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네가 왕좌에 오른다면(1)
[ 당신은 검수지옥(劍樹地獄)의 왕, 오관(五官)입니다! ]
팝업창이 떴다.
[ 왕의 권능으로 망자를 부릴 수 있습니다! ]
[ 모든 망자의 왕으로 군림하십시오! ]
“……됐네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목표했던 왕의 권능은 손에 넣었다.
비로소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이제 정말로 던전의 클리어를 노릴 수 있겠어요.”
곧장 두 신과 바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검수지옥의 권능을 차지했지만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던전의 망자들을 구하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던전을 클리어해야 했으니까.
“서둘러 다른 왕들을…….”
“아니, 우선은.”
문득 사라가 내 말을 멈추게 했다.
그러고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네 상처부터 치료해야겠구나.”
어느새 다가온 커다란 손이 불시에 어깨를 잡았다.
“이건 왕에게 당한 거였지?”
“아.”
그제야 한발 늦게 온몸이 욱신거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칼날에 당했던 상처들.
그중에서도 검수지옥의 왕이었던 도사가 붙잡은 어깨는 뼈까지 깊게 파여서, 아직도 간헐적으로 은빛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신성이 독처럼 퍼져 있구나. 이건 내 힘으로 직접 몰아내야겠어.”
사라가 손에서 하얗게 빛을 발하며 말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어루만지자, 그의 손끝에서 서천꽃밭의 신성이 온기처럼 번져 왔다.
상처를 살피던 그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조금 쓰릴 게다.”
“……!”
그 순간 정말로 짜릿하게 통증이 일어서 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마 사라의 힘으로 오염된 신성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리라.
고통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넝마가 되어 버린 옷에, 옷이 찢어진 자리마다 생채기로 뒤덮인 몸이 새삼 시야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보다가 괜히 다른 말을 꺼냈다.
“이 옷, 원래 가짜 몸의 일부잖아요? 24시간마다 찢어진 것도 자동 복구된대요.”
사실 원래도 자동으로 세탁이 되는 건 알고 있었던 터라 딱히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다행이죠? 이렇게 망가져도 새로 살 필요도 없고.”
“어이구, 그래, 좋겠다.”
호구별성이 팔짱을 꼈다.
“몸이 찢어져도 옷은 남아서 좋지?”
“…….”
더 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멋쩍게 웃었다.
“……오빠, 상처를 치료하면요.”
“응?”
“그때는, 다들 빨리 나가는 게 좋겠어요.”
그때 가만히 있던 바리가 조금 머뭇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안 그래도 여기가 정말 불안하긴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했을 때부터 검수지옥은 이미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 뻥뻥 구멍이 뚫리며 공간 째 지워지고 있었으니, 왕의 권능을 손에 넣은 이상 당장 나가는 편이 옳았다.
“이 검수지옥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바리가 조금 더 심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더 이상 이곳의 미래가 읽히지 않아요.”
언제나처럼, 제가 본 것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 얼굴이었다.
“처음 왔을 때와는 달라요. 그때는 그냥 여러 시간대가 겹쳐서 무슨 장면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정도였어요.”
이곳은 시공간이 꼬여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미래가 뜻대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는 그냥 까맣기만 해요. 먹물을 칠한 것처럼.”
긴장한 듯 그녀가 숨을 삼켰다.
“미래가 없는 거죠. 아마도…… 저승 던전 자체가 곧 무너지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나와 두 신이 침묵했다.
미래를 읽는 바리의 능력은 분명 독보적이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반드시 대비해야 했다.
“곧바로 다른 왕을 치러 가야겠구나.”
“누구부터? 아니면 진광한테 가서 동맹을 맺을까?”
사라의 말에 호구별성도 즉시 계획을 물어 왔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대로 초강이나 염라를 친다면 그 둘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선 진광과 손을 잡는 게 그나마 안전하겠지.
그가 보여준 태도가 진심이든 아니든, 서로의 전력이 비등한 상황에서 제삼자가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을 테니.
그런데.
“내가 염라를 치겠어.”
의외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은 우선 초강을 치도록 해.”
송제.
길게 늘어뜨린 백발에 한랭한 서리가 맺힌 채로.
한빙지옥의 왕이 얼어붙은 망자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뭐야, 너 지금까지 다 보고 있었어?”
갑작스러운 송제의 등장에 호구별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진광도 순순히 보내준 게 아니었나 보군.”
사라도 언짢은 얼굴로 동의를 표했다.
