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세상 저편의 왕에게(5)
-자네,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 어땠나?
언젠가, 염라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나 말이오?
-그럼 여기 자네 말고 또 누가 있나?
-뭐, 저기 수발드는 막내 녀석에게 물었을 수도 있지 않소.
-허어, 시답잖긴.
여느 때처럼 바둑판 하나를 사이에 둔 담소였다.
-그래, 사라 자네. 할락궁이에게 꽃밭을 물려줄 때 어떻던가.
신은 하나의 숙명을 갖고 태어나 영원히 한곳에 머무른다.
강이 물을 흘려보내듯 세월을 흘려보내며 살았으니 언제,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특별히 기억에 남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날의 물음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글쎄, 나보다는 역시 그 녀석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
염라의 뜬금없는 물음에, 그는 느릿하게 한 수 두며 대답했었다.
-꽃이 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소.
씨앗.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중유의 상태에서.
태어나고자, 살아나고자 하는 욕망으로 씨앗은 살갗이 뚫리는 고통을 감내하며 싹을 틔운다.
삶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순간부터 망울을 터트리고 꽃잎을 바로 펼 때까지.
꽃에게는 하루하루가 살고자 하는 투쟁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나처럼 그저 부름을 받았기에 떠밀려 온 놈이 아니라, 살아남고자 제 발로 뛰어들어 온 그놈이야말로 진짜 꽃밭의 파수꾼일 테니.
결국 자연의 뜻이다.
꽃은 생명력이다.
씨앗이 품었던 삶에 대한 의지다.
죽은 사람조차 살리는 신묘한 힘이 하필 꽃의 형태를 띤 것은.
씨앗이 중유에서 생으로 넘어가는 자연의 이치를 담았기 때문일 터다.
그러니 살기 위해 투쟁한 할락궁이가 꽃밭을 지키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결국 자연의 이치를 담은 신화였다.
그런데 인간이 신화를 말하길.
초대 꽃감관 사라수대왕이 아들 할락궁이에게 제 자리를 넘겨주면서.
세상에는 비로소 아버지가 아들에게 직업을 물려주는 풍습이 생겼다고 했다.
재밌다고 여겼다.
자연을 그대로 읊은 신화에, 인간이 만든 법도가 섞여 들었으니.
-그냥 귀찮아서 넘긴 게 아니었단 말인가?
-뭐, 그런 것도 있고.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한 것도 벌써 오천 년이 훌쩍 지난 일이었다.
사라는 염라가 왜 그토록 오래된 과거를 꺼냈는지 궁금했다.
신은 언제나 한결같기에, 미래를 그리지 않는 만큼 과거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으니.
-그런데, 갑자기 아들은 왜 묻는 거요?
염라대왕.
그는 벌써 2만 년 가까이 살아온 오래된 신이었다.
인간 역사와 나란히 그들의 죄를 벌해 온 저승 시왕 가운데서도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나서부터 높은 자리가 당연해, 오히려 사소한 예에 얽매이지 않아 5천 년 남짓 산 젊은 신에게도 선뜻 친우의 자리를 내주었으나.
그와 막역하게 말을 나누면서도 사라는 결코 그와 같은 눈을 가졌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아주 오래된 신으로서 보다 먼 곳을 바라봤으니.
-그저께 막내 녀석이 결국 명부를 찢었어.
그런데 이어진 말은 영 엉뚱했다.
-음, 저 녀석 말이오?
생각지 못한 말에 멀찍이 선 막내 차사를 한 번 돌아봤다.
-꽤 늦었군. 벌써 해를 두 번은 넘긴 것 같은데.
죄를 짓고 스스로를 죽여 시왕의 사도가 된 차사들은 정이 많다.
정이 많아 불우한 죽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네들 본인이 한 많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언제가 되었든, 차사들은 결국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해 명부를 찢는다.
-녀석, 보기보다 차갑군.
그런 것치고 그 앳된 막내 차사는 다소 늦은 편이었다.
불행한 삶은 많다.
어쩌면 행복한 삶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간은 불우한 죽음을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를 두 번이나 넘겼다는 것은, 그 무수한 안타까운 죽음을 그냥 넘겼다는 뜻이다.
보통 냉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
-삭풍이 불면 초목도 얼어붙는 법이지.
