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다섯 번째 왕(2)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반드시 왕의 권능이 필요하다.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진광을 바라봤다.
헌터들을 구하고, 지금껏 이웃들을 지켜온 진광은 분명 객관적으로 믿을 만한 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는 우리를 과연 어떻게 대할까?
“저희는 이곳에 있겠습니다!”
같이 온 헌터들이 먼저 답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초강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헌터들.
이제는 고작 네 명밖에 남지 않은 그들이 진광에게 모여들었다.
리더인 중년인이 진광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내게 반말을 했던 것과 달리 제대로 예의를 갖춘 태도였다.
아니, 단순한 예의를 넘어 내버려 두면 이대로 땅바닥에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아니, 너무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저는 그냥 대표로 왕의 능력을 가졌을 뿐이니까요.”
진광이 헌터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힘을 가진 왕임에도 저보다 약한 헌터들의 저자세를 불편해하는 모습은 진광의 성품을 더욱 올곧아 보이게 했다.
[ ‘진광’이 네 명의 망자를 통솔합니다. ]
그 순간 팝업창이 떴다.
‘망자’라니.
망자의 땅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에서는 모두 망자로 취급되는 걸까?
새삼스럽지만 이 공간의 법칙은 정말 제멋대로구나.
팝업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진광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득하게 바라보는 눈이 내게도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나는 우선 화제를 돌렸다.
“송제와 동맹이신 것 같은데…… 다른 왕들도 동맹을 이루고 있는 겁니까?”
일단 현재 ‘저승’의 정세를 알려달라고.
물어보면서 진광의 눈빛을 살폈다.
혹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보일까 긴장하면서.
“그렇습니다.”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광이 답했다.
“염라와 초강의 동맹, 그리고 저와 송제의 동맹이 던전의 지배를 두고 대치하는 중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던전의 왕은 넷뿐이라는 뜻이다.
생각보다 훨씬 적은 숫자에 조금 놀랐다.
저승 시왕의 신화를 이었다면 최대 열 명의 왕이 존재할 수 있을 터.
그럼에도 넷밖에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직 검수지옥이 남아 있지만 염라와 초강도, 지금은 어느 쪽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대편에 권능이 넘어가는 순간 힘의 균형이 무너질 테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것이지요.”
이해했다.
왕이 둘씩 동맹을 맺은 지금.
새로운 왕이 탄생한다면, 새 왕이 합류한 측으로 세가 기울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맹 대 동맹뿐 아니라 동맹 내에서도 서로 견제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는 동맹을 맺어 2 : 2인 상황이지만, 적의 세력을 치는 데 성공할 경우 상대의 권능을 하나씩 차지한 동맹이 1 : 1로 대치하게 된다.
그때 어느 한쪽이 새 왕의 권능까지 손에 넣는다면 균형을 무너뜨리고 상대를 꺾을 수 있을 테니까.
[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구나. ]
[ 동맹끼리도 서로를 믿을 수는 없겠네. ]
사라와 호구별성이 전음으로 말했다.
“그런데 남은 지옥이 하나밖에 없습니까?”
나는 진광에게 물었다.
시왕지옥을 모방한 만큼 던전에는 본래 열 개의 지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진광은 마치 지옥이 다섯 개밖에 없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저승 신화를 아시는군요.”
진광이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내가 저승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떠보려는 듯.
“뭐…… 원래도 유명한 신화니까요.”
굳이 시치미 떼지는 않았다.
저승의 신이라는 것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신화를 아는 것까지 숨길 이유도 없으니까.
“하긴 그렇지요.”
진광은 더 캐묻지 않고 이어서 설명했다.
“저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만…… 어째서인지 이 저승에는 다섯 개의 지옥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일까?
나는 잠시 진광의 표정을 살폈다.
반듯하고 사람 좋은 얼굴은 한 치의 일그러짐도 없이 믿음직한 미소를 띄운 채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던전이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했으니, 그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던전의 지옥은 처음부터 다섯 개였다는 뜻이다.
