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망자의 땅(2)
[ 망자의 땅 ]
- 내용 : 망자의 왕으로 군림하십시오.
- 클리어 조건 : 모든 망자에 대한 지배.
‘모든 망자에 대한 지배’라.
나는 퀘스트의 세부 조건을 확인했다.
- (!) ‘지옥’에서 왕의 권능을 획득해야만 망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 (!) 왕은 다른 왕에게서 왕의 권능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 (!) 왕의 권능을 빼앗길 시 망자의 지배권도 빼앗깁니다.
- (!) 왕은 다른 왕과 동맹을 맺을 수 있습니다.
- (!) 왕은 동맹의 왕에게 망자의 지배권을 넘겨줄 수 있습니다.
- (!) 왕의 승리와 별개로 동맹의 승리를 인정합니다.
이것저것 말이 길지만, 결국 왕의 자격을 획득해서 동맹을 제외한 모든 왕을 쓰러트리라는 것이었다.
“지옥이란 건 시왕지옥이 바탕이 된 던전이겠지.”
문제는 이미 10년간 도전자를 받던 던전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클리어되지 않은 시왕지옥이 남아 있느냐가 관건이었고.
더불어 동맹이 가능한 만큼 왕의 자격을 획득한 자들이 벌써 여러 이해관계로 얽혀 있을 터였다.
……결국, 선발대가 이미 판을 짰을 테니 후발 주자는 불리한 상황일 텐데.
“전하, 저것 봐라!”
호구별성이 수십 미터쯤 앞을 가리켰다.
“좀비다!”
드러난 상황은 말 그대로 ‘좀비 아포칼립스’였다.
무너진 건물들, 갈라진 아스팔트, 굴러다니는 쓰레기.
폐허가 된 도시에 사지가 누더기처럼 변한 좀비들이 가득하다.
거리가 제법 돼서 자세히는 살필 수 없다.
다만 와중에도 몇몇 눈에 익은 병장기가 보였다.
같이 입장한 헌터들이 벌써 좀비가 된 모양이다.
“망자의 땅이라더니 그냥 좀비 소굴로 만들었어!”
호구별성이 어처구니없어했다.
“이거, 우리도 물리면 좀비 되는 거야?”
“……글쎄요, 어쨌든 여기서 죽으면 모두 좀비가 되나 보네요.”
살아남아서 왕이 되느냐, 아니면 죽어서 왕이 부리는 좀비가 되느냐.
도전자의 운명은 우선 그렇게 갈리는 거겠지.
혹 지금 저들이 누군가에게 지배된 상태라면, 여기 이미 ‘왕’이 있다는 뜻일 테고.
“일단 좀 더 멀어지는 게 좋겠구나.”
지켜보던 사라가 말했다.
“저것들이 없는 곳에서 남아 있는 지옥을 찾아봐야겠어.”
그도 대충 이곳의 룰을 파악한 듯했다.
“잠깐만요, 오빠!”
그때 바리가 내 팔뚝을 잡았다.
“공간이 이상해요!”
그 순간 느닷없이 거센 돌풍이 우리를 덮쳤다.
마치 던전으로 들어가는 포털처럼 동시에 주변이 일그러진다.
“……!”
찰나에 벌어진 일.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멀찍이 보였던 좀비들 사이에 서 있었다.
예고 없이 이동된 것이다.
차 한 대 없는 7차선의 도로 위였는데, 부러진 신호등만 좀비들 사이를 굴러다닐 뿐 사방은 뻥 뚫려 있다.
그나마 숨을 만한 건물은 멀지 않았지만, 그곳에 가려면 주위의 좀비부터 뚫고 가야 했다.
“이런, 이게 다 뭐야!”
주위를 둘러싼 좀비 떼에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치사하게, 무조건 맞서라 이거야?”
또한 곧바로 암녹색의 신성을 발했다.
역병의 기운이 담긴 신성이었다.
그녀를 따라 나도 검을 빼 들었다.
“……좀비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헌터였다면 이대로 당했겠군요.”
강을 건너자마자 이동된다니.
같이 들어온 헌터들이 왜 벌써 좀비가 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화급 던전에서 인간 헌터는 보통 힘을 잃는다.
정확히는 시스템의 도움 없이 권능을 쓰지 못해 무력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좀비 떼를 만나면, 권능 쓰는 법을 익힐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는 반대로 신인 우리는 바깥보다 권능을 부리는 게 쉽다.
