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3) (30/187)

13장. 세상 저편의 왕에게(3)

저승 던전 입구.

새하얀 공간에는 CCTV처럼 한 공간을 다각도로 비추는 화면들이 여럿 있었다.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은 제각각 자기가 담당하는 화면을 숨죽이고 지켜봤다.

던전의 내부를 중계하는 화면이었다.

대부분의 화면을 차지한 도산지옥에서는 얼마 전 저승을 승계한 ‘염라’와 던전이 만들어 낸 왕 ‘진광’이 대치 중이었다.

“허!”

그러던 중 안보팀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신화의 변이도가 급격하게 내려가고 있습니다……!”

37.892%

……

35.301%

31.493%

27.112%

……

24.938%

시시각각 내려가는 변이도.

전례 없는 일에 열네 명의 안보팀원들은 연신 비명을 질렀다.

온갖 버그를 관리해 왔던 안보팀으로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이.

‘어우, 역시 큰일이었네.’

난리 통 속에서 행정공무원 3832호는 생각했다.

처음 변이도가 떨어졌을 때부터 이거 100% 버그라고 짐작은 했었다만, 정말로 심각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버그는 그의 관할이 아니었다.

3832호는 그저 조용히 패닉에 빠진 안보팀을 구경했다.

그렇지만.

“던전 삭제 요청하죠.”

안보팀장 조금희가 불쑥 내뱉은 말에는, 강 건너 불구경 중이던 3832호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 삭제요?”

그녀의 말에 몇몇 팀원이 경악했다.

“팀장님, 지금 ‘염라’가 안 나왔는데요?”

한 명이 당황해서 물었으나 안보팀장은 태연히 팔짱을 꼈다.

“전무후무한 버그가 발생했는데, 그럼 어떡합니까.”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삭제 요청합시다. 어차피 버그투성이 던전이었는데 깔끔하게 날려버리죠.”

“……!”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구식 관료제 패치가 완료된 3832호의 초감각이 발동했다.

3832호가 알기로, 분명 지구청장 조옥희는 ‘저승 던전’보다 ‘염라’가 살아남기를 바랐는데.

안보팀장인 조금희는 이 기회에 ‘저승 던전’과 ‘염라’를 모두 제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행정팀과 안보팀이 물밑에서 싸움이 붙은 거다!’

뜻밖의 일에 행정공무원 3832호가 눈을 부릅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영민한 두뇌는 재빨리 최선의 결단을 내렸다.

‘……모르는 척해야지!’

지구 속담 중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두 상급자가 싸우는 데 얽혀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행정팀에 통신을 거는 안보팀 사이에서, 3832호는 열심히 눈치 없는 척을 했다.

***

“저는 저승의 왕입니다.”

나는 망자들에게 소리쳤다.

“반드시, 반드시 당신들에게 다음을 드리겠습니다.”

힘으로 옥좌에 오르기보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되새겼다.

단지 운이 없던 이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행에 삶을 빼앗긴 이들.

아무 죄 없이 죽게 된 선량한 이들.

나는 그들의 왕이다.

49년 전, 악의에 사무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내가 세상의 반대편에서 위로받았던 것처럼.

그들도 이제 나의 나라에서 못다 한 삶을 위로받게 할 것이다.

“……우리가.”

망자 한 명이 말했다.

“……우리가, 정말로 죽었나?”

나는 그 사람을 알아봤다.

던전 입구에서 나와 바리를 걱정하고, 초강과 처음 마주했을 때 도와달라며 포션을 던져주었던 중년인이었다.

“정말로, 이미 다 끝나버렸나?”

주름진 얼굴로 그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정말 돌아갈 수 없는 건가? 응? 되돌릴 수 없는 거야?”

서러워하는 망자의 얼굴에 가슴 아픈 현실이 되씹혔다.

나는 저승의 왕.

세상 모든 슬픈 자들의 왕이다.

설령 내가 금은보화로 치장한 다음 생을 약속한다 한들, 그들의 삶은 결국 잃어버린 단 한 번뿐일 것이다.

삶은 한 번이다.

한 번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 한 번을 돌이킬 수 없어 이 저승의 신화가 시작됐다.

끝을 보고도 끝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결국 세상의 저편을 만들었다.

영원의 신화는 결국 단 한 번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네.”

나는 중년인에게, 생이 끝난 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를 전했다.

