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3) (21/187)

10장. 망자의 땅(3)

[ ‘왕’과 조우했습니다! ]

[ 당신은 ‘왕’이 아닙니다! ]

[ ‘왕’의 권능에 굴복하면 왕을 따르는 ‘망자’가 됩니다! ]

팝업창의 내용을 되새겼다.

왕에게 굴복하면 망자가 되지만, 왕이 아닌 상태에서 왕을 쓰러트리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그럼 지금 이 상태로는 왕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다는 뜻일까?

만약 남아있는 왕의 권능이 없을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새삼 뭔가 불합리했다.

나는 이미 염라의 권능을 이어받은 왕인데, 복제된 신화가 만든 조악한 왕들과 맞서야 한다니.

“으잉? 웬일로 벌써 다 죽었지?”

쓰러진 좀비들을 돌아보며 ‘왕’이 말했다.

나는 그제야 ‘왕’을 제대로 마주했다.

먹물을 칠한 듯 까만 얼굴이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만 전구를 켠 것처럼 누런빛이 형형하다.

흰자위와 검은자위 대신 누렇게 불타는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의 그림자’ 같았다.

까맣게 굴곡진 몸이 슬라임처럼 물컹해 보였다.

몸이 그래서 티는 나지 않지만 드레스를 입은 듯 발 부근에는 치맛자락 같은 그림자가 펄럭였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허리께에 닿을 만큼 길다.

그런데 몸과 달리 머리는 불꽃으로 새빨갛게 타올랐다.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 불이다.

[ ‘초강’이구나. ]

사라가 전음으로 말했다.

[ 그러게, 아주 온몸에 화탕지옥이라고 써 있네. ]

호구별성도 말을 보탰다.

확실히 타오르는 불을 의인화한 듯한 모습은 화탕지옥을 연상시켰다.

다만 그냥 봐도 인간의 형체는 아니었다.

왕의 권능은 저렇게 겉모습까지 변하게 만드는 걸까?

기실 초강은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몬스터에 가까웠다.

“이 좀비들 혹시 네가 다 죽인 거야?”

초강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음, 예쁘게 잘생겼네! 몇 살 더 먹었으면 좋겠다만.”

누렇게 빛나는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응?”

그러더니 뒤에 선 사라와 호구별성을 보고는 허리를 바짝 곧추세웠다.

“와우! 이게 뭐야, 미남 미녀가 또 있네!”

신이 났는지 휘파람까지 불면서.

“좋아, 나도 이제 인형처럼 예쁜 좀비가 갖고 싶어!”

깔깔 웃은 초강이 두 손에서 검붉은 빛을 발했다.

나는 그 신성을 알아봤다.

죽음의 권능이었다.

초강의 이름답게 들끓는 화탕지옥의 불길이 담긴.

“자, 모두 내 망자가 되어라!”

화르르륵!

검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피해요!”

공격을 피해 몸을 날렸다.

두 신과 바리도 우선 몸을 피했고, 주변의 다른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아악!”

“살려, 살려 줘!”

“싫어어, 싫어! 또 왕이야!”

이미 왕을 겪어서인지 헌터들은 모두 하얗게 질린 채였다.

“에이씨, 그쪽은 관심도 없는데 왜 못난 것들까지 난리야!”

도망치는 헌터들에게 초강이 검붉은 신성을 휘둘렀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거센 불길이 쓰러진 좀비들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잘리고 부패되어 행동불능이었던 좀비들이, 초강의 불길이 번지자 멀쩡하게 다시 일어섰다.

온몸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두른 채로.

[ (!) 초강의 권능에 망자들이 깨어납니다. ]

팝업창이 떴다.

[ (!) 초강의 권능이 화탕의 불길처럼 번집니다. ]

불타는 좀비들이 기괴하게 울부짖으며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아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불타는 좀비 여럿에 둘러싸인 그의 몸에도 삽시간에 뜨거운 불길이 번졌다.

“으아, 아아아!”

불이 붙은 헌터가 미친 듯이 팔을 휘저었다.

어떻게든 불을 떨쳐 내려는 몸짓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전신이 타들어갔다.

무자비하게 그를 태워버린 불은 더욱 시뻘겋게 타올랐다.

“아아……아아악!”

헌터가 비명을 질렀다.

초강의 망자가 되어버린 그가, 불길이 꺼지지 않는 몸으로 다시 또 헌터들에게 불을 붙였다.

“아아악, 아아아악!”

“으아아악!”

헌터들의 절규가 화탕지옥의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고통스럽게 타오르는 초강의 망자들 사이로 불과 재를 뿌리는 거대한 화마가 몸을 일으켰다.

위기였다.

검을 쥔 채 일행과 등을 맞댔다.

처음의 좀비는 권능으로 쉽게 쓰러트렸지만, 초강의 불을 붙이고 달려드는 좀비들은 대체 어떻게 쓰러트려야 한단 말인가.

