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세 가지 길(3)
찰나지만 분명 보였다.
광인이 된 현의옹과 탈의파의 눈에 내가 기억하는 두 신의 현기가 비친 것이.
그러나.
퍼어어억!
현의옹과 탈의파의 공격이 사납게 몰아쳤다.
아주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그 눈빛에 긴장이 풀려버린 걸까.
상태 이상으로 움직임이 무거워진 것에 이어 이제는 감각마저 둔해진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일이 정말로 버거워지고 있었다.
“전하!”
“오빠!”
그러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도 없이 유교도에 달려온 나를 걱정해서 찾아준 이들의 목소리였다.
파아아아앙!
동시에 새하얀 신성이 나를 감쌌다.
“대왕!”
무너질 것 같던 몸에 울긋불긋한 꽃잎이 피어났다.
꽃처럼 만개한 생명의 권능이었다.
“정신을 잃지 마라!”
그가 말했다.
“내 신성으로 엄호하겠다!”
순식간에 고통이 사라졌다.
내장까지 상했던 몸도 어느새 말끔해졌다.
부활의 신에 걸맞은 치유력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정도의 신성을 쓸 수 있는 건가?
모든 힘이 사라진다는 신화급 던전인데?
“업의 무게가 짓누르리라!”
“업이 드러나리라!”
그때 다시 두 신이 외쳤다.
[ (!) 현의옹의 권능이 당신을 짓누릅니다. ]
[ (!) 상태 이상 : 육신의 속도가 느려집니다. ]
[ (!) 탈의파의 권능이 당신을 파헤칩니다. ]
[ (!) 상태 이상 : 육신의 방어력이 떨어집니다. ]
다시 한번 상태 이상이 중첩되려는 찰나.
“전하!”
이번에는 호구별성이 끼어들었다.
“업의 무게가 짓누르리라!”
“업이 드러나리라!”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두 신이 놓치지 않고 상태 이상을 걸어오는데도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피했다.
속도가 느려졌던 나와 달리 발 빠른 역신의 움직임 그대로였다.
“왜 계속 맞고 있어?”
나를 내려놓은 그녀가 말했다.
“도망이라도 치든가, 대체 왜……!”
그런데 그 순간.
호구별성이 별안간 눈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쓰러진 그녀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몸을 버둥거렸다.
마치 뒤늦게 상태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 것처럼.
“아무래도 권능의 영향인 것 같다.”
지켜보던 사라가 말했다.
“원래라면 별성 너도 대왕처럼 저들에게서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저들의 힘이 몸을 느려지게 하니까.”
그는 이미 탈의파와 현의옹의 능력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런데 너의 권능은 역병,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인지라. 그들의 힘에 당했어도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지. 권능으로 도망친 후에야 네 몸에 깃든 그들의 힘이 발휘된 거고.”
……그러니까, 던전에서도 신의 권능이 통한다는 뜻인가?
나는 사라의 설명에 다시 물었다.
“그럼 도령님이 꽃을 피운 것도…….”
“그래, 이곳에 들어오니 오히려 권능을 쓰기 편해졌더구나.”
사라가 말했다.
“대왕, 이곳에서는 신의 권능이 바깥보다 자유롭다.”
그 말에 문득 신화급 던전의 특징을 떠올렸다.
능력치가 어떻든 모두 똑같은 조건에서 도전한다는 신화급 던전.
모든 헌터들의 조건이 똑같아 보이는 것은, 결국 모두가 시스템의 서포트 없이 권능을 끌어내야 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본래 신성이 없던 인간은 시스템 없이 권능을 끌어내는 게 쉽지 않지만.
신이라면 오히려 시스템의 제약이 없어 권능을 발휘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던전이 신화가 실체화된 공간이라면, 신은 본래 신화 그 자체니까.
“……!”
깨달은 순간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제약 없이 권능을 쓸 수 있다면 저들을 물리칠 이는 역시 나밖에 없다.
호구별성의 권능 ‘역병’이 쉽게 잡히지 않는 ‘회피’라면, 염라의 권능인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니까.
“……도령님.”
몸을 일으켰다.
“저들을 베겠습니다.”
중첩된 상태 이상 때문에 여전히 몸이 무겁다.
“제가 혹시 당한다면 엄호해주세요.”
그러나 저들을 ‘공격’하겠다고, 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되겠다고 마음먹자 놀랍게도 둔해진 몸에 힘이 감돌았다.
잊고 있었던 죽음의 신으로서의 권능이.
촤아아악!
권능이 돌아오자 베는 것도 순간이었다.
죽음을 막을 수 없듯, 그들은 내 죽음의 권능을 막지 못했다.
“업의 무게가 짓누르리라!”
“업이 드러나리라!”
칼에 베인 현의옹과 탈의파가 비명처럼 내질렀다.
그들의 왜곡된 권능이 다시 내 몸을 짓눌렀을 때.
문득 상태 이상과는 또 다른 고통이 느껴졌다.
잃어버린 신화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
돌아왔으면 좋겠다.
잃어버린 나의 신화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영웅담, 검수발아(劍樹發芽).