그런데 별 뜻 없이 한 말에 제법 낭만적인 답이 돌아왔다.
-본래 그런 성정이 아니었단 말이오?
흥미가 돌아서 물었다.
그 막내 차사 본인에 대한 흥미보다는, 이 오래된 신이 그를 이리 치장해 주는 속내가 궁금했다.
-어쨌든 제 고뿔이 나아야 남의 중병도 보이지 않느냔 말이야.
한 수 받아친 염라가 말을 이었다.
-녀석의 명부를 봤어.
오랜만에 본 자식이라 그랬을까.
그날따라 염라는 어린 막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유복한 집의 영특한 아들로 태어나, 그대로 두면 이승의 판관이 될 팔자였지.
사실, 기특하지만 딱히 흥미로운 인생은 아니라 생각했다.
단지 막내 자랑을 꺼낸 노인네 흥을 깨기 싫었을 뿐.
-딱히 영웅으로 살아온 적은 없지만, 그저 맡은 자리에서 충실히, 생과 생을 거듭하여 마침내 평온한 생을 허락받은 혼.
그렇다면 제법 덕을 쌓은 혼이라는 뜻이었다.
부와 성취보다도, 평온한 생이야말로 전생의 자신이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었으니.
-굳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꼽자면, 그 모든 생에서 한결같이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
사라는 그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에도 높이 올라가진 못했을 거야. 딱히 욕심이 없거든. 그냥 어디 작은 지방의 가장 높은 판관쯤으로 끝났겠지.
세상에 남의 자식 자랑만큼 지겨운 것은 없다.
그쯤에서 그는 슬슬 곁눈질로 바둑알을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녀석은 대신 끊임없이 고뇌했겠지. 온갖 죄를 목도하면서. 그래서 아주 오래는 못 살아. 속상하다고 술 담배를 끊지 못하거든.
뭐가 재밌는지, 나이 많은 친구는 그저 웃었다.
-그리하여 일흔쯤 됐을 때,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녀석은 비로소 내 앞에 당도했겠지.
더 이상 판을 이어갈 생각이 없는 듯 슬쩍 알까지 정리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이승의 판관과 저승의 판관으로서 잠시나마 좋은 벗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
간혹 진심으로 안타까운 얼굴을 하기도 했다.
-일평생 죄와 벌을 고뇌했던 현숙한 영혼에게, 나는 묻고 싶어.
덧없는 상상을 했다는 듯.
-이보게, 이승 판관! 자네가 벌한 놈들에게, 내 저승의 판관으로서 어떤 벌을 내리면 좋겠는가.
그럴 때 간혹, 사라는 염라가 신기했다.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일까.
염라는 항상 그의 신화가 결국 인간에게서 벗어나리라 여겼다.
그에게 엄벌을 바라던 인간들이, 언젠가 그의 벌을 너무 지나치다 말하게 될 것이라고.
-후후후, 이제 와서는 결국 아무 소용없는 말이지.
찾아오지 않은 미래를 그리던 염라가 웃었다.
-하지만 팔자가 참 재밌지 않은가. 이승의 판관이 되어야 했을 녀석이 결국 저승의 판관이 되었으니.
그 말만큼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저승의 판관이라고?
그제야 사라는 염라의 말꼬리를 당겼다.
-그대, 지금 무슨 소리를.
그래, 그날 염라는 역시 이상했다.
-후후, 사라. 한순간에 세상이 많이 변했지. 우리 같은 늙은이조차 천기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산 만큼 원래도 이상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날따라 더욱 따라가기 어려웠다.
-세상이 뒤집혀, 벗이 되었을 녀석을 아들로 거두었지.
대체 왜 그렇게, 새로 거둔 막내 자랑이 유난이었는지.
-내 이제 천기를 읽기 힘들지만, 그래도 저 녀석이 떨어진 순간 알았어.
왜 갑자기 아들 얘기를 꺼냈는지.
-저 애는 내 마지막 아들이야.
어째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는지.
-그러니까, 사라. 다시 한번 묻겠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봤는지.
-사라 자네,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 기분이 어땠나?
-좋았나?
-아니면 섭섭하던가?
-녀석이 잘할 것이라 확신이 들었나?
……
그로부터 또 해가 수십 번 바뀌었다.
