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당신을 기다리는 것(2)
사라수대왕의 저택 응접실.
고풍스러운 원탁 위로 맑게 끓인 차가 넉 잔 올라와 있었다.
서천꽃밭의 웃음꽃으로 끓인 차였다.
당분간은 꽃이 피지 않아 몹시 귀해진.
“흠, 그러니까.”
찻잔을 들며 사라가 먼저 운을 뗐다.
“한반도의 신들이 벌써 밉보였다는 거구나.”
“네, 아무래도.”
나는 좀 쓰게 웃었다.
“대왕님께서 일부러 저승문을 닫으신 줄 몰랐어요.”
그때는 그냥 강림 형과 나를 보호하시려는 줄 알았는데, 우주질서보존회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니.
대왕님께서는 얼마나 알고 계셨던 걸까.
알고 계셨으면서도 나와 강림 형에게는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걸까.
“……하긴, 바리데기를 모시던 무당도 세상이 뒤집히기 전에 미리 말했다지.”
사라가 바리를 흘끗 돌아보았다.
역시 바리에게서 바리공주를 보고 있는지.
“그이도 그때 한반도에서 모습을 감췄고 말이다.”
그 말에 나와 호구별성도 바리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조용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음, 왠지 알 만한 신은 다 알았던 것 같네.”
호구별성이 뚱하니 말했다.
“뭐, 바리데기나 염라라면 분명 뜻이 있었을 것이다.”
사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게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말을 꺼냈다.
“20년 전 대별왕께서 사라지신 이후, 저승신을 비롯하여 한반도의 모든 운명신들이 활동을 멈췄죠.”
대별왕은 저승을 지탱하는 기(氣) 자체가 의인화된 존재다.
엄밀히 따지면 저승의 최고신은 대별왕이다.
다만 그는 보통 저승의 기, 그 자체로 존재했으므로 저승 시왕의 대표격인 우리 대왕님께서 최고신의 역할을 하셨다.
그 위로는 지장보살도 계셨지만 그분은 대별왕과는 다른 의미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셨고.
“대별왕의 실종 이후 삼백 차사도 더 이상 혼을 수거하지 않았습니다. 명부가 완전히 틀어졌으니까요. 그리고 10년 후, 그들이 쳐들어왔죠.”
10년 전에 벌어진 저승 침공.
“그래.”
말을 들은 사라가 얼굴을 굳혔다.
그도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색목인들까지 섞여 있었지.”
“뭐? 진짜?”
호구별성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양놈들이 쳐들어왔다고?”
처음 듣는다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러 인종이 함께였죠.”
저승이 무너진 것은 단순히 적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1만의 숫자도 엄청났지만, 그들 전부가 생소한 신들의 힘을 썼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대인이었던 나는 유럽 계통의 신들은 어느 정도 알았지만, 수백 수천 년을 한반도에서만 살았던 다른 신들은 정체불명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두 분도 아시겠지만, 게이트 이후 해외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아마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 때문이겠죠.”
21세기는 한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을 믿는 세상이었으니까.
아마 나라 단위로 먼저 통일하고, 그다음으로 같은 문화권, 같은 대륙을 넘어 전 세계를 순차적으로 신화를 통일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외국의 헌터들이 저승을 쳐들어왔다는 건.”
“그치들이 일부러 길을 열어 줬다는 거구나.”
바로 이해한 사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는 이미 10년 가까이 사후세계의 기능이 멈춘 상태였다.
아마 그들은 기능이 멈춘 저승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새로운 저승을 만들려던 게 아닐까?
“그걸 살아남은 염라가 막은 거고.”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괜찮겠느냐.”
다른 두 신도 한참 침묵하던 끝에 사라가 먼저 물었다.
“그치들이 네가 죽기를 바란다는데.”
가볍지 않은 질문.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가능하면 지금 당장 던전으로 가려고 합니다.”
웃으면서 생각했던 대로 답했다.