“이런, 이거 어떡하지?”

똑같은 생각인지 호구별성이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저 불에 무사할지도 알 수 없구나.”

불이 붙으면 이지를 잃는 게 걱정스러운지 사라도 난감해했다.

“…….”

바리는 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뭔가에 집중하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이 상황에 미래라도 보려는 걸까?

“……누나.”

지켜보다가 호구별성을 불렀다.

“도령과 바리를 데리고 피하세요.”

중요한 것은 역시 저 불에 닿지 않는 것이다.

역신의 권능, ‘쉽게 잡히지 않는 역병’이라면, 적어도 불타는 좀비를 피해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뭐? 그럼 너는?”

호구별성이 놀라서 물었다.

“저는 왕을 치겠습니다.”

검을 겨누며 대답했다.

“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니까요.”

공격 그 자체인 내 ‘죽음의 권능’이 과연 왕에게도 통할지, 한번 시험해볼 셈이다.

“……아니, 그래도.”

내키지 않는지 호구별성이 한마디 더 하려는 때였다.

“네, 그렇게 해요.”

바리가 먼저 말을 보탰다.

“왕은 왕이 상대해야 해요. 그게 맞아요.”

미래에 대한 확신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신뢰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묘한 안심을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으니까.

“하, 이것 참.”

바리의 말에 호구별성도 더 보탤 말이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위험하면 바로 피해라, 전하.”

낮은 목소리로 당부한 그녀가, 그대로 사라와 바리를 끌어안았다.

파아아앙!

암록색의 신성이 번쩍였다.

빛이 번쩍이면서 두 신과 바리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쉽게 잡히지 않는, 동시에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역병처럼.

“오잉, 저게 뭐야?!”

좀비를 부리던 초강이 이쪽을 돌아봤다.

그저 즐거운 듯,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로.

왕은 망자를 지배한다는 던전의 룰이 있는 이상, 애초에 왕이 아니면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이겠지.

“어디 갔어? 벌써 스킬도 쓰는 거야?”

초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라진 두 신을 그냥 인간 헌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던전의 영향으로 무력화된 인간도, 상태창 없이 권능 쓰는 법을 익히면 다시 스킬을 쓸 수 있으니.

……뭐, 그래서 방심해주면 나야 좋지.

“이런, 근데 그럼 너만 버려진 거야?”

초강이 다시 날 바라보며 웃었다.

“일행인 줄 알았는데, 안됐네!”

화르르륵!

검붉은 신성이 번쩍였다.

초강이 쏟아내는 신성을 쫓아 불붙은 좀비 떼가 살아있는 화마처럼 나를 덮쳐왔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

덮쳐오는 좀비를 뚫고 나는 곧바로 초강에게 달려들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내게 깃든 죽음의 권능은 수없이 달려드는 좀비 떼를 뚫고 나를 곧장 초강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뭐야?”

눈이 마주친 초강이 누런 눈을 끔뻑거렸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눈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느리게 움직였다.

왕이 아닌 헌터가 정면에서 덤벼드는 것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촤아아아악!

온 힘을 담은 일격에 초강의 가슴팍이 깊게 파이고.

슬라임 같던 초강의 몸에서 검붉은 화탕지옥의 신성이 피처럼 터졌다.

“뭐어……어?!”

공격이 먹힌 초강이 크게 몸을 떨었다.

“죽……음의 권능?”

망자의 왕인 만큼, 같은 권능을 알아본 거다.

“……어떻게?”

그러다가 뒤늦게 찢어진 가슴팍을 쥐어짜며 몸을 물렸다.

한발 늦게 분노하며 초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게 감히……!”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검붉은 신성이 번쩍였다.

주변의 좀비 떼가 살아 움직이는 화마처럼 나를 덮쳤다.

피할 새도 없이 사방에서 온몸이 물어뜯겼다.

“……큿!”

살갗을 태우는 고통이 삽시간에 전신으로 번졌다.

이대로 초강의 망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꺼지지 않는 화탕지옥의 불길이 내 몸에 옮겨붙는 게 느껴졌다.

“아윽.”

잇새를 물며 작게 신음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홧홧하게 신경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초강의 불길에 잡아먹힐 수는 없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고통을 억누르며, 나는 좀비들에게 다시 한번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휘둘렀다.

직후.

화아아아악!

마치 소화전을 뿌린 것처럼, 내 몸에 붙었던 불과 망자들이 메케한 연기를 폭발시키며 꺼져버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고통은 물론이고 화상까지 깨끗하게 사라졌다.

망자를 종으로 만드는 초강의 불길이 더는 내 몸을 태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래, 내게는…… 망자로 부리는 왕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뭐야! 왜 갑자기 꺼져!”

당황한 것은 되레 초강이었다.

