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세 가지 길(2)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던전의 권능이 소멸한 영혼마저 복구하는 걸까.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혼란한 와중에 차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발설지옥 소속 단물차사 구복룡입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의 혼을 건지죠. 여러분께 삼도천을 안내해 드리려고 왔답니다.”
발설지옥 소속 단물차사 구복룡.
형의 모습을 한 그는 형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목소리까지 내가 기억하는 복룡 형과 똑같았다.
그는 나의 형제가 맞았다.
“삼도천의 중류에는 인간을 토막 내서 나무에 거는 노괴들이, 하류에는 인간의 살점을 뜯어 먹는 아귀고기들이 살지요.”
분명 그러할 터인데 무언가 달랐다.
“근데 아마 지금 당신네들 수준으로는 양쪽 다 못 당할 거예요.”
……그래, 저 빈정대는 말투.
“대신 상류는 범상한 당신들도 평범하게 건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거고요.”
내가 아는 복룡 형은 저렇게 비아냥대는 말투를 사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물론 형 역시 몸과 마음이 강인한 발설지옥의 차사였지만, 평소에는 그냥 느긋하고 사람 좋은 형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복룡 형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것 같았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당신들은 그냥 통행세만 내시면 됩니다.”
“통행세?”
“예, 통행세요.”
형의 모습을 한 차사가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원래 강 건널 때 뱃삯 내고 그러잖아요. 그 뭐냐, 카론이던가?”
“그건 유럽 신화잖아!”
“아무렴 어때요. 원래 신화는 다 표절인데. 삼도천이고 스틱스고 강은 다 똑같잖아요.”
차사가 뻔뻔하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두당 1만 우주화예요. 그거 내고 그냥 건너시면 돼요.”
“백만 원?!”
“안 그래도 입장료 털렸는데, 또!”
터무니없는 가격에 헌터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든 말든 차사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목숨값치곤 싸지 않나요? 아니면 그냥 하류로 가시든지.”
“하! 이제 보니, 이거!”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혹시 진짜 신인가 했는데, 역시 인간이네!”
검은 옷을 입은 흑탑의 도사였다.
“그냥 기생충이었구만. 괜히 쫄았잖아.”
같이 온 도사들을 믿고 있는 건지 기세등등한 태도였다.
“기생충?”
“아, 뭔가 했더니 그거였어?”
“꼬라지를 보니 뭐 희한한 풍문이라도 얻었나 보지?”
다른 도사들도 맞장구를 쳤다.
유명한 던전에는 간혹 공략이 아니라 던전을 찾은 헌터들을 노리는 강도가 있다.
하물며 이곳은 10년이나 도전자를 받던 거대한 던전.
당연히 클리어를 포기하고 도전자를 노리는 자들도 있을 터였다.
저들은 아마 차사가 그런 강도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인생을 너무 쉽게 살면 안 되지!”
도사가 차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직후.
퍼어어억!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아악!”
달려들던 도사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커다란 손에 쥐어짜이기라도 한 듯 몸이 기괴하게 꺾인 채로.
“허어어억…… 흐어억.”
사지가 망가진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댔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데도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차사가 웃었다.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며.
“근데 겨우 그 정도로 덤비는 건 좀 가소롭네요.”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손을 뻗지도 않고 도사의 몸을 비틀어버렸다.
정체불명의 힘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숨소리 하나 없는 와중에 쓰러진 도사의 신음만 더욱 공기를 살벌하게 했다.
“저는 발설지옥 차사예요. 우리 지옥은 혀를 함부로 놀리면 뽑아 버린답니다.”
차사가 히죽 웃었다.
“아, 물론 아직 안 뽑았으니까 너무 화내지는 마세요. 그냥 겁만 준 거예요.”
“…….”
“어, 진짜 아무도 말을 안 하시네. 이제야 다들 구업이 두려우신가?”
실실 웃는 모습은, 다른 의미로 저승사자 같았다.
나는 말없이 차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자는 분명 내가 아는 구복룡 차사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방금 쓴 기술만큼은, 우리 발설지옥의 권법이 분명했다.
극에 달한 발설지옥의 권법은 염동력처럼 손에 닿지 않고도 대상을 쥐어짜고 비틀어버리니까.
