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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1) (28/187)

13장. 세상 저편의 왕에게(1)

한빙지옥.

망자를 차례로 심판하는 시왕지옥의 세 번째 지옥.

송제대왕이 다스리는 그곳은 부모를 해치는 패륜을 벌하는 지옥이다.

휘몰아치는 칼바람은 그곳을 지나는 죄인을 뼛속까지 얼려버린다.

저승 던전의 한빙지옥은 하얗게 얼어붙은 아이스 링크였다.

신화의 힘이 깃든 빙상장은 천장이며 벽까지 새하얀 서리가 맺혀 있었다.

곳곳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고드름 다발은 꽃송이처럼 아름다웠지만, 자칫 바라보는 것만으로 베여버릴 듯 날카로웠다.

“아아-아아아아.”

서리를 뒤집어쓴 망자들이 알 수 없는 말을 웅얼대며 모여들었다.

그들의 한기는 내게 닿는 순간 곧장 사그라졌지만, 그들의 텅 빈 눈과 마주치자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안타까웠다.

살갗을 에는 얼음 감옥에 갇혀버린 그들이.

화르르륵!

손을 뻗었다.

초강을 쓰러트리면서 손에 넣은 화탕의 권능.

손끝에서 뻗어 나간 검붉은 신성이 화탕의 불길이 되어 망자의 몸을 감쌌다.

“아-아아아-!”

불길에 닿은 망자들이 괴롭게 몸을 비틀었다.

“……아아……아.”

그러나 잠시뿐.

온몸을 뒤덮은 얼음 조각들이 희부옇게 녹아내리고, 흉하게 일그러졌던 그들의 몸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그들의 왕이 되고자 한 내가 그들의 해방을 바랐기 때문이다.

[ ‘왕’의 권능들이 망자의 지배권을 겨룹니다! ]

[ 초강의 권능이 송제의 권능을 무력화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송제의 군대를 무력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미 왕의 권능을 두 개 손에 넣은 상태였다.

같은 왕일지라도 권능이 하나뿐인 그녀는 이미 내 상대가 아니었다.

“송제, 당신은 진광이 염라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녹아내리는 망자들 사이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염라를 칠 생각도 없었죠. 당신은 초강과 염라가 함께 나를 치게 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나 혼자서는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진광과 무척이나 닮은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왜 날 속였습니까?”

그녀의 선은 무엇인지 추궁했다.

“당신도 진광처럼, 던전의 힘으로 망자를 영원히 이곳에 묶어둘 생각입니까?”

내 추궁에도 송제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쿠우웅!

쿠우우웅!

검수지옥이 무너졌고, 화탕지옥이 무너졌다.

그녀의 한빙지옥 역시 까맣게 무너지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거쳐 왔던 다른 지옥들처럼 이곳도 금세 붕괴될 터였다.

여유롭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전 당장이라도 당신의 권능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권능을 빼앗으면 진광을 더 쉽게 상대할 수 있겠죠.”

나와 진광은 왕의 권능을 두 개씩 가지고 있었다.

이제 던전의 키는 송제가 되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힘의 저울이 기울 것이다.

“당신은 초강이 어떤 상태였는지 봤겠지.”

이윽고 송제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죽은 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걸 봤을 거야.”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눈치챘다.

“……설마, 송제 당신도 망자였던 겁니까.”

낭패였다.

망자의 삶을 유지시키겠다는 진광의 뜻에 송제가 찬성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송제 본인도 망자였다면…… 지금 나는 결국, 그녀에게 이대로 순순히 죽어달라는 것이 아닌가.

“당신에게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야.”

그때 송제가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왕을 기다렸어.”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에 떠오른 온기는 엷고 생경했지만 분명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망자의 삶을 잇는 던전의 권능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던전은 어느 순간부터 잘못됐어. 공간의 법칙이 바뀌고, 시간과 인과가 꼬여서…… 던전에 들어온 순간 이미 육신을 벗어나 죽게 되지.”

오랜 세월 던전을 지키며 알게 된 것들을.

“하지만 당신들은 달랐을 거야.”

또한 어렴풋이 눈치챈 우리의 정체까지도.

“이제는 먼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지만, 그래도 나는 기억해.”

그녀의 눈은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현실이 될 수 없는 꿈을.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었어. 이 도시를 살아가던 사람들.”

[ 공간의 주도권이 바뀝니다 : 사후세계(死後世界) → 사후세계(死後世界) ]

팝업창이 떴다.

