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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1) (22/187)

11장. 다섯 번째 왕(1)

[ 또 한 명의 ‘왕’이 강림했습니다! ]

[ ‘왕’과 ‘왕’의 권능이 망자의 지배권을 겨룹니다! ]

왕의 등장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아, 안 돼!”

“또 왕이라고?!”

헌터들이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그들에게 왕은 이미 공포였다.

어떤 왕을 만나든 그들에게는 좀비가 되는 선택지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헌터들을 불태우려던 불을, 새로 나타난 왕이 없애 버린 것을.

별 뜻 없이 그저 초강의 좀비가 늘어나는 것만을 막으려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분명 새로 나타난 왕이 모두를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천천히 새로 나타난 왕을 살폈다.

반듯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인간의 형상을 거의 잃었던 초강과 달리 그는 멀쩡했다.

그냥 봐도 호감이 갈 만큼 말끔한 청년.

불의 화신처럼 변해 버린 초강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하다.

“진광!”

남자를 본 초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진광’이라.

역시 그 황금빛 신성은 도산지옥의 진광대왕이었다.

그제야 ‘진광’의 무기로 눈길이 갔다.

사람만 한 크기의 대도였다.

시퍼렇게 서 있는 날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진광대왕님의 검은 아니었다.

저승 데이터로 만든 던전이라도 ‘그 검’만은 복제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이 던전의 진광이 그 검을 찾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물러서는 게 좋을 겁니다, 초강.”

대도를 겨누며 진광이 말했다.

그럭저럭 도산지옥의 검술과 비슷한 폼이었다.

완벽하게 복원된 검술은 아니지만, 저 진광만의 해석이 들어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도산지옥의 검을 쓰는 자였다.

던전의 진광을 마주치자 그가 어떻게 저 검을 익혔는지도 궁금해졌다.

‘진광’의 힘을 가지면 도산지옥의 검술도 절로 터득하게 되는 걸까?

“물러서라고?”

초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건방지네!”

그녀가 팔을 휘저은 순간, 화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진광과 헌터들을 덮쳤다.

“……아니요, 건방진 게 아니라.”

검을 든 진광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겁니다.”

파아앙!

황금빛 신성이 번쩍였다.

진광을 중심으로 산개한 빛은 투명한 영체를 여럿 만들어냈다.

검을 든 진광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크기는 그의 절반쯤 되는 분신들이었다.

나는 저 분신이 무엇인지 안다.

그는 정말로 ‘진광대왕의 권능’을 쓰고 있었다.

내게 도산지옥의 검을 가르쳐주셨던 내 스승님의 권능을.

촤르륵!

촤르르륵!

금빛으로 반짝이는 진광의 분신들이 일제히 초강의 불꽃을 베어냈다.

초강을 상대하는 분신의 수는 전부 다섯.

살아남은 헌터와 내 머릿수의 총합이다.

시왕지옥의 첫 번째 지옥인 도산지옥.

그곳은 ‘다른 사람에게 공덕을 베풀며 살았는가’를 심판한다.

진광대왕의 권능은 지켜야 할 자들의 수만큼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는 것.

진광대왕은 그가 공덕을 베풀어야 할 자들이, 그가 지켜야 할 자들이 많을수록 강해진다.

“흥!”

불꽃 너머로 초강이 코웃음을 쳤다.

불꽃을 베는 진광의 분신들이 두렵지도 않은지.

“그냥 저것들부터 태워버리면 그만이야!”

그래, 그녀는 결국 헌터부터 죽여 진광의 분신을 무력화할 셈이다.

지켜야 할 것이 없어지면 진광의 분신도 사라지니까.

화르르륵!

더 강력한 불꽃이 헌터들을 덮쳤다.

한발 늦게 진광이 분신을 움직였지만, 분신에 베인 불꽃은 꺼지지 않고 갈라져서 그대로 헌터들을 노렸다.

“으아악!”

“아악!”

황금빛 신성과 검붉은 신성이 연달아 번쩍였다.

불의 장벽과 금색의 분신.

두 왕의 힘이 충돌하면서 휘말린 헌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

아비규환 속에서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초강은 그새 진광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헌터들은 진광의 권능이 지켜줄 테니, 초강이 방심한 사이 내가 그녀를 친다면…….

파장창!

그러나 내가 초강을 치기에 앞서.

[ 또 한 명의 ‘왕’이 강림했습니다! ]

[ ‘왕’의 권능들이 망자의 지배권을 겨룹니다! ]

팝업창이 뜨면서, 파장창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연푸른 신성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연푸른 신성.