차사 시절부터 수백 번, 수천 번 그려 왔던 징악의 신화.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칼끝에서 피어난 검수지옥의 새하얀 신성이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 (!) 당신의 카르마에 맞춰 칼날나무의 잎새가 피어납니다. ]
그런데 팝업창이 뜬 순간.
현의옹과 탈의파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사……님?”
고장 난 인형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던 그들의 입에서, 뜻밖에도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제연……차사님?”
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를 바라보는 두 신의 눈에 어느새 익숙한 현기가 감돌고 있었다.
“……차……사님?”
파아아악!
동시에 그들의 몸에서 피가 터졌다.
“……설마.”
멍하니 그들에게 물었다.
“설마, 기억이 있으신 겁니까?”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정말로…… 두 분, 이십니까?”
그냥 왜곡되어 만들어진 데이터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은 내가 아는 신화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내가 기억하는 신이라면……!
“크으으윽!”
그때 현의옹과 탈의파가 머리를 감싸 쥐면서 꿈틀거렸다.
“크으……업이……나리라!”
“으으윽……게가, 리라!”
두 신이 다시 비명처럼 내지르고.
쿠우웅!
그들의 권능이 다시금 내 몸을 울린다.
“아니, 아니야……이, 차사…….”
“……제연……사님.”
그들의 외침에도 더는 상태 이상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자꾸만 중얼거렸다.
“이제연……차사님.”
……과거의 어느 순간처럼, 차사였던 나의 이름을.
“저한테 빙의하세요!”
그때였다.
“왜곡된 공간이 두 분의 혼을 흐리고 있어요!”
뒤에 섰던 바리가 끼어들어 두 신을 향해 외쳤다.
“저는 신의 뜻을 전하는 무당입니다.”
두려움 없이 차분한 얼굴로 그녀가 팔을 벌린다.
“신께서 우주가 부여한 권능을 그대로 쓰실 수 있다면, 저 역시 우주가 부여한 제 역할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어요!”
저대로 둬도 되는 걸까?
이곳에서 신이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증명되었지만, 인간인 바리가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어 말리려 했으나.
“……!”
그럴 새도 없이 현의옹과 탈의파가 바리에게로 스며들었다.
“……흡.”
두 신을 받아들인 바리가 숨을 삼켰다.
“으윽!”
그러더니 피를 뱉어냈다.
일전에 나를 받아들이고 다쳤던 것처럼.
“바리……!”
놀라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신의 혼은 인간의 몸에 버겁다.
아무리 뛰어난 무당이라도 역시 직접 신을 받는 것은 무리였다.
바리가 다치지 않게 빨리 두 신을…….
“……이제연 차사님.”
그때 바리가 말했다.
“……삼도천을……건너시려는 겁니까.”
아니, 바리에 깃든 두 신이 내게 물었다.
“……아.”
정말로…… 두 신이다.
소멸했던 현의옹과 탈의파가 바리의 몸을 빌려 돌아왔다.
앳된 소녀의 눈에는 어느새 수천 년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 없군요.”
그들이 말했다.
“하류는 악인의 길입니다. 그들은 제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지요.”
바리 혼자만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삼도천의 두 신이 함께 말하고 있었다.
“상류는 범인의 길입니다. 그들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은 주저하지만 때때로 강한 악에 굴복해 악법을 따릅니다.”
차사에게 굴복해 통행료를 내던 헌터들이 떠올랐다.
생사람을 던져 하류를 건넌 도사들이 악인이라면, 차마 그럴 수는 없어 통행료를 낸 헌터들은 그저 범인이다.
왜곡되었어도 이 신화는 분명 삼도천의 신화인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왕이시여.”
그들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죄의 무게를 재던 삼도천의 신들이 이제 나를 시험했다.
“……중류는.”
나는 대답했다.
“중류는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답이었다.
나는 저승의 왕, 악인도 범인도 돼서는 안 될 징악과 권선의 신이니까.
“어떻게 해야, 사라져버린 유교도를 다시 건널 수 있습니까?”
“……후후후.”
내 물음에 두 신이 낮게 웃었다.
“중류는 쉽게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정녕 그곳으로 가시기를 원하십니까?”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예, 저는 중류로 가고 싶습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설령 이제 아무도 그곳을 찾지 않을지라도…… 저는 반드시, 저만은 반드시 선인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내 대답에 현의옹과 탈의파가 다시 웃고는.
“그렇습니까, 대왕이시여.”
어린 소녀의 얼굴에 깊은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쉽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이렇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바리의 몸이 환하게 빛나더니 두 신이 다시 영체로 돌아왔다.
“아!”
빙의가 풀린 순간 바리가 작게 휘청이는 몸으로 눈을 크게 떴다.
“아, 안 돼요……!”
뭔가를 직감한 듯 그녀가 두 신에게 팔을 뻗었다.
“안 돼요, 그렇게 하시면 두 분은……!”
그러나 바리의 만류에도 두 신은 그대로 강가에 서서 말했다.
“대왕이시여, 선인들의 길을 이루는 것은.”
그러고는 희미하게 남은 유교도의 흔적에 자신들의 권능을 불어넣었다.