“그렇게 갑자기, 단지 운이 나빴다는 이유로 죽어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파아앙!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망자들이 반짝이는 보석으로 화했다.

송제 스스로 내게 한빙지옥의 주도권을 넘긴 것이다.

[ 염라의 권능이 망자의 한을 읽습니다. ]

그녀가 부리던 망자들의 기억이.

그들이 살아가던 과거의 어느 날들이 꿈결처럼 펼쳐졌다.

“그래, 이게 우리야.”

그러나 이제는 그 꿈에서 깨어나야만 한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하나하나 평범한 사람들.

가족, 친구, 연인,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삶을 빼앗겨야 했던 모든 이를 대신해서.

그들의 얼어붙은 왕이 물었다.

“새로운 왕이여…… 당신은, 우리에게 ‘진정한 다음’을 줄 수 있어?”

***

도산지옥.

수많은 망자들과 진광이 머물던 공원.

누더기가 되어 무너져 가는 낙원.

누군가의 이룰 수 없는 꿈.

나는 이 저승 던전의 마지막 결전지로 향했다.

쿠우웅!

쿠우우웅!

이제 지평선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검은 공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방을 집어삼키고 있는 새카만 먹물이 당장이라도 해일처럼 밀려올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지옥의 초목은 전과 같이 푸르고 싱그러웠다.

변함없이 싱그러워서 도리어 덧없이 느껴졌다.

그것은 명백한 가짜였으니까.

“야, 이거 진짜 빨리 나가야겠는데?”

발걸음을 내딛던 호구별성이 흠칫했다.

그녀가 디디려던 바닥은 어느새 새까맣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떨어지면 끝이 없을 것처럼 깊고, 함부로 바라보고 있으면 무심코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아득한 구멍이었다.

“괜찮겠느냐. 결국 네가 부릴 망자는 한 명도 없는데.”

옆에서 발을 맞춰 걸으며 사라는 내게 망자가 없는 것을 염려했다.

검수지옥, 화탕지옥, 한빙지옥.

세 개의 지옥을 거치면서 나는 모든 망자를 해방했기 때문이다.

“상관없습니다.”

어느덧 가까워진 도산지옥을 찬찬히 눈에 담으며 말했다.

이곳의 망자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던전이 무너지고 있음에도 변함없이 행복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제야, 클리어 조건을 확실히 알겠습니다.”

[ 망자의 땅 ]

- 내용 : 망자의 왕으로 군림하십시오.

- 클리어 조건 : 모든 망자의 통솔

모든 망자를 통솔하는 것.

그것은 망자를 군대로 부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 저승 던전의 모든 망자들이 따르는, 그들이 원하는 왕이 되라는 뜻이었다.

이곳의 망자들에게 ‘예전처럼 살게 해 주겠다’고 말했던 진광처럼.

그리하여 그가 그들의 왕으로 추대된 것처럼.

망자를 자신의 백성으로 거두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던전을 클리어할 방법은 진광과는 반대일 터다.

“……저는 진정한 저승의 왕으로서, 더 늦기 전에 그들을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아아앙!

불현듯 번쩍이는 검푸른 신성이 나를 덮쳤다.

“……!”

확인할 새 없이 검부터 부딪쳤다.

채애애앵!

맞부딪치고 나서야 상대와 눈을 맞추었다.

“……형.”

사실 마주치기 전에 이미 알았다.

그의 신성에는 내가 짊어져야 할 숙명의 무게가 담겨 있었으니까.

“……강림 형.”

염라의 차사가 다시 한번 나를 맞이했다.

“돌아왔구나, 막내야.”

머리 하나는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건조한 눈빛.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얼굴 때문일까.

혹은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 크고 단단한 몸 때문일까.

나는 문득 그가 나를 가로막고 선 어떠한 관문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제는 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겠더냐.”

채애앵!

거듭 검이 부딪쳤다.

“수많은 선(善)의 갈래에서 네가 선택한 선은 무엇이냐.”

채애애앵!

부딪친 검신에서 검푸른 불꽃이 튀었다.

형과 내가 나눠 가진 죽음의 권능이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그 무게가 재차 나를 짓눌렀다.

“자, 이제 대답해 보아라.”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그가 다시 물었다.

“……!”

힘겹게 검을 떨쳐 내던 나는 일순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달랐다.