하긴, 우주질서보존회도 던전에 버그가 발생했다고 했으니까.
버그의 여파로 지옥의 절반이 날아간 것일 수도 있겠지.
“벌써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진광이 다시 말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 도전자든, 제 이웃들이든 빼앗긴 삶을 되찾는 것입니다.”
썩고 부패한 좀비들과 달리, 멀쩡한 모습으로 도산지옥 이곳저곳에 모여 사는 이들을 돌아보며.
“저는 절대 저분들을 좀비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조금 씁쓸한 얼굴을 했다.
“사실, 이 부분은 동맹인 송제와 마찰을 겪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그가 계속 말했다.
“다른 왕들처럼 좀비를 군대로 부리는 게 더 유리하니까요. 송제는 군대를 만들지 않는 제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송제가 망자를 데려가는 것에 불만이 없었군요.”
초강의 좀비를 송제가 모조리 차지하는데도 가만히 내버려 두더라니, 그런 이유였던 것이다.
“네. 하지만 송제가 절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진광이 송제를 변호했다.
“적어도 염라나 초강처럼 이곳을 공격하지는 않으니까요. 최대한 많은 자들을 거두겠다는 제 뜻을 그녀는 이해합니다.”
송제가 진광을 이해하듯, 진광도 송제를 이해한다며.
“그녀는 단지 군대 없이 이길 수 있을까 회의적일 뿐이죠.”
결국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었다.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지 않겠다는 진광은 분명 이상적이었지만,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싸움은 불리해지는 법이다.
진광이 싸움에 적극적이었다면 던전의 전쟁은 이미 끝났을지도 모른다.
좀비를 소모품으로 사용했다면 결국 동등한 힘을 가진 왕들끼리 죽기 살기로 싸웠을 테니까.
“제가 다스리는 한, 적어도 도산지옥은 안전합니다.”
진광이 말했다.
“이곳에는 제가 지켜야 할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곳에서 제 권능은 무적입니다.”
진광의 권능은 지켜야 할 사람들의 수만큼 분신을 만드는 것.
염라와 초강이 망자를 이끌고 쳐들어올 때마다 진광은 자신의 권능으로 이곳을 지켜냈을 것이다.
다만 그의 능력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데만 유리한지라, 반대로 염라와 초강을 적극적으로 치지도 못했을 테고.
그렇게 전쟁은 10년이나 지속되었겠지.
“도산지옥에 들어오시면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더없이 너그럽고 강맹한 왕의 얼굴로.
***
우리는 결국 도산지옥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야, 이걸 그냥 보내주네?”
호구별성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래, 심지어 검수지옥이 어디인지까지 알려주다니. 이건 정말 뜻밖이구나.”
사라도 미심쩍다는 듯 말을 얹었다.
그의 말대로 진광은 도산지옥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우리를 막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받아주겠다고 했을 뿐.
게다가 그는 검수지옥의 위치까지 알려줬다.
-혹시 새로운 왕이 되신다면 부디 도와주십시오.
-도전자를 학살해 좀비로 만드는 초강과 염라에게 힘을 합쳐 대항했으면 합니다.
텅텅 빈 건물들.
지나가는 좀비 하나 없는 길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금이 간 보도블록 위를 하염없이 걸으며 나는 그가 했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지난 10년간, 검수지옥을 노린 자들이 우리밖에 없진 않았을 테죠.”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 수많은 도전자가 있었을 텐데 아직도 검수지옥의 왕은 없다.
그렇다면 이때까지의 도전자들은 모두 검수지옥에서 죽었거나, 검수지옥을 찾아가다가 다른 왕들의 망자가 되어버렸겠지.
“염라나 초강이 검수지옥을 지키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같은 생각을 했는지 사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진광도 그걸 알고 보낸 걸 수도 있고. 어차피 왕은 못 되고 뒤질 거라는 거지.”
호구별성도 덧붙였다.
진광이 반반해서 마음에 든다더니 경계는 늦추지 않는다.