“우리, 아빠, 지옥 갔어요……? 지옥, 가서, 벌, 받아요?”
염라가 거둔 마지막 아들에게, 죄인의 딸이 물었다.
“……그래.”
그는 대답했다.
“하지만 영원히 그곳에 있지는 않을 거야.”
결국 일평생 죄와 벌을 고뇌하는 운명 그대로였다.
“받아야 할 만큼의 벌만 받을 거야.”
그렇게 오래된 신의 예견처럼 대왕의 이름을 이었다.
“벌을 받은 후에는, 아빠도 사랑하는 너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가 모셨던 아버지처럼, 또 한 명의 자비로운 왕이었다.
사라는 새 왕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의 마음은 그의 겉모습을 따르니, 앳된 새 염라의 마음도 영원히 약관의 나이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아이와 어른의 사이에서 영원히, 아이처럼 천진하게 세상을 바라보되 어른처럼 단단하게 세상을 품게 될 것이다.
“하, 이게 진짜 되네.”
옆에 섰던 역신이 평했다.
“어떻게 정말로, 백 살도 안 된 핏덩이한테서…… 그 영감이 보이지.”
마찬가지로 같은 그림자를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건 너무 여려. 여리고 약해.”
제 아비와 달리 어설픈 모습에, 쯧쯧 혀를 차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러나 결국 역신은 웃어 보였다.
“그렇지만, 무릇 새로 나는 것들이란 다 그런 게 아니겠어?”
젊은이답게 꽤나 유쾌한 얼굴로.
“여리고 약하지만…… 동시에 싱그럽지.”
아마 새로 모시게 된 왕이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든 것일 테다.
젊은이는 젊은이를 좋아하니까.
이제는 곁에 없는 오래된 친구의 얼굴을 그리며, 사라는 조금 느긋하게 웃었다.
***
처음 저승에 떨어졌을 때.
나는 징악의 신 염라가 다소 순진하다고 느꼈다.
-환생을 거듭해, 끊임없이 혼을 갈고 닦아…… 그래, 이천 년 전 어느 성인의 말처럼.
-너희는 마침내 원수도 사랑하게 된 거야.
-길었던 보복의 세월을 지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시대가 왔구나.
인간의 악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왔던 그가, 인간을 터무니없이 아름답게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런 시대가 온다면, 더 이상 폭력이 선을 이룰 수 없겠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느꼈다.
-폭력은 악을 벌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악의 부존재가 결코 선은 아니기 때문이야.
악을 벌하되, 영원히 악에 지치지 않고, 오직 선만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진정한 신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말해다오, 나의 마지막 아들아.
-폭력이 더 이상을 선을 이룰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이 선을 이룰 수 있을까?
-아들아,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 믿는단다.
-언젠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여, 이 지옥에 아무도 남지 않는 날이 올 거야.
-우리의 신화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여 만들어진 신화니까.
……그리고 지금 나의 아버지, 염라의 신화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 ‘새로운 왕이 탄생했으니.’ ]
- 분류 : 전설(L)
- 권능 : 권선(勸善), 징악(懲惡), 중생구제(衆生救濟)
- 내용 : 세상의 저편에서 새로운 왕이 천명하기를, 끝없는 권선과 징악이 결국 모든 중생을 구제하리라.
효과 : 저승 신화 복원 및 적용
지옥미제 서불성불(地獄未濟 誓不成佛).
죄인마저 사랑하여, 이 지옥에 아무도 남지 않는 날을 기리던 지장보살처럼.
나의 아버지 염라도 결국 사랑이 선을 이룰 것임을 믿었다.
그 믿음에서 저승, 이 구원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지옥에 떨어진 죄인에게마저 ‘벌을 받은 다음’을 약속하는 거대한 사랑의 신화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이 저승의 모든 영혼을 구원해 내는 것.
그래, 클리어 조건이 지장보살이었던 것은 그러한 까닭이겠지.
이 신화는 슬픈 자들의 신화.
설령 삶에 지옥과 같은 불합리가 계속될지라도, 결국 인간이 사랑한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구원의 신화였으니.
“다 끝났습니다.”
던전이 마무리되었다.
내게 깃든 지장보살의 힘도 어느새 사라졌다.
하지만 정말로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염라는 결국 지장의 화신이니까.