그럼 저자는 어떻게 염라대왕님께서 직접 내리신 발설지옥의 힘을 쓰는 걸까.
그것도 소멸한 발설지옥 차사의 껍데기를 그대로 뒤집어쓴 채로.
“…….”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혹시 나를 알아볼까 하는 생각에 긴장했지만, 차사의 시선은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자, 알아먹으셨으면 이제 통행세를 내시면 됩니다.”
선심 쓴다는 듯 웃으면서 그가 새로운 말을 꺼냈다.
“목숨값이 백만 원이면 그냥 거저지만, 그래도 혹시 모자란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니 다른 방법도 알려 드릴게요.”
천연덕스럽게 손짓까지 섞여가면서.
“하류의 아귀고기들이 사납긴 한데 의외로 입은 좀 짧아요. 한 명 정도면 한동안 배가 부르거든.”
무언가를 선동하듯 차사가 쓰러진 도사를 곁눈질했다.
“그때 빨리 건너가시면 돼요.”
차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없어 보였다.
먼저 당한 도사를 포함해서.
“서, 설마.”
쓰러진 도사가 같이 온 무리를 돌아봤다.
“이봐,들, 자, 장난치,지 마. 우리 다 합,쳐, 이천, 안, 되,잖아.”
일그러진 얼굴은 금세 절망이 어렸다.
“으, 응? 통행,세 응?”
주변의 도사들이 그를 내려다봤다.
“뭐야, 다, 다들 왜 대답이 없,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도사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비정상적으로 꺾인 사지로 간신히.
“이, 이, 내 그냥 당,할 줄, 알,고!”
그러나 그것도 찰나였다.
파아악!
일어섰던 도사가 다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야, 우리 차사님.”
아까 바리의 실력을 알아봤던, 흑탑 일행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자였다.
“인심이 좋으시네. 생돈 안 내도 되는 방법도 알려주시고.”
다친 동료를 베어버린 놈이 그대로 그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몸을.
“자자, 우리 차사님을 본받아서 저도 통행료 쏩니다!”
굳어 있는 헌터들을 돌아보며 놈이 낄낄 웃었다.
“뭐,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닌데 형편이 되면 나눠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나머지 도사를 이끌며 강가를 내려갔다.
“…….”
남은 헌터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다들 뭐 하세요?”
지켜보던 차사만 재밌다며 웃을 뿐.
“가실 분은 가시고, 오실 분은 오세요.”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헌터들을 자극했다.
“아귀들 배 빨리 꺼져요. 따라가실 분은 지금 따라가셔야 해요.”
그 말에 헌터들이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공짜’로 건널 것인지.
아니면 두당 백만 원씩 쓸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차사의 얼굴을 응시하며 나는 내 기억 속의 복룡 형을 곱씹었다.
저자는 절대 내가 아는 복룡 형이 아니라고 확신하면서도.
그가 정말로 복룡 형이 아닌 게 맞는 걸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앞으로 이 가짜 저승에서 무엇을 더 보게 될지에 대한 긴장을 느끼면서.
“우린 내겠어요.”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사람 죽이고 가는 건 너무 찝찝해.”
비교적 젊은 남녀 여럿이었다.
하나같이 탐탁잖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하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기, 14명의 몫이에요.”
차사에게 통행세를 지불한 그들이 강가로 향했다.
“우리도 내겠어.”
한 명 더 손을 들었다.
입구에서 말을 걸었던 중년인이다.
“모두 57명, 57만 우주화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무리였다.
중년인은 나와 바리를 돌아보더니, 조금 머뭇거리다가 무리를 이끌고 떠났다.
“…….”
이제 남은 헌터는 열 명 남짓.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전부 일행인 듯하다.
“저 돈을 다 내면 우린 진짜 한 푼도 없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누군가 말했다.
“우리가 가든 안 가든, 어차피 한 사람은 죽어.”
“그래. 우리가 직접 죽인 것도 아니잖아, 우리랑 상관없이 이미 죽었다고!”
한 사람이 운을 띄우자 나머지도 차례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않나, 우리랑은 상관없어.”
“쓰레기들이 먼저 한 명 희생시킨 거지.”
“우린 그냥 그 사이에 건너갈 뿐이고.”
결국 그들 전부가 하류로 향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말로 우리들뿐.
“전하, 어떡할 거야?”
