기어코 발설지옥까지 쫓아온 원강아미가 철없는 백수 남편 등짝을 시원하게 후려쳤었지.
-으이구! 이 화상아! 작작 놀고 하루 한 번은 집에 들어오랬지!
“……뭐, 사내는 마누라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사라가 슬쩍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
……아니, 근데 양심적으로 그게 말을 들은 겁니까.
하도 말을 안 들어서 결국 사달이 난 거지.
참고로 그 일의 후일담은 이러했다.
-제연아, 가서 이삼석이 명부 좀 들고 오너라.
-예? 그 바둑기사요?
-그래, 내 스승을 모셔와서라도 사라 고놈의 콧대를 꺾어야겠다.
-어어? 근데 그 양반 아직 젊잖아요.
-…….
-설마 명부 고치시려고.
-…….
-왜 말씀이 없으세요?
-막내야, 원래 여기 오는 데는 순서가 없다.
-없긴 왜 없어요! 그냥 직권남용이시면서!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대왕님.”
호구별성에 이어 사라의 악행까지 샅샅이 집어낸 형이 다시 나를 돌아봤다.
새파랗게 날이 선 눈이 이번에는 나를 찍었다.
“새로 들어온 차사라는 게, 한 명은 일을 벌이고 한 명은 일을 안 합니다.”
실로 지독한 평가였다.
“정녕 이게 최선이셨습니까?”
“…….”
형…….
나한테 잔소리하려고 왔어?
나는 뭐라 대꾸도 못 하고 멍하니 형을 바라봤다.
솔직히 아무나 되는 대로 차사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호구별성이랑 사라도령이면 저승이 망한 것치고는 꽤 괜찮은 신들 아닌가?
시스템도 생로병사 조합이라고 할 정도인데!
하지만 저 서슬 퍼런 눈에 대고 당당히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쏟아지는 형의 추궁에 나는 그저 구겨지듯 몸을 움츠렸다.
저 꼰대가 저승 곳곳을 호령하며 군기를 잡을 때마다 그 새파란 도끼눈에 절로 몸이 구겨지던 예전처럼.
“그래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한데 눈이 마주친 형은 뜻밖에도 가벼이 웃어 보였다.
“이 으뜸차사 강림이 돌아왔으니, 이제 제가 저 못난 것들 대신 대왕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 말에 듣고 있던 호구별성이 경악했다.
“이런 미친! 자기 PR이었냐!!!”
실컷 사라와 호구별성을 깎아내리더니, 결국 자기를 올려치는 거였냐며.
“여기 하늘 같은 선배가 계시는데 뭔 으뜸차사야!”
한걸음에 달려온 호구별성이 나와 형을 떼어 내며 따졌다.
“넌 이제 꼴등차사야, 이 멍청아!”
그러고는 지켜보던 사라를 돌아봤다.
“영감! 영감도 말 좀 해 봐!”
지원사격 요청이었다.
“그래. 듣다 보니 틀린 말이 하나 있구나, 강림.”
그런데 웬일인지 사라가 곧장 그 말을 받았다.
“난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체질 때문에 못 하는 게지.”
그가 진중하게 대꾸했다.
“일하면 피곤해져!”
“야! 신적으로 저걸 나랑 대는 건 진짜 아니지!”
호구별성이 사라를 손가락질하며 격노했다.
“신입 주제에 건방 떨지 마라, 강림!”
그녀가 강림 형에게 독기를 내뿜었다.
“나이도 어린 게!”
“나이가 어려?”
“그럼 어리지. 거기다 나이만 어려? 경력도 짧은 게!”
“경력이 짧아?”
그 말에 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뭘 모르나 본데, 역신.”
그러더니 다시 득의연하게 대꾸했다.
“난 원래도 먼저 있던 일직차사 해원맥과 월직차사 이덕춘을 밀어내고 으뜸차사가 됐다.”
가슴을 편 그가 호구별성에게 마저 말했다.
“알겠나. 저승 신화 최고의 굴러들어 온 돌, 그것이 나다!”
“자랑이다, 돌대가리야!”
분노한 역신이 부웅 날아올랐다.
“와라! 저승의 새로운 으뜸차사를 가리자!”
사신도 피하지 않고 발설지옥의 권법 자세를 취해 보였다.
아니, 잠깐!
뭐 하는 거야!
싸우지 마!
나는 머리를 짚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생명의 신은 죽음의 신이 무슨 비난을 하든 한 귀로 흘려들었고.
역병의 신은 침이라도 뱉을 것처럼 죽음의 신을 향해 역병을 뿜었다.
저게 진짜 생로병사 조합이 맞나?
저걸 진짜 생로병사 조합이라고 불러도 되나?
그보다 형, 아무리 역신이 싫어도 그렇지.
평소처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대뜸 싸움을 벌인다고?
나는 전 으뜸차사의 생소한 모습을 다소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하하.”
그런데 돌연 곁에 있던 사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싸워라, 싸워! 더 싸우거라!”
짝짝짝 박수까지 치면서.
“역병과 죽음이 붙다니, 절경이군!”
거, 도령님! 생명의 신이 할 말입니까!
아주 팝콘까지 튀기시겠어요!
황당한 반응에 사라를 돌아보려니,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대왕, 난 꼴등차사라도 상관없단다.”
구경하기 편하게 자세까지 바꾸면서.
“자고로 조정(朝廷)이란, 권력을 탐내는 일 없이 남들 싸우는 거 구경이나 해야 제일 오래 살아남는 법이지.”
“…….”
개판이었다.
와중에도 현 으뜸차사와 구 으뜸차사는 사방에서 역병과 죽음의 신성을 번쩍이고 있었다.
댁들 생로병사잖아요!
왜 그렇게 서로를 업신여기는 거야!
그런데 그때.
“……오빠!”
천도를 끝낸 바리가 구세주처럼 나를 불렀다.
“영혼의 조각들이 모였어요.”
신성을 휘감은 그녀의 주변에 작은 파편들이 반짝였다.
“완벽하게 다 모으진 못했어요, 그래도.”
오래가지는 않을 듯, 안개처럼 퍼져 있는 영혼의 흔적들이.
“이 ‘저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셔야 할 만큼은 보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