결국 진광과 송제가 다섯 번째 왕을 견제하고 있었던 셈이었으니.
“뭐라고 생각해도 좋아.”
두 신의 반응에도 송제가 아랑곳없이 대꾸했다.
“난 단지 제대로 된 검수지옥의 왕을 기다렸을 뿐이야.”
제대로 된 왕.
나는 그녀의 말을 흘려 넘기지 않았다.
내가 오기 전에도 검수지옥의 권능은 흑탑의 도사가 쥐고 있었다.
즉, 송제는 그를 제대로 된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진광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
송제가 말을 이었다.
“그는 도산지옥을 지키는 걸 우선해. 그곳을 비우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지. 그래서는 염라와 초강을 못 이겨.”
진광과 동맹을 맺었음에도, 어째서 새 왕을 기다렸는지를.
“당신과 내가 그들을 쳐야 해.”
닮았다는 바리의 말처럼.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진광과 닮아 있었다.
다만 진광과 달리 무표정이기 때문일까.
닮았지만 진광보다 훨씬 더 차가운 인상이었다.
“진광에게는 알리지 않을 겁니까?”
“그 사람은 도산지옥을 지켜야 해.”
진광은 도산지옥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나와 송제, 둘이서 싸워야 한다.
나는 송제의 말을 곱씹었다.
“정말 그 이유뿐입니까?”
다시 한번 물은 순간.
지금껏 무표정이었던 송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주변에 한기가 번지는 듯한 차가운 미소였다.
“난 왕의 권능을 하나 더 갖고 싶어.”
요컨대 둘이서 동맹의 한 축을 배제해버리자는 뜻이었다.
어차피 나눠 가질 적의 권능은 두 개밖에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래, 그런 이유라면.
나는 그 이상 묻지 않고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신도 결국 욕망을 더 믿는구나.”
그때 송제가 말했다.
한빙지옥의 권능, 차가운 냉기를 변함없이 풍기면서.
“선의보다 욕망이, 필요한 사람을 가리는 데는 더 확실하지.”
꽤나 뼈가 있는 말이었기에 나는 결국 쓰게 웃었다.
***
화탕지옥.
초강대왕이 다스리는 그곳은 도둑질을 한 죄인을 지옥불이 끓어오르는 화탕으로 벌하는 지옥이다.
“사우나라니. 지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네.”
빨간 목욕탕 표시를 가리키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송제가 일러준 ‘화탕지옥’은 4층짜리 거대한 사우나였다.
사우나 주변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수건으로 양 머리를 만들어 쓴 좀비들이 불길을 뿜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초강 이거 진짜 웃기는 애였네?”
양 머리 좀비를 가리키며 호구별성이 기막혀했다.
“기왕이면 구운 계란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빠나나우유도!”
아닌가, 그냥 즐기는 건가.
나는 호구별성이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녀가 현대의 목욕탕 문화까지 즐긴다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는 배가 고프지 않구나.”
그때 옆에 선 사라가 말했다.
지옥의 입구에서 태연히 구운 계란을 노리는 호구별성 때문에 생각이 미쳤다는 듯.
“그렇네요.”
나는 그에게 동의했다.
현신하면 인간처럼 끼니를 챙겨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딱히 배고픔을 느낀 적이 없다.
이것도 공간의 법칙이 바뀌어서일까?
“이만 들어가죠.”
다시금 사우나로 시선을 돌리며 정리했다.
“왕이 어딨는지도 알 것 같아요. 2층이네요. 확실해요.”
왕의 권능을 지닌 채로 다른 왕의 권역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이전과 달리 초강의 위치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가진 왕의 권능이 내게 깃든 검수지옥의 권능을 부르는 것 같았다.
“곧장 2층으로 가서 초강을 치겠습니다.”
준비는 끝났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사우나에 들어선 순간 팝업창이 떴다.
[ ‘화탕지옥’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던전의 등급은 ‘신화’입니다.
- (!) 해당 던전의 신화는 변이되었습니다. (변이도 : 37.892%)
- 클리어 조건 : 화탕지옥의 망자 지배
입장하자마자 1층을 가득히 메운 좀비가 보였다.
“이야, 좀비를 얼마나 모은 거래?”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좀비 떼를 둘러보며 호구별성이 감탄했다.
하긴, 송제와 진광은 좀비 군대를 모으는 데 소극적이었으니까.