조금 전까진 버티는 것도 버겁던 힘이었다.

그런데 다시금 맞닥뜨린 그의 질문 앞에서, 나는 어쩐지 그 힘을 받아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너의 적은 너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선일 것이다.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이제는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팔에 휘감긴 죽음의 권능.

이 죽음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의 선은.”

채애애앵!

검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저의 선은, ‘다음’입니다.”

확신을 담아 나를 억눌렀던 그의 검을 받아쳤다.

채애앵!

채애애애앵!

받아칠 때마다 던전에서 만났던 이들이 떠올랐다.

삼도천의 길을 열어줬던 현의옹과 탈의파.

내게 진정한 왕이 되어주기를 부탁한 한빙지옥의 송제.

안식을 찾지 못하고 고통받던 수많은 망자들이 떠올랐고.

“저의 선은 안타깝게 끝나버린 선한 이들에게 그다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

왕으로서의 숙명을 떠올렸다.

“선인에게 미래를 돌려줌으로써 그들이 다시 선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저의 권선입니다.”

채애애앵!

한 번 더 검이 부딪친 순간.

날아간 것은 놀랍게도 강림 형의 검이었다.

“좋다.”

빈손이 된 그가 나를 돌아봤다.

“그럼 마저 증명해 보거라.”

패배의 기색 없이 그는 서늘한 얼굴로 내게서 몸을 물렸다.

“네가 선택한 선의 길로 저들을 인도해라.”

나를 돌아본 그가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두루마기 자락이 개문(開門)을 선언하듯 휘날렸다.

“저들의 왕이 되어라.”

차사가 왕에게 가야 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의 뒤로 이미 다른 왕을 모신 수많은 망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직후.

파아아앙----!

황금빛 신성이 도산지옥 가득히 번쩍였다.

신성에 둘러싸인 누군가가 무서운 속도로 내게 돌진했다.

“결국, 결국은……!”

진광.

도산지옥의 왕이 황금빛 신성을 폭발시켰다.

크게 고함치며 무서운 힘으로 달려들었다.

“당신은 결국, 우리를 해치러 온 거야……!!!”

채애애애앵!

도산지옥의 검과 검수지옥의 검이 맞부딪쳤다.

쿠우웅!

쿠우우웅!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 검게 부서져 내렸다.

“꺄악!”

“아아악!”

근처의 망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변함없이 순진한 얼굴로, 지금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해 그저 멀리 도망치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망자들.

그들이 눈에 들어와서, 나는 이를 악물며 있는 힘껏 진광의 검을 내리쳤다.

채애애앵!

내려치는 힘에 진광이 밀려 주춤했다.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나아갔다.

쉴 틈 따윈 주지 않았다.

더욱 빠르게, 더욱 강하게 진광을 몰아붙였다.

채애앵!

채애애애앵!

채앵!

검을 섞을수록 진광의 눈에 짙어지는 독이 보였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는 상냥함 대신 분노와 증오가 얽혀 있었다.

“결국, 우리를 죽이겠다는 겁니까!”

내 검을 쳐내며 진광이 물었다.

“겨우 되찾은 우리의 삶을 빼앗겠다는 겁니까!”

채애애앵!

노성을 터트린 그가 팔 하나를 희생하며 무리하게 거리를 좁혔다.

반 박자 어그러진 호흡의 틈새.

흩뿌려진 핏물을 가르고 노린 듯이 찔러 들어오는 검.

“진광!”

나는 고개만 살짝 틀어 피한 뒤 그가 검을 채 회수하기 전에 뻗어진 손목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챙그랑!

손목에서 검을 뽑아내자마자 그가 놓친 도산지옥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던전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핏발 선 눈으로 억지를 부리는 그에게 소리쳤다.

“던전의 권능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저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죽음을 받아들여야……!”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아아아앙!

도산지옥의 권능이 번쩍였다.

지켜야 할 사람들의 수만큼 분신을 만들어 내는 힘.

무수히 많은 황금빛 분신들이 일제히 나를 덮쳤다.

끝이 보이는 낙원을 지키기 위해서.

“개소리! 결국 저들을 죽이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분노로 얼룩진 얼굴로 진광이 외쳤다.

“누구도 저들을 다시 데려갈 수 없습니다……!!!”

죽은 딸을 끌어안고 왕의 권능을 받아들였던 때처럼, 그가 절규했다.

“당신의 손아귀에서…… 내가, 저들을 지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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