촤아아악!
망설임 없이 좀비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내 권능,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되새기며 검을 휘두르자 한 번에 서넛씩 목이 떨어졌다.
그런데 목을 벤다고 끝이 아니었다.
“……이런!”
목이 베인 좀비는 아랑곳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눈과 귀가 없어도 그들의 공격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꼴을 보며 인상을 썼다.
“목보다는 허리를 베는 게 낫겠어.”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곧바로 몸을 숙여 허리를 벴다.
반으로 갈라진 좀비들이 분리된 사지를 꿈틀거렸다.
잘려나간 좀비들은 실타래처럼 엉키며 제 다리인지 모르고 달라붙거나, 제 몸통인지 모르고 발로 찼다.
파아아앙!
얽혀버린 좀비들 위로 암녹색의 신성이 번쩍였다.
부패는 눈 깜짝할 새였다.
수틀리면 마을 하나도 순식간에 몰살시켰다던 역신의 권능이었다.
역병에 닿은 좀비가 삽시간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문드러졌다.
제가 썩는지도 모르고 삭아버린 몸에는 끈적거리는 역마의 신성이 종기처럼 돋아 있었다.
“왜?”
눈이 마주친 호구별성이 웃는다.
“마마 처음 봐?”
그녀의 눈은 어느새 흰자위가 검게 물든 역안이 되어 있었다.
눈구멍이 밤하늘처럼 새까맣게 일렁이는 와중 녹색의 눈동자만 도깨비불처럼 형형하게 타올랐다.
“……아뇨, 그냥 누나 눈이 멋있어서요.”
조금 섬뜩해진 마음을 숨기며 말했더니, 마마께서는 새까만 눈을 휘며 웃었다.
“그래? 나도 오랜만에 권능 쓰니까 온몸이 다 시원한데?”
……뭐, 기분 좋으면 됐지.
새삼 마마가 어떤 존재였는지 떠올라 나는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유사 이래 십억 명을 죽였다는 천연두의 의인화였다.
아마 저것도 전성기의 힘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강력하지만.
본래의 힘을 되찾는다면 이런 작은 도시쯤은 한순간에 쓸어버리겠지.
“별로 어렵지는 않구나.”
호구별성이 녹여버린 좀비를 돌아보며 사라가 말했다.
“오히려 신의 자리를 되찾은 기분마저 들어.”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했다.
우주질서보존회가 죽으라고 등을 떠민 줄 알았는데, 막상 던전에 와보니 누구보다 유리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은가.
“자, 자네들.”
쓰러트린 좀비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폐허가 된 건물 사이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온다.
전원이 피투성이에 꾀죄죄한 몰골이다.
그런 와중에도 가운데 선 자의 얼굴은 낯설지 않다.
“자네들, 그렇게 강했던…… 건가?”
제법 다부진 몸에 굵직한 인상은, 분명 던전 입구에서 말을 걸었던 그 중년인이다.
그런데 그때 봤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어, 잠깐만요.”
생각지 못한 변화에 놀라서 말을 흐렸다.
“머리가…… 왜 그렇게 세셨어요?”
마흔이 갓 넘은 듯 보였던 그는 잠깐 못 본 사이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아니, 머리뿐 아니라 얼굴에도 전에 없던 주름이 깊게 패었다.
우리가 삼도천을 건너는 잠깐 사이에 10년은 훌쩍 지난 것처럼.
“……돌풍을.”
중년인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돌풍을 만났더니, 이렇게 됐네. 다들 순식간에 늙어버렸어.”
돌풍?
우리를 이동시킨 그 돌풍?
그 말에 우리는 순간 서로를 돌아봤다.
늙어 버린 중년인과 달리 두 신과 바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쩌면……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가짜 몸에 빙의한 상태라 그런 걸까.
신은 인간과 달리 늙지 않으니까.
혼의 형태를 따른다는 가짜 몸도, 그래서 인간과 달리 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바리의 모습도 딱히 변한 것은 없다.
아마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바리공주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그런데 사흘 동안 무얼 했나?”
중년인이 물었다.
“자네들이 보이지 않길래, 먼저 당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사흘?
연이어 예상치 못한 말이다.
우리가 중류를 건너느라 그들보다 다소 늦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흘씩이나 걸린 것은 아니었는데.
[ 정말로 시간의 흐름이 다르구나. ]
사라가 전음으로 말했다.
[ 저 애가 말한 대로, 이곳은 바깥과 달라. ]
그런가.