지난 10년간 던전에 도전했던 헌터들은 대부분 이쪽 진영의 좀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간의 영향력’이 뭔가 이상했다.
[ 화탕지옥 ]
- 영향력 : 50%
검수지옥에서는 좀비를 공격해야 깎을 수 있었던 영향력이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50%로 나타나고 있었다.
“……상관없지. 빨리 끝낼수록 좋으니까.”
나는 일행을 뒤로한 채 뛰었다.
“저는 이대로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영향력이 50%라면 굳이 좀비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
좀비가 몇이든 어차피 공간의 주인인 초강만 치면 공략은 끝나니까.
“그래, 조심해라!”
뒤쪽에서 호구별성이 외쳤다.
잡히지 않는 그녀의 권능이면 저 많은 좀비한테서도 무사할 터였다.
걱정을 접어 두고 재빨리 2층에 올랐을 때였다.
촤르르륵!
뒤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철문으로 막혀버렸다.
화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솟아오른 불길이 철문을 장벽처럼 휘감았다.
“……가두겠다, 이건가?”
당황할 것 없이 2층 로비를 돌아봤다.
초강.
화탕지옥의 왕이 불타는 좀비들 사이에 서 있었다.
[ ‘왕’과 조우했습니다! ]
[ ‘왕’과 ‘왕’의 권능이 망자의 지배권을 겨룹니다! ]
눈이 마주친 순간 팝업창이 떴다.
“……너.”
누렇게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너, 대체 뭐지?”
그런데 이번에 마주한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대체…… 대체, 너는 뭐지?”
일전에 봤던 거만한 모습과 달리, 초강은 벌써 눈에 띄게 몸을 떨고 있었다.
“다…, 다, 전부 다, 여기를 버리고 떠났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말은 전혀 맥락을 알 수 없었다.
“대체, 뭐냔 말이야!”
뻐어어엉!
그때였다.
뻐어엉!
뻐어어엉!
갑자기 연달아 폭발하는 소리가 울렸다.
폭발음이 울릴 때마다 벽이며 천장에 새까만 구멍이 뚫렸다.
“……이런.”
낯설지 않은 광경에 나는 무심코 침음했다.
검수지옥이 무너지던 것처럼.
화탕지옥도 기어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없어!”
초강의 가슴에 박혀 있는 핵은 이미 확인이 끝났다.
나는 명확하게 드러난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너, 너어어……!”
초강도 지지 않고 내게 팔을 뻗었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크게 치솟았다.
2층을 그득하게 채운 좀비들이 불티를 뿌리며 내게 덤벼들었다.
“……큿!”
초강이 직접 일으킨 불길이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좀비들이 두르고 있는 불길과 다르게 그녀의 신성이 강하게 느껴졌다.
스쳐 지나간 불길은 허공을 크게 휘돌아 다시금 뻗어 오고.
좀비 떼는 초강에게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틀어막으며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온다.
좀비들의 불길은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문제는 숫자였다.
그러니 한 번에 처리해야 했다.
나는 곧바로 내가 가진 왕의 권능을 발휘했다.
촤아악!
촤아아악!
손에 든 검이 검수지옥의 신화를 그렸다.
일전에 영웅담 ‘검수발아’를 그려 냈던 초식이었다.
이제는 왕의 권능까지 담긴 그 초식의 끝에서 하나씩 피어난 칼날나무가 이윽고 광대한 숲을 이루었다.
L급 스킬, 검수지옥(劍樹地獄).
수십 수백 번의 공격이 연쇄된 하나의 초식은 다시 수많은 칼날나무가 되어 좀비들을 꿰뚫었다.
[ 오관의 권능이 초강의 권능을 무력화합니다! ]
한순간에 시퍼런 칼날에 꽂힌 좀비들은 스스로의 불에 타들어 가는 사람처럼 꿈틀거렸다.
“그어어어……!”
절절한 고통이 느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
검을 붙든 손에 멋대로 힘이 들어갔다.
좀비들을 막기 위해 벌인 짓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고통받길 원하지 않았다.
그 이상 죽어도 죽지 못하는 몸으로 신의 권능에 휘둘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빨리 해방시키자.
이 공간을 나의 공간으로 바꾸어서.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물어뜯을 기세로 짓쳐들어온 초강의 불길을 크게 베었다.
그렇게 시작된 초식이 다시 한번 칼날나무를 그렸다.
이번에는 오로지 초강 하나만을 노린 칼날이었다.
초강은 도망칠 수 없다.