“희생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두 신이 눈부신 신성을 뿜어낸 순간, 사라졌던 칠보의 다리가 새까만 강을 찬란하게 가로질렀다.
“선을 이루는 것은, 먼저 나선 이의 희생입니다.”
“잠깐……!”
그제야 두 신이 뭘 하려는지 깨달아 나는 황급히 달려갔다.
“잠깐, 잠깐,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성으로 다리를 만들 셈이다.
정말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저는 절대 바라지 않습니다……!”
“후후후.”
그러나 두 신은 웃을 뿐이었다.
“왕이시여,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느새 내가 기억하는 다정한 신의 얼굴로.
“작은 불편을 감수하는 작은 희생이든, 소중한 것마저 포기하는 큰 희생이든, 선을 이루는 것은 앞선 이의 희생입니다.”
그들이 말한다.
“그 희생이 결국 서로를 위해 그렇게 하리라는 믿음이 되고 약속이 된 순간, 비로소 선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달려가서 그들을 붙잡았다.
“하지만, 저는 당신들의 죽음을 원하지 않……!”
그러나 이미 신성이 다한 몸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안 돼!”
손끝에 닿은 자리가 모래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후후, 어찌 저승의 왕께서 죽음을 끝이라 말씀하시는지.”
어느새 목소리마저 희미해진 채로, 다만 그들은 계속해서 웃었다.
“저승의 왕이시여, 세상의 모든 평탄한 길은 앞선 이의 희생으로 이루어질지니.”
“그러니 당신은 부디, 세상의 다리가 된 그들에게 다시 한번 미래를 주십시오.”
선인들의 다리 앞에서 두 신이 끝까지 당부했다.
“그것이, 세상 저편의 신화일지니.”
그 순간 희생으로 이루어진 다리가 눈부시게 산개했다.
[ (!) 삼도천의 유교도를 복원했습니다. ]
팝업창이 떴다.
[ (!) 당신의 카르마에 유교도의 신화가 새겨집니다. ]
[ (!) 신화가 지배하는 공간에 당신의 카르마가 섞여 듭니다. (카르마 : ???) ]
[ (!) 카르마 포인트를 ‘10,000’ 획득합니다. ]
잃어버렸던 권선의 신화를 풀어내기엔 무척이나 차갑고 각진 문자열.
[ 당신의 ‘풍문(L)’이 ‘무용담(L)’으로 변화합니다! ]
여전히 아무런 효과는 없는, 그러나 혼자서는 얻지 못했을 나의 무용담.
[ ‘새로운 왕이 탄생했으니.’ ]
- 분류 : 무용담(L)
- 권능 : 권선(勸善), 사후세계(死後世界)
- 내용 : 세상의 저편에 나타난 새로운 왕이 가엾은 이에게 다음을, 그리하여 영원한 권선의 길을 약속했다.
- 효과 : (!) 해당 단계에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 영웅담까지 필요 카르마 포인트 : (0/100,000)
그리하여 희생은 언제나처럼, 그 희생을 잊지 않은 자에게 변화를 남길지니.
***
저승 던전 입구.
“……헉?!”
우주질서보존회 행정공무원 3832호는 당황했다.
그는 도전자를 입장시키고 그에 따른 변이를 감시하는 행정공무원이었다.
던전의 밑바탕이 된 신화의 변이도.
지난 세월 누적된 오류로 저승 던전의 변이도는 무려 40퍼센트가 넘어선 상태였다.
변이는 변이를 부르기 때문에, 이제는 도전자가 입장하는 것만으로도 던전이 1%씩 왜곡될 지경이다.
그런데 방금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 (!) ‘저승’ 던전의 클리어 조건이 추가됩니다. ]
- (!) 해당 던전의 등급은 ‘신화’입니다.
- (!) 해당 던전의 신화는 변이되었습니다. (변이도 : 42.595%)
- 클리어 조건 : ??? (+???)
“……왜 변이도가 내려갔지?”
원래 변이도가 올라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냥 둬도 주변의 카르마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변이도가 내려갔다.
“변이도가 내려갈 수도 있나?”
지난 10년간 변이도가 내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행정공무원 3832호는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클리어 조건이 추가됐다고? 변이도가 내려갔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10년간 던전을 관리했지만 클리어 조건이 추가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변이도까지 0.2% 내려갔다니.
“근데 내 일은 변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갔을 때 보고하는 거잖아.”
3832호는 침착하게 상황을 되짚었다.
“내려갔을 때 보고하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건 애초에 내려갈 일이 없기 때문일 거란 말이지.”
분명 전례 없는 일이긴 한데, 전례가 없다 보니 해야 할 의무도 없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고하는 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
개인의 판단이냐, 집단의 명령이냐.
지구식 관료제 패치가 완료된 우주의 질서는 잠시 고민했다.
“모르겠다! 난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한다!”
그러다가 역시 절차로 책임을 회피하기로 결정했다.
“뭔 일 터지면 안보팀이 처리하겠지!”
그는 행정직이다.
어차피 버그는 그의 관할이 아니다.
9장. 세 가지 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