“비로소 제가 염라의 이름을 온전히 이었습니다.”
보석으로 화한 망자들 사이에서, 나는 세 명의 신과 한 명의 인간 소녀에게 말했다.
“훌륭하다.”
강림 형이 말했다.
“이제 네가 이 땅의 왕이다.”
모든 싸움을 지켜보고서는 다시 내게 돌아왔다.
“징악과 권선의 천명을 품고 옥좌에 오른 진정한 저승의 왕이다.”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익숙한 호선을 그리는 눈과 마주하며, 나는 내가 은연중에 이 순간을 고대해 왔음을 느꼈다.
그가 다시 나의 형으로서 돌아오는 때를.
되돌아온 형에게 이 저승의 왕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새로운 왕이시여.”
그러나 말을 이으며, 형은 찰나에 웃음을 거두었다.
웃음기 없이, 장난기 없이, 새파란 눈으로 그저 진중하게 나를 담고는.
그가 절도 있는 자세로 내게 무릎을 꿇었다.
“강림차사 강림도령이 새로운 염라대왕님을 뵙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풍문(E)’이 완성되었습니다. ]
팝업창이 떴다.
[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 ]
- 분류 : 풍문(E)
- 인연 : 강림차사 강림도령, 염라
- 내용 : 세상 저편의 왕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가 무릎을 꿇기를, 오직 당신만이 이 땅의 왕일지어다.
- 효과 : (!) 해당 풍문은 인연(因緣)의 풍문입니다. 차사가 왕의 명령을 수행할 시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강림 형과 나 사이의 인연의 풍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형에게 인정받았다는 기쁨보다도 당혹감이 앞섰다.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
형과 나를 연결 짓는 그 말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느껴져서.
무언가 견디기 힘든 간지러움에 무릎 꿇은 형을 만류하려던 때였다.
“아하하!”
지켜보던 사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내 경황이 없어 새 대왕님께 예를 차린 적이 없구나.”
그러더니 그도 강림 형의 옆에서 우아하게 무릎을 꿇…… 아니, 잠깐만.
“일직차사 사라도령이 새로운 염라대왕님을 뵙습니다!”
“잠깐만요, 다들 왜 이래요!”
당황한 나는 강림 형을 일으키려다 말고 황급히 사라에게 팔을 뻗었다.
하지만.
“흐음!”
뒤에 서 있던 호구별성마저 눈을 빛냈다.
“그래, 이런 날엔 우리 핏덩이 전하도 기분을 내야지!”
눈을 빛내며 웃은 그녀도 무릎을, 아니, 아니, 꿇지 말라니까……!
아니, 왜들 이래, 정말……!
“월직차사 호구별성이 새로운 염라대왕님을 뵙습니다!”
그 직후.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세 ‘풍문(E)’이 하나의 ‘무용담(E)’으로 변화합니다. ]
팝업창이 뜨더니, 삼차사의 풍문이 하나로 합쳐졌다.
[ ‘세 명의 차사.’ ]
- 분류 : 무용담(E)
- 인연 : 일직차사 사라도령, 월직차사 호구별성, 강림차사 강림도령, 염라
- 내용 : 세상 저편의 왕에게 세 명의 차사가 무릎을 꿇기를, 그들은 생명과 역병, 죽음일지니. 그들이 곧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였다.
- 효과 : (!) 해당 풍문은 인연(因緣)의 풍문입니다. 차사가 왕의 명령을 수행할 시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
생로병사라니, 그렇게 거창한 의미가 있었나?
그냥…… 모이는 대로 모인 건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오빠, 전 안 숙여요.”
지켜보던 바리가 말했다.
그녀가 모시는 신의 말씀을 전하면서.
“할미가 그러는데, 할미가 그래도 염라한테 숙일 급은 아니래요.”
무릎을 꿇은 세 차사 앞에 서서는 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하지만 오빠, 할미가 전해 주래요.”
그리고.
“너는 결국 세상의 절반에 군림할지니.”
어느 순간 소녀의 것도, 노인의 것도 아닌 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만물은 태어난 의무를 다하는 날, 너의 찬사를 고대하리라.”
내게는 너무 과분한, 세상을 열었던 창세신의 축언을.
13장. 세상 저편의 왕에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