초강을 보호하듯 배치되어 길목을 막았던 좀비들이 이제는 숲을 이루는 칼날나무가 되어 역설적으로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이, 이이, 너어어어!”
휘몰아치는 칼날의 잎새가 초강을 덮쳤다.
검수지옥에 갇힌 그녀의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아아……아아악!”
무수하게 솟구치는 칼날의 나무 사이로 검붉은 핵이 반짝였다.
재빨리 그것을 낚아채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파지직!
핵이 부서진 순간.
[ 공간의 주도권이 바뀝니다 : 사후세계(死後世界) → 사후세계(死後世界) ]
칼날나무에 구속된 망자들은 눈부신 보석이 되어 흩어졌다.
왕인 내가 그들의 해방을 바랐으므로.
“…으, 으윽, 으…….”
너덜너덜한 몸으로 핵까지 빼앗긴 초강은 고통스럽게 바르작거렸다.
“너…… 너,는, 대체.”
한데 새까맣고 끈적거리는 점액 같았던 몸이 삽시간에 평범한 인간의 신체로 돌아왔다.
마치 내 권능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은 망자들처럼 완전히 드러난 초강의 모습에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흑탑?”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검은 옷.
그녀는 흑탑의 도사들과 똑같은 차림새였다.
“초강도 흑탑이었다고?”
“죽, 죽기 싫…, 윽, 커헉……!”
초강은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로 중얼거리던 끝에 피를 토하며 무너졌다.
직후.
[ 염라의 권능이 망자의 기억을 읽습니다. ]
망자의 기억을 잃는 권능이 발동되면서 뜻밖의 장면들이 펼쳐졌다.
-미래가 안 보여.
-그냥 까맣군. 끝이야.
-나가야 해. 나머지 지옥은 포기한다는 전언이 왔어.
-잠깐, 왜, 왜 나는 그냥 내버려 두는 거야?
-하하, 몰라서 물어? 넌 여기서 못 나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봐, 초강. 너는 이미…….
-잠깐, 잠깐 다들 멈춰! 가지마……!
경악한 초강의 목소리.
초강을 둘러싼 새까만 자들.
새까만, 새까만 옷을 입은 자들.
내가 잘 알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차사들.
“발설지옥 형들……?”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목소리가 떨렸다.
“뭐야…… 형들이 왜…… 어떻게……?”
생각을 거듭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흑탑의 도사들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대체 왜, 대체 어떻게 그들이 발설지옥 차사들의 모습을……!
파아아앙!
그러나 제대로 기억을 읽기도 전에 초강이 빛으로 산개하면서 새까만 보석으로 변해버렸다.
[ 혼(惡) ]
- 생전에 악했던 혼.
- (!) 물질계에 방치될 시 우주퇴적물로 변이합니다.
나는 이제, 그 혼을 챙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체.”
새까만 혼을 손에 쥐고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왜 환생조차 못 하고 소멸했던 발설지옥의 차사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나머지 지옥을 포기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정리되지 않는 의문에 두통이 밀려오던 때였다.
퍼어어억!
갑자기 온몸에 가해진 엄청난 충격에 나도 모르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윽.”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그런데 전신을 강타한 그 힘이 어째서인지 낯설지 않았다.
그래, 마치 닿지 않고도 타격을 가하는 염력과도 같은 그…….
“……이게, 무슨?”
초강의 기억에서 봤던 발설지옥의 차사들.
전신을 강타한 이 낯설지 않은 힘.
“설마……?”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아니야.”
그 생각을 억누르며 나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한순간에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리게 흘렀다.
주변뿐 아니라 나 자신마저 그러했다.
애써 억누르려는 불길한 생각마저도 내 마음과 상관없이 아주 느리게, 그렇기에 더욱 질척하고 선연하게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곧 현실이 될 것을 예감했던 그것이…….
“제연아, 꼴이 그게 다 무어냐.”
끝내 정말로 눈앞에 걸어 나왔다.
“그새 그렇게 싫어하던 헌터라도 된 게냐.”
크디큰 키.
허리에 찬 칼.
새까만 두루마기 자락.
느리게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시야를 파고들고.
“……강림 형.”
마침내 나를 내려다보는 사늘한 눈길과 마주했을 때.
-그분이 보이는데…, 오빠도 같이 보여요. 그러니까 정확히는…….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내려다보는 그분의 모습이에요.
잊을 수 없었던 바리의 예언이 곱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