왕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 게 믿기지 않는지 그녀가 다시 엉성하게 팔을 내둘렀다.

어떻게든 내게 불을 붙이려는 모양새였으나, 드러난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다시 초강에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검수엽의 시퍼런 칼날이 그녀의 가슴에 한 번 더 깊게 자상을 남겼다.

파헤쳐진 그녀의 몸에서 검붉은 신성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뭐어어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고통을 느끼는 듯 누런 눈에서 검은 액체가 눈물처럼 흘러나왔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그녀가 다시 검붉은 신성을 휘둘렀다.

“네까짓 게, 감히……!”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불타는 좀비들이 장벽처럼 나를 가로막았다.

아랑곳 않고 그녀를 향해 곧장 내달렸다.

불타는 좀비의 벽은 검수엽 앞에서 너무도 쉽게 허물어졌고, 나는 한 번 더 그녀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런데 검을 박아 넣는 순간, 파헤쳐진 초강의 가슴팍에서 검붉게 빛나는 보석이 눈에 띄었다.

“……핵?”

던전의 보스에 박혀있는 핵.

공간의 법칙을 지배하는 코어가 초강의 몸속에 박혀 있었다.

“이게 혹시 ‘왕의 권능’인가?”

그것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화르르륵!

지옥불처럼 뜨거운 불길이 내 팔을 집어삼키려는 듯 난폭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초강의 가슴팍에서 피어오른 가장 강렬한 불꽃이 순수한 열기만을 품은 채 그녀의 가슴에 박힌 검을 타고 내 팔에 번진 것이다.

“……크윽!”

생살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망자에게서 옮겨붙었던 불과는 달랐다.

초강의 핵에서 솟구친 불은 훨씬 뜨겁고 맹렬했다.

신경 하나하나를 태우는 듯한 지독한 격통에 나는 순간 더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초강이 떨쳐낸 내 검도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아!”

초강에서 떨어져 나오자, 불은 금세 꺼졌다.

그러나 내 두 팔은 벌써 타서 새까맣게 뼈가 드러나 있었다.

“젠,장.”

아프다.

고통스럽다.

머리가 하얗게 비는 와중에 다시 검을 쥐었다.

“……하아아.”

거칠게 숨을 토했다.

공격 자세를 잡았으나 심각하게 손상된 팔로는 쥐는 게 고작이었다.

적을 베기는커녕 팔을 움직일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위기였다.

이대로 초강이 재차 공격해 온다면…….

“……너, 너, 뭐야.”

한데 치명타를 입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왕도, 아닌 게, 왜.”

상반신이 너덜너덜해진 초강이 덜덜 몸을 떨었다.

“어떻게, 이, 렇게…… 나를!”

그림자처럼 뭉개진 얼굴에도 표정을 띄울 수 있다면, 분명 경악한 얼굴일 것이다.

“나는 왕인데, 너는, 대체 뭐길래……!”

“이걸 받게!”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상급 포션이네!”

중년인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가 내게 뭔가를 던졌다.

“제, 제발!”

그의 말대로 포션이었다.

강력한 회복력을 가진 초고가의 포션.

어떤 치명상이든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는, 수억을 호가하는 아이템을 넘긴 것이다.

“자네가 우리 희망이네!”

“……!”

그 말에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깨달았다.

이 포션은 서로에 대한 은혜였다.

그들이 내게서 희망을 봤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포션을 취했다.

파아아앙!

반짝이는 유리병이 새하얀 빛으로 산개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두 팔을 태우던 고통이 빛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좋아, 끝내자.”

멀끔해진 두 팔로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초강에게 내 공격이 먹힌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대로 왕의 핵을 노릴 생각이었다.

“이, 이 성가신 놈들이……!”

그때 분개한 초강이 불길을 내뻗었다.

내가 아닌, 내 뒤에 선 헌터들을 향해서.

화르륵!

화르르륵!

좀비를 태우던 불이 마치 용암의 파도처럼 헌터들을 덮친다.

“아아악!”

“으아아악!”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불길에 헌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이었다.

이제 남은 헌터는 고작 중년인을 포함해 고작 네댓 명밖에 되지 않았다.

“……안 돼!”

불길이 남은 이들마저 삼키려는 순간 나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저렇게 되면 내가 초강을 쓰러트린다 한들 저들은……!

파아아앙!

다급히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순간.

위협적으로 일렁이는 화염 사이에서 황금빛의 눈부신 신성이 번쩍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거대한.

……하지만 내게는 어쩔 수 없이 익숙할 수밖에 없는 저승의 신성이.

[ 또 한 명의 ‘왕’이 강림했습니다! ]

동시에 팝업창이 떴다.

[ ‘왕’과 ‘왕’의 권능이 망자의 지배권을 겨룹니다! ]

화탕지옥의 초강대왕에 이어 또 다른 왕의 출현을 알리는.

10장. 망자의 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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