호구별성이 물었다.
“우린 사백인가? 될 것 같은데. 아직 돈 좀 있잖아.”
“…….”
“아니면 저놈한테 덤벼볼까?”
나는 잠시 차사를 돌아봤다.
멀찍이 선 차사는 그저 웃는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 얼굴이, 나는 몹시 거슬렸다.
오래전 외롭게 죽은 개 한 마리를 위해 이승길에 함께했던 차사와는 너무도 달랐기에.
“일단 내려가죠.”
“흠?”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눈을 끔뻑였다.
옆에선 사라와 바리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뭐, 굴욕은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
“아뇨, 하류 말고.”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중류로.”
본래 저승의 삼도천을 건너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상류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물로, 선인도 악인도 아닌 평범한 자들이 건넌다.
하류는 헤엄쳐서 건너야 하는 깊은 물로, 생전에 죄를 지은 악인들이 아귀에게 물어뜯기며 건넌다.
마지막으로 중류는 상류보다는 깊되 하류보다는 얕고, 칠보로 장식한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덕을 쌓은 선인들이 건넌다.
이렇듯 ‘저승’이란 결국 권선과 징악의 신화다.
때문에 나는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선인들이 건너는 유교도.
사라져버린 권선의 신화가 이곳에도 모습을 바꿔 남아 있는지.
***
삼도천 중류.
까맣게 오염된 강물이 잔잔하게 물결쳤다.
“음, 역시 아무것도 없는데?”
멀찍이 의령수가 보일 무렵 호구별성이 말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다른 게 보였다.
출렁이는 강의 표면 위로 무언가 반짝인 것이다.
“……역시!”
그래, 아까는 시체가 걸린 의령수에 압도되어 몰랐는데.
다시 보니 흐르는 검은 강물 위로 무언가가 간헐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나는 일행을 뒤로한 채 곧장 강가로 달려갔다.
“남아 있었구나!”
유교도를 장식했던 칠보 조각.
변해버린 저승 신화에 아직 권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중류가 답이었어!”
검은 물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보석들.
대부분이 흙에 파묻혀 있어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나도 내가 아는 유교도의 신화 때문에 강을 살핀 거니까.
[ 풍화된 신화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
팝업창이 떴다.
[ 1페이즈 ‘삼도천’의 클리어 조건이 추가됩니다! ]
- 클리어 조건 : 삼도천의 유교도를 건너십시오.
- 보상 : ??? + ???
삼도천을 건너라는 퀘스트.
여전히 보상은 비공개지만 무언가 새롭게 더해졌다.
게다가 클리어 조건이 ‘추가’됐다는 것은 이제 하류나 상류로는 갈 수 없다는 뜻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망가진 유교도를 건널 수 있을까?
본래라면 삼도천의 두 신, 현의옹과 탈의파가 옷을 벗겨 죄의 무게를…….
그때였다.
쿠웅!
굉음이 들리더니 땅이 흔들렸다.
쿠우웅!
직후 또 한 번 땅이 진동했다.
“……!”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검을 뽑은 상태였다.
채애앵!
검을 부딪치고서야 비로소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정돈되지 않은 하얀 머리에 낡고 해진 상복.
등이 굽은 노인이지만 거인처럼 큰 키가 주는 위압감.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에 걸맞은 신.
“……현의옹.”
아까 봤던 발설지옥의 차사처럼, 마찬가지로 내가 아는 현의옹의 모습이었다.
“…….”
하지만 다르다.
추레한 모습과 달리 언제나 현기가 담겨 있던 신의 눈이 지금은 붉게 충혈되어 마치 광인과 같다.
게다가 몸은 술에 취한 것처럼 떨리고 있어 수천 년을 군림한 신의 위엄이 전혀 없다.
“게…가…리라.”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현의옹이 중얼거렸다.
“……가……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서 인상을 찌푸린 순간.
“업의 무게가 짓누르리라!”
별안간 현의옹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쿠웅, 땅이 거세게 울렸다.
[ (!) 현의옹의 권능이 당신을 짓누릅니다. ]
그러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리는 것처럼 무릎이 꿇렸다.
[ (!) 상태 이상 : 육신의 속도가 느려집니다. ]
“……!”
상태 이상이라니.