“신화급 던전이니 뭘 준비하든 소용없을 테고요. 그럼 굳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도 없죠.”
두 신은 내 답이 의외인 듯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마저 말했다.
“제가 죽기를 바라니까, 오히려 하루빨리 이 한반도의 유일한 저승왕이 되는 게 살길이겠다 싶더라고요.”
“이야, 마음에 드네!”
호구별성이 호쾌하게 받았다.
“우리 전하, 이럴 때는 화통해서 좋다니까.”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려는 듯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그게 고마워서 멋쩍게 웃었다.
“다만 위험한 것도 사실이니, 역시 두 분은 그냥 이곳에…….”
“아니, 좋다고 하자마자 그게 무슨 소리야!”
호구별성이 찰싹 내 등짝을 내리쳤다.
“왕이 뒤지면 다 끝이야. 당연히 차사가 왕을 지켜야지!”
그러더니 당당히 가슴을 폈다.
“널 치려면 영감 목부터 먼저 쳐야 할 거다!”
“뭐, 내 목을 걸어도 상관은 없다만 걸 거면 네 목부터 걸거라, 별성.”
팔짱을 낀 사라가 바리를 돌아보았다.
“아이라면 두고 가도 되겠지만.”
“아뇨, 저도 갈게요!”
바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러더니 그녀가 문득 속상한 얼굴을 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만 남아계시면 될 것 같아요……. 몬스터로 오해받으실 수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네.”
호구별성이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
“…!!………!…!!”
두 노인도 열심히 뼈를 달그닥거렸지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집 잘 지키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라는 걸까.
“……오빠, 그리고.”
바리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앞으로 가실 그곳에, 그분이 보여요.”
“그분?”
무슨 소리냐는 되물음에 그녀가 운을 띄우듯 말을 이었다.
“허리에 찬 칼에, 새까만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는.”
“……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였다.
그런 묘사를 듣고서 내가 떠올릴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네. 지금 떠오르신 그분이요.”
바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승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
마침내 확언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전해진 바리의 목소리.
그럼에도 나는 되레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루어질 리 없다고 여겼던 소원이 아무런 징조 없이 이뤄진 것처럼.
그렇기에 더욱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허.”
“미친, 강림이 살아 있어?!”
결국 두 신이 먼저 반응하고서야, 나는 한발 늦게 바리의 말을 되새겼다.
형이.
강림 형이, 살아 있다.
“아니, 걔는 집구석 내팽개치고 어딜 싸돌아댕겨?”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염병, 안 뒤졌으면 재깍재깍 기어들어 와야지!”
성질을 내려는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뭐, 신화급 던전은 클리어하지 않는 이상 나오기 힘드니까요.”
분명 호구별성을 달래기 위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묻어나왔다.
“아마 형도 스스로 저승 신화를 복원할 생각이었나 봐요.”
그때 우주질서보존회가 형을 찾지 못한 것은, 형이 버그로 가득한 던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을까.
“…….”
이상했다.
바리가 형을 봤다는데.
형이 살아 있는 걸 봤다는데.
정확히 무엇을 본 것인지 더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고약한 거짓말에 된통 속아 넘어갔지만 그게 거짓말이라서 다행스러운 기분?
그래, 거짓말이라는 게 그저 기뻐서, 속는 동안 느꼈던 괴로움마저 단숨에 날아가버리는 기분이라고 하면 맞을까.
그런데도 아직 실감이 안 돼서, 형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혹시라도 착오일까 봐 다른 것을 묻기가 두려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와중 심장은 홀로 빠르게 뛰었다.
내가 지금껏 뭘 억눌러 왔는지를 대변하듯이.
형이 떠날 때부터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나는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됐던 것이다.
……그는 내가 49년을 함께한, 내 마지막 가족이었으니까.
“잠깐,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때 사라가 입을 열었다.
“강림도 제 스스로 신화를 복구하려고 했다면 말이다.”
그새 깊이 침잠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대왕, 강림이 널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떡할 것이냐.”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문제를 입에 담았다.