마찬가지로 내게 익숙한 신성이었다.

“송제에에……!”

새로운 왕의 등장에 초강이 비명처럼 외쳤다.

파장창!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연푸른 신성이 번쩍이면서 초강의 몸을 내리쳤다.

“아아악!”

신성에 당한 초강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연푸른 신성은 그녀의 검붉은 신성과 상극이기 때문이다.

한빙지옥의 송제대왕.

죄인을 뼛속까지 얼려버리는 살벌한 신성이, 화탕지옥의 신성으로 타오르는 초강을 덮쳤다.

“이거 고맙군, 초강.”

차분히 가라앉은 여성의 목소리.

“망자를……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 줬으니.”

파장창!

파장창창!

연푸른 신성이 좀비를 뒤덮었다.

시뻘겋게 불타던 좀비들은 삽시간에 시퍼렇게 얼붙었다.

[ 송제의 권능이 초강의 권능을 무력화시킵니다! ]

초강이 부리던 좀비들이 송제의 좀비가 되어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그것들은 뜨거운 불 대신 차가운 한기를 뿌렸다.

“송제…….”

새로 나타난 왕.

목소리에서 예상한 대로 여성이었다.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언뜻 도자기와 같았다.

아마 초강처럼 몸이 변해버렸을 터.

그래도 피부결만 조금 다를 뿐, 나머지 이목구비는 인간과 다름없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셌지만, 초강의 머리칼이 타오르듯 냉기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진광의 겉모습이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면, 송제는 인간일 적의 흔적을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 런, 젠장……! 치사하게, 둘이 덤벼?”

송제에게 당한 초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상대할 왕이 둘이 되자 부담을 느낀 듯했다.

“어디 두고 보자고!”

그러더니 순식간에 화르르륵, 불꽃으로 화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결국 도망친 것이다.

“…….”

나는 상황을 정리하는 두 왕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아마 그들은 ‘동맹’ 관계인 모양이었다.

초강이 사라지자 둘 다 전투를 멈춘 것을 보면.

“역시 도와주시는군요, 송제.”

진광이 먼저 말했다.

그늘 없이 반듯한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이 걸려 있었다.

사심 없어 보이는 그 웃음은 송제를 진심으로 반기는 듯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광의 눈에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

반면 송제는 표정 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진광을 바라보더니.

“이것들은 내가 데려가지.”

얼어붙은 좀비들을 움직였다.

송제의 망자가 된 좀비들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느린 걸음으로 모여들었다.

이곳에 있던 좀비의 전부였다.

파장창!

그러고는 한순간에 연푸른 얼음 조각으로 변하여 흩어졌다.

송제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일종의 역소환 상태가 된 듯했다.

동맹인 것 같은데 좀비는 한쪽이 다 차지해버렸다.

저래도 괜찮은 걸까?

나는 진광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는 것을 보면, 송제가 망자를 독차지하는 것에는 조금도 불만이 없는 것 같은데.

……물론, 겉보기에만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상대가 왕이다 보니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여러분.”

진광이 나와 헌터들을 돌아봤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제가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더니 헌터들의 두려움을 의식한 듯 덧붙였다.

“네, 보셨다시피 저는 왕의 권능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을 좀비로 만들어 부릴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진중하고 선량한 그의 얼굴은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제 목표는, 최대한 많은 도전자들과 함께 이 던전을 제패하는 것입니다.”

“……!”

그 말에 헌터들이 반응했다.

“그, 그럼, 당신이……!”

중년인이 먼저 나섰다.

“저, 정말로 우, 우릴 지켜주시는 겁니까?”

원래도 내게 구해달라며 매달렸던 남자다.

도전자를 건드리지 않는 왕이라니.

이제는 상대를 의심할 여력조차 없다는 듯 그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맹목적인 표정을 지었다.

“네,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진광이 중년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왕의 의무니까요.”

……믿어도 되는 걸까.

나는 말없이 진광을 바라봤다.

도산지옥의 권능은 분명 이타적인 자들만 쓸 수 있는 권능이다.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 그 자체가 힘이 되니까.

다만 신화가 왜곡된 던전에서 얻은 권능이 정말로 그런 힘인지는…….

“흠, 근데 쟤 뭔가 착하게 생겼다.”

그때 불쑥 누군가 끼어들었다.

“뭐, 일단 제법 훤칠하고.”

호구별성이다.

곁에는 도망쳤던 바리와 사라도 함께였다.

어느새 돌아온 그녀가 재밌다는 듯 진광을 주시했다.

나는 그녀를 반겼다.

“무사하셨네요, 누나.”