몸을 일으키려는데 정말로 사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늪에라도 빠진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움직이는 속도가 두 배는 느려진 느낌이었다.
제대로 대처하기도 전에 현의옹이 다시 소리쳤다.
“업의 무게가 짓누르리라!”
“업의 무게가 짓누르리라!”
[ (!) 현의옹의 권능이 당신을 짓누릅니다. ]
[ (!) 현의옹의 권능이 당신을 짓누릅니다. ]
[ (!) 상태 이상 : 육신의 속도가 느려집니다. ]
[ (!) 상태 이상 : 육신의 속도가 느려집니다. ]
순식간에 상태 이상이 중첩되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읏……!”
일단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줬다.
중첩된 상태 이상 때문에 아까보다도 더 느릿해진 움직임이 답답했다.
“젠장, 이,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피할 새 없이 현의옹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어억!
“……아윽!”
뼈가 울리는 일격이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팔로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충격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느려진 몸 때문에 낙법조차 취하기 힘들어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쿠우웅!
간신히 정신을 붙잡자마자 거듭 땅이 흔들렸다.
“업이 드러나리라!”
이번에는 뒤쪽에서 거칠게 찢어지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는 탈의파의 목소리였다.
[ (!) 탈의파의 권능이 당신을 파헤칩니다. ]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함께 칼바람이 휩쓰는 통증이 느껴졌다.
[ (!) 상태 이상 : 육신의 방어력이 떨어집니다. ]
“……!”
속도에 이어 방어력까지 떨어졌다.
속도가 떨어진 것만으로 현의옹에게 치명타에 가까운 일격을 허용했다.
이대로는 정말로 버티기 힘들다.
나는 이제야 삼도천의 신화가 어떤 모습으로 왜곡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삼도천에서 망자의 업을 재는 현의옹과 탈의파.
탈의파는 망자의 옷을 벗기고, 현의옹은 벗긴 옷을 나무에 걸어서 가지가 얼마나 휘는가로 업의 무게를 판단한다.
그러나 변해 버린 신화에서 탈의파는 상대의 무장을 해제하며, 현의옹은 상대를 무게로 짓누른다.
이들의 시험을 통과한 선인만이 유교도를 건널 수 있는 삼도천의 신화처럼.
신화를 재구성한 던전에서는 수문장이 된 이들을 쓰러트려야만 유교도를 건널 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괴물처럼 변한 두 신을 쓰러트려 다리를 건너는 것.
아무리 저승 신화의 겉모습을 빌렸다 한들, 이래서는 아무 의미 없는 폭력만 남지 않았나.
이런 것은 권선의 신화가 아니다.
선인들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해 주었던 권선의 신화가, 대체 왜 이렇게 변해야 한단 말인가.
“빌어먹을.”
복룡 형의 모습을 한 차사를 봤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
그 위화감이 의미를 잃고 변질된 신화 앞에서 기어이 분노로 변했다.
나는 이 던전이, 내가 사랑하는 세계가, 이런 식으로 왜곡된 것에 화가 났다.
이런 것은 절대 저승의 신화가 아니다.
“……크윽.”
몸을 일으키자 전신에 통증이 번졌다.
내장이라도 터진 건지 불에 타는 것처럼 속이 뜨거웠다.
“……당신들은.”
가까스로 검을 쥔 팔이 가늘게 떨려 왔지만, 통증이 심해지건 말건 억지로 손아귀에 더 힘을 주었다.
“당신들은 대체 뭡니까.”
제대로 된 대화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알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는 두 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그들이 무엇인지.
“던전을 이루고 있는 데이터?”
우주질서보존회는 이곳이 우주 역사에 기록된 저승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눈앞의 두 괴물은 그저 내가 아는 두 신의 잔상일까?
수천 년간 이어진 권선과 징악의 신화 대신, 그 겉가죽만 흉내 낸 그림자인 걸까?
“……아니면.”
던전은 정말, 신화의 겉모습만 빌리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아는 저승의…….”
말을 다 잇기도 전.
탈의파와 현의옹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
착각일까.
그들이 내게 달려드는 찰나.
광기만 가득했던 눈이 아주 약간이나마 흔들린 것은.
겉모습만 같았던 발설지옥 차사와는 달리…… 정말로 내가 아는 두 신의 눈이 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