“당신의 소중한 모든 것은 나의 가호 아래 영원할 것입니다.”

그때였다.

“웃기지 마!”

망자들을 선동하던 진광이 외쳤다.

“뭐가 영원해. 벌써 다 끝나 버렸는데!”

퍼어어억!

동시에 보이지 않는 강대한 힘이 나를 쳤다.

진광이 숨기고 있던 염라의 권능, 발설지옥의 힘이었다.

퍼어억!

퍼어어억!

빼앗긴 내 아버지의 힘이 나를 연달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크윽!”

핏물을 뱉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망자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진광을 바라봤다.

끝이 보이는 거짓과 끝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아직도 누구를 따를지 결정하지 못한 채로.

……그거면 되었다.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왕으로서의 천명은 끝났다.

이제는 그들의 선택이 남았을 뿐이다.

왕을 왕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왕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슬픈 자들은 그들의 왕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왕을 받아들일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할 왕의 길이다.

채애앵!

다시 한번 진광과 나의 검이 맞부딪쳤다.

“……진광!”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기쁘리라 생각했다.

악인과 싸우는 것만도 버거운 세상이었다.

선이 악보다 강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검을 겨눴다.

-너의 가장 큰 적은 너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선일 것이다.

강림 형의 그 말처럼 우리는 서로의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진광, 나는.”

맞댄 검에 힘을 더했다.

“망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당신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촤아아악!

내가 품은 검수지옥의 신화가 칼날나무를 그렸다.

하나로 이어진 검수지옥의 초식이 칼날의 숲을 이루며 몰아쳤다.

채애애앵!

이윽고 권능에 밀린 진광의 검이 튕겨 나갔다.

맨손이 되어 버린 진광을 향해 나는 멈추지 않고 검수지옥의 초식을 휘둘렀다.

“이것이 정녕 선입니까.”

초식을 휘두르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무너지고 있는 이 땅에서 저들의 눈을 가린 채, 언제까지고 평화가 계속되리라 거짓을 속삭이는 것이 정녕 당신의 선입니까.”

쿠우웅!

굉음이 울리며 나와 진광의 발치에 새까만 구멍이 뚫렸다.

그가 고집하는 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처참히 내려앉고 있었다.

“아뇨,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닙니다.”

구멍을 피해 그를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이룰 수 없는 선을 고집하는 것은, 아집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악일 뿐입니다.”

한데 그 순간.

“아집이라고?”

속절없이 밀리던 진광이 불현듯 눈을 불태웠다.

“악이라고?”

그가 반문하는 것과 동시에.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번쩍이면서.

검푸른 신성이 번쩍이며 내 검에서 비롯된 칼날나무가 되레 나를 덮쳤다.

촤아악!

촤아아아악!

믿을 수 없는 현상에 일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칼날나무의 초식이 무방비 상태의 나를 베어 냈다.

“……으윽!”

칼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피가 터졌다.

예상치 못한 칼날세례에 온몸 가득 자상이 생겨났다.

대처할 새도 없이 두 팔에 검푸른 신성을 두른 진광이 치고 들어왔다.

“그래,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파아앙!

다시금 검푸른 신성이 빛을 발했다.

“당신은 우리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파아아앙!

한 번 더 신성이 번쩍였다.

압도적으로 덮쳐 오는 힘에 영문을 모른 채 속절없이 바닥을 굴렀다.

“당신은 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입바른 말만 지껄일 수 있겠지……!!”

난폭하게 요동치는 신성이 진광의 절규에 섞여 들어 온몸을 때렸다.

“……크윽, 쿨럭!”

왈칵 피를 토해 냈다.

검붉게 젖은 땅 위로 용케 놓치지 않은 검을 박아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

그런데 흔들리는 시야로 무언가 다른 게 보였다.

검푸른 발설지옥의 신성을 휘감은 진광의 뒤에,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거울이 세 개 서 있었다.

“업경……?”

죄인의 업을 비추는 염라의 거울.

저승 신화를 복제하는 던전이 업경마저 복제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어째서 진광을 공격했던 검수지옥의 초식이 내게 되돌아왔는지도 깨달았다.

“업경으로 내 공격을 받아친 거였나?”

업경은 죄인의 업을 꿰뚫어 보고 그 업을 죄인에게 되받아치는 신물이었다.

