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당신을 기다리는 것(1)
3주가 흘렀다.
파렴치한 우주 세금 버