미래가 잘 읽히지 않는다더니, 정말로 무언가 뒤틀려 있는 걸까.
하긴, 우주질서보존회도 원인불명의 ‘버그’가 무한히 발생했다고 했으니까.
지난 10년간 누적된 버그가 던전의 시간마저 왜곡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상관없네, 자네들이 무엇을 했건.”
중년인이 다시 말했다.
“그냥…… 그냥 제발 도와주게!”
그러더니 불쑥 내 팔을 잡았다.
“제발, 제발 좀 도와주게!”
순식간에 절박해진 얼굴로.
“우리가 오만했어! 제발, 제발 여기서 나갈 수만 있게 도와주게! 크흑!”
그사이 벌써 던전의 클리어는 포기했는지.
그의 말끝에는 어느새 울음까지 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원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신이란 걸 모른 채 ‘젊은이들’이라며 얕잡아 보긴 했지만, 그래도 나와 바리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걱정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렇게 변한 걸 보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에게 물었다.
그의 일행은 분명 도전자들 중에서도 가장 많았다.
그는 50명이 넘는 헌터들을 이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주변에 남은 건 겨우 열 명 남짓.
그마저도 다들 흰머리가 희끗해 앙상한 몰골로,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년인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나를 보다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자마자 좀비에 당했지.”
세상을 다 산 노인처럼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무슨 영문인지 스킬도 통하지 않더라고. 그저 가진 무기로 어떻게든 놈들을 쳐내는 게 다였어.”
역시 권능을 쓸 수 없어서 곧바로 당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통하는 게 둔기로 뭉개고 불을 지르는 거였는데, 그렇게 어떻게든 놈들을 떨쳐 내서 숨었더니 벌써 우리 중 반이 사라진 상태였지.”
어느새 그는 덜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던전에 함께 도전할 정도면 오래된 동료들이었을 테니까.
그런 그들을 순식간에 잃었다.
리더였던 그는 자기 탓이라는 죄책감도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그가 숨을 삼켰다.
“그런데…… 그것이 왔네.”
덜덜 떨리는 몸에 어느새 땀까지 흐른다.
“염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중년인이 보이는 두려움과는 다른 의미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몸이 반응했다.
“그것이 와서…… 나머지도 데려갔어.”
말을 잇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제, 제발, 도와주게. 자네, 자네는 강하잖나.”
그러더니 다시 내 팔뚝을 움켜쥐었다.
“이대로는, 그, 그것이 다시 와서 우리를 다 잡아갈 걸세. 제발, 제발, 도와주게, 나가게…… 여기서 나가게 해주게!”
염라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던전의 클리어는 포기한 채 살아서 밖으로 나가기만을 바라게 된 듯했다.
[ 염라의 권능은 누군가 가져간 모양이구나. ]
[ 그러게, 왕의 자격을 갖춰야 한다더니. 발설지옥은 이미 누가 쓸어 갔나 봐. ]
사라의 전음에 호구별성도 말을 보탰다.
[ 인간이 ‘염라’를 칭하다니, 재밌네. ]
재밌다는 말과 달리 몹시 언짢다는 목소리로.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내 뜻을 전했다.
[ 어차피 왕의 권능은 다시 뺏을 수 있으니까, 상관없죠. ]
그래, 누군가 이미 염라의 권능을 가져갔다 한들 내가 다시 되찾으면 된다.
어차피 그것은 이제 내 것이니까.
“자네, 자네라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겠지?”
중년인이 다시 말했다.
“저, 저것들을 그렇게 쉽게 무너뜨리는 건 왕밖에 없었네.”
정말로 우리가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는 계속 절박하게 매달렸다.
“와, 왕이 돼서 우리를, 그렇게, 하지도 않을 테지?!”
그런데 그 순간.
콰아아아앙!
뭔가 박살 나는 굉음과 함께.
“아하하핫!”
날카롭게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간만에 사냥감이 잔뜩이네!”
정체불명의 여자 목소리.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한발 앞서 팝업창이 떴다.
[ ‘왕’과 조우했습니다! ]
왕?
저 여자가 왕이라고?
갑작스러운 왕의 등장에 다시 검을 쥐었다.
[ 당신은 ‘왕’이 아닙니다! ]
[ ‘왕’의 권능에 굴복하면 왕을 따르는 ‘망자’가 됩니다! ]
연달아 팝업창이 떴다.
던전의 진짜 승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