그렇다면 진광의 업경은 그를 해치려던 나의 힘을 나의 업으로서 받아친 것일 터였다.

그렇게 내 공격을 비추어 내게 돌려준 것일 터였다.

“……아니.”

그러다 문득 묘한 위화감을 알아챘다.

“비추는 건…… 내가 아니야.”

진광을 벽처럼 둘러싼 세 개의 거울은 오직 진광만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 안에서 일렁이는 새까만 어둠은 모두 진광의 것이었다.

업경은 진광의 업을 비추어 나를 공격한 것이다.

“……본인의 업으로, 힘을 얻는다?”

역시 무언가 이상했다.

던전이 저승의 신화를 왜곡한 것처럼, 업경의 신화도 어딘가 왜곡된 것이 틀림없었다.

“……!”

진광의 업경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

파아앙!

재차 검푸른 신성이 빛을 발했다.

“어디 계속해서 말해 봐!”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온 진광이 내게 팔을 뻗었다.

“모두를 지키려는 내 소원이 아집이라고 말해 보라고!”

파지직!

그의 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발설지옥의 신성을 휘감은 손아귀가 내 목을 움켜쥐었다.

“크윽!”

숨을 삼키며 그를 노려봤다.

진광의 뒤에 자리한 세 개의 거울.

그 속에 비친 세 명의 진광이 일제히 검붉은 피눈물을 흘리며 내게 외쳤다.

“당신이 나였어도……!”

피눈물과 함께 거울에서 피어오른 새까만 기운이 안개처럼 내게로 번져 왔다.

파지직!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스파크가 터졌다.

“당신이 나였어도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거울에서 번진 불길한 기운이 진광의 팔에 감겨 그의 신성에 더욱 힘을 더했다.

“……!”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목을 죄어 오는 발설지옥의 흉포한 신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검푸른 신성에 진득하게 얽혀 전류처럼 내게 밀려드는 감정 때문이었다.

“당신이 우리처럼 아무 이유 없이 허무하게 죽어버렸어도, 그랬어도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사라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 목을 쥐고 외치는 진광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도산지옥의 망자들을 베는 순간 그들의 절규가 그대로 전해졌던 것처럼, 이번에는 울분과 살의가 뒤섞인 진광의 절규가 그대로 돌아왔다.

“어디 그 잘난 입으로 또 한 번 고결하게 지껄여 봐!”

파아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또다시 빛을 발하고.

압도적인 힘이 나를 내동댕이쳤다.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뒤엔 또 울컥 핏물이 올라왔다.

진광이 남긴 발설지옥의 신성은 쉼 없이 나를 옥죄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의 잔류가 선명했다.

“아윽…….”

속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불을 삼킨 것처럼 화끈거렸다.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인 몸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아픈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몸 때문일까.

아니면 이 몸에 밀려든 누군가의 한 때문일까.

업경에 비친 죄인의 모습.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가 지어 버린 죄.

“……그렇구나.”

한이 서린 채로 날 노려보는 진광의 눈길을 망연하게 마주하며 깨달았다.

“당신도…… 망자였구나.”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당신도, 내가 인도해야 하는 거였어.”

업경에 비친 그는 더 이상 내가 쓰러트려야 하는 왕이 아니었다.

징악의 권능으로 벌해야 할 죄인이며, 권선의 권능으로 이끌어야 할 망자였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순간.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진광이 소리쳤다.

“나는……, 우리는!”

파지지직!

검푸른 스파크와 함께 진광을 비춘 업경이 검게 물들었다.

“계속해서 살아갈 거야!”

거울에 비친 그의 업이, 그의 깊은 한이 폭발적으로 그의 힘을 증폭시켰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지어 버린 죄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려는 내게로 돌아와 나를 죽이려 들었다.

“당신을 없애고, 지금까지처럼 언제까지고 영원히…… 이대로 함께 살아갈 거라고!”

그러나 그 순간.

파장창!

나와 진광 사이에 연푸른 신성을 두른 얼음 조각이 꽂혔다.

이 저승의 마지막 왕.

한빙지옥 송제의 힘이었다.

“안 돼……!”

연푸른 신성에 휩싸인 송제가 진광을 가로막았다.

“아빠, 이제 그만해……!”

비명처럼 외친 그녀가 진광을 향해 한빙지옥의 신성을 쏟아 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