이렇게 보니 새삼 역병의 권능이 대단했다.

쉽게 잡히지 않으며,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역병의 권능은 확실히 위기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적격이었다.

……인간한테는, 그래서 더 끔찍한 재앙이었겠지만.

“그래, 전하 너도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다. 다쳤을 땐 걱정했거든.”

호구별성이 내 팔뚝을 툭 치며 말했다.

팔을 다쳤던 것을 아는 걸 보니, 어딘가에서 계속 지켜봤던 모양이다.

“암튼 난 저놈 나쁘지 않은데, 반반해서.”

그녀가 다시 진광을 가리켰다.

딱히 그가 싫지 않다는 듯이.

“아~ 물론 우리 전하만큼은 아니다만.”

그러면서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오자마자 농담을 건넬 만큼 여유 있어 보였다.

“그런데 오빠.”

문득 바리가 불렀다.

“아까 그분이랑 저분, 좀 닮지 않았어요?”

조심스러운 어투로 묻는 게, 그새 송제와 진광을 눈여겨본 모양이다.

“…….”

그랬었나?

나는 진광을 돌아봤다.

잠깐 봤던 송제가 워낙 차가운 인상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녀가 연상되지는 않았다.

“그래, 혈연이라면 좀 이해가 되는구나.”

그런데 사라도 바리에게 동의했다.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런 상황에서…… 혈연이라도 없으면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혈연이라.

그래서 송제가 좀비를 전부 가져가도 불만이 없는 걸까?

일리가 있는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송제를 바라보던 진광의 눈에는 짙은 신뢰가 담겨 있었으니까.

어쨌든 하나의 동맹은 확인한 셈이다.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 들어오는 도전자의 안위까지 생각하는 입장을 가진.

“그럼, 여러분.”

진광이 말했다.

“저의 도산지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반듯하게 웃는 얼굴은 다정하고 살가웠다.

***

도산지옥.

시왕지옥 중 첫 번째 지옥인 그곳은 칼로 만들어진 산이다.

도산지옥의 왕, 진광대왕은 그곳에서 망자가 공덕을 베풀며 살아왔는지를 심판한다.

그런데 저승 던전의 도산지옥은 뭐랄까, 생태공원이랄까.

나무며 잔디가 푸릇푸릇한 광경은 지옥의 이름에 맞지 않게 평화로웠다.

중앙에 형성된 호수는 무척이나 맑았고, 곳곳에 놓인 벤치에는 좀비들과 달리 멀끔한 행색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니, 애들까지 있어?”

호구별성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공원에는 대여섯 살짜리 어린 애들도 몇몇 섞여 있었다.

해맑게 뛰노는 아이들은 분명 귀여웠지만, 이곳이 던전인 것을 생각하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이곳에 살던 아이들입니다.”

뒤따르던 진광이 대답했다.

“10년 전, 갑자기 던전이 생성되었을 때 갇히고 말았죠.”

“던전에 갇혔다고요?”

“네, 이곳은 원래 평범한 도시였으니까요.”

대답하며 진광이 조금 얼굴을 굳혔다.

“이곳 도산지옥에 머무는 분들은 본디 저와 함께 살던 이웃들입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나.

나는 진광을 따라 얼굴을 굳혔다.

던전이 생성될 때 주변이 휘말리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하필이면 누군가 클리어할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신화급 던전이었기 때문에 지금껏 갇혀 있는 모양이었다.

“저는 저들을 지키기 위해 왕이 되었습니다.”

진광이 말했다.

“저들에게 빼앗긴 삶을 주기 위해.”

……그런가.

초강이나 송제와 달리 그는 왕의 권능을 갖고도 인간의 외견 그대로였다.

초강의 모습만 보았을 땐 인간이 신의 권능을 받아들이고 행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이라 여겼다.

하지만 송제와 진광의 모습까지 확인한 지금은 무언가 기준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도둑질을 한 이를 심판하는 화탕지옥의 왕, 공덕을 베풀지 않은 이를 심판하는 도산지옥의 왕.

그 둘이 보여준 모습은 대비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저분들을 제 휘하로 받아들였습니다.”

진광이 다시 말했다.

“좀비가 되지 않아도 왕에게 속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절대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지 않습니다.”

나와 헌터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저의 도산지옥에 오시겠습니까?”

불쑥 맞닥뜨리게 된 난감한 제의에 나는 말없이 진광이 내민 손을 내려다봤다.

보여준 바에 따르면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대로 그의 밑으로 들어간다면, 진광의 수하가 된 채로 왕의 권능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는 과연 내게 계속 친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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