나는 두 신의 말에 동의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 보죠.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결국 우선해야 할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역병의 권능이 있으니, 설령 왕을 만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일단 도망치면 된다.
삼도천을 따라 서쪽으로 쭉 걸어가면 나온다는 마지막 지옥.
목적지는 오관대왕의 좌가 놓인 어느 야구 경기장이다.
“……흠, 그런데.”
흘끗 삼도천을 돌아본 호구별성이 중얼거렸다.
“여기 삼도천은 뭐, 동네 개천보다 못하네.”
왜곡되어 지저분해진 삼도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다.
“돌보는 손길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 이곳도 지장(地藏)의 빈자리가 크구나.”
사라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지장보살이라.
나는 삼도천에서 망자를 돌보던 그분을 떠올렸다.
인간이었던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죄인이 된 어머니를 위해 공덕을 쌓으며 지옥의 모든 이가 구원받을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신.
굶어 죽은 내 동생들도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분은, 저승이 무너진 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저승이 무너져서 몸소 이승으로 향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분의 사명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어딘가에 부디 그분이 건재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오빠.”
그때 바리가 말을 꺼냈다.
“만약…… 진광, 그분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분이 정말로 좋은 분이시라면, 그때는 어떡하실 거예요?”
아마 계속 진광에 대해 생각하던 모양이었다.
“함께 던전을 클리어하실 거예요?”
그 말에 두 신도 나를 돌아봤다.
나는 저승의 데이터를 전부 계승하기 위해 이 던전에 온 것이니까.
만약 진광과 송제와 협력해서 저승 던전을 클리어한다면, 시왕지옥의 권능은 그들과 나누어 가져야 한다.
이건 분명 던전에 올 때는 생각지 못한 부분이다.
“……글쎄.”
나는 천천히 말했다.
사실 나도 계속 생각해왔던 문제였다.
진광이 헌터들을 구해냈을 때.
그가 도산지옥의 권능을 쓰는 것을 봤을 때부터.
때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그냥 기쁜 일이지.”
“……!”
내 말에 두 신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저승은 권선과 징악의 신화잖아. 새로운 선한 신이 탄생한다면 나는 그냥 기뻐할 거야.”
“아니, 진심이냐, 전하?”
호구별성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놈을 저승의 신으로 인정한다고?”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나는 그녀를 돌아보다가.
“……네.”
그냥 조금 웃어 보였다.
“악인과 선인의 가장 큰 차이는, 믿고 함께 나눌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내가 49년간 저승차사로 지내며 품어온 생각이기도 하다.
선은 악에 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러니 선과 선은 서로 싸울 것 없이 힘을 모아야 한다.
선이 악보다 강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니까.
“그가 정말 선인이라면, 저는 기꺼이 믿고 함께 할 겁니다.”
내 말에 호구별성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것 참, 우리 왕이 아주…… 그래, 성품이 어질기는 한데.”
대신 사라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말에 당장 반박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납득하지도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
나는 구태여 두 신을 설득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신으로 살아온 그들로서는 인간을 신으로 인정한다는 게 불편할 것이다.
나야 우리 대왕님께서 직접 부리던 차사니까, 두 신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겠지만.
“……뭐, 아직 진광의 진심을 모르니 이 이상은 의미 없겠죠.”
이만 말을 정리했다.
일단 여기까지 하자는 듯 두 신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굳이 다른 화두를 꺼내는 일 없이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디디며, 나는 삼도천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들을 희생하여 유교도를 열어준 현의옹과 탈의파의 마지막을 되새겼다.
희생.
나눔.
약속.
선인이 선을 이루는 법.
나는 그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나의 길, 징악과 권선의 길이다.
“저기 보세요.”
얼마간의 침묵 끝에 바리가 앞을 가리켰다.
“야구 경기장…… 검수지옥이에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누구 할 것 없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사방이 고요했다.
혹시 초강이나 염라가 지키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왕은커녕 좀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옥으로 변했다는 경기장만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을 뿐.
“가죠.”
경기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선 이 저승의 다섯 번째 왕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