“차사는 왕의 자리를 잇게 되어 있지. 발설지옥의 차사가 염라를 계승한 건 문제가 없어. 한데.”
“…….”
“강림이 아닌 네가 그 자리를 이었다는 건.”
수천 년의 세월이 깃든 신의 얼굴로.
“……장성한 적장자를 두고, 핏덩이 말자가 가업을 이은 꼴이지 않느냐.”
순간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형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들떴던 마음에 이상한 긴장이 섞여들었다.
정확히 무엇에 대한 긴장인지 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낯설고 불편한 위기감이.
결국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도록 나는 사라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무엇이 정답인지도 모르는 채로.
“……하!”
다른 이들도 덩달아 말을 잇지 못하던 사이, 한참 만에 호구별성이 먼저 침묵을 깼다.
“아니, 영감탱이 뭔 개소리를 하고 있어. 21세기에 뭔 장자에 말자 타령이야. 법원 갈래? 유언 없으면 다 똑같거든?”
“아니, 가만히 있어 보거라, 별성.”
일단 농담으로 가볍게 넘길 생각인 듯했지만, 사라는 그대로 넘어가주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누구를 왕으로 모시느냐의 문제지 않느냐.”
대답을 재촉하듯 그가 나를 주시했다.
“…….”
그런데.
그런데 나는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이 살아 있다는데, 만나기도 전에 그와의 계승 논쟁이라니.
내가?
강림 형이랑?
그 강림차사와?
……누가 왕인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누구를 모시냐니, 노친네가 자꾸 뭐래!”
결국 또 호구별성이 나섰다.
“강림? 미쳤어? 그 또라이가 왕이면 난 당장 망명한다! 그놈이 얼마나 마마를 박해하는데!”
코웃음 친 그녀가 힘 있게 내 어깨를 친다.
“어깨 펴, 전하. 강림이 뭐라든 내가 모시기로 한 왕은 너다.”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기에, 나는 조금 웃고 말았다.
“……네, 누나.”
정작 나 자신의 각오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딘가 도망치는 기분으로.
“……잊지 않을게요.”
결국 듣고 있던 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지금은 그 정도로 정리하자꾸나.”
대답을 강요하던 때와 달리 조금 부드러워진 얼굴로.
“대왕, 별성만이 아니다. 나도 이미 너를 내 왕으로 모셨다. 우리가 모신 왕은 너다.”
문득 그가 후후 웃었다.
“그러니 강림을 만났을 때 터무니없이 왕위를 포기하면 안 된다.”
그제야 눈치챘다.
그는 내가 느끼게 될 부담을 미리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막내 차사였던 내가, 수십 년을 형으로 모셨던 강림차사 앞에서 곧장 왕위를 주장하기는 힘들 테니까.
“……네.”
저승 신화 던전, 그리고 그곳에 있다는 강림 형을 곱씹으면서.
“형이 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왕의 자격을 시험받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답이라는 듯 사라와 호구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나 바리는, 바리만은 처음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
뒤에 선 그녀의 조부모마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오빠, 그런데.”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입을 연 후에도 그녀는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원래도 가볍게 말하는 성품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말하길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막연한 불안감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더 할 말이 있는 게냐.”
결국 기다리다 못한 사라가 바리에게 물었다.
무심결에 주먹을 쥔 나는 어느새 손이 차게 식어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사라의 물음에 바리는 기어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낯빛을 어둡게 물들인 채, 불안한 듯 시선을 피하고 뒤에 선 조부모에게 자꾸만 몸을 기대면서.
“그분이 보이는데…, 오빠도 같이 보여요. 그러니까 정확히는…….”
바리의 어깨를 꽉 붙잡아주는 조부모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그들 또한 같은 것을 보았다고.
그리고 마침내.
바리의 떨리는 시선이 천천히 나를 겨냥했다.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내려다보는 그분의 모습이에요.”
8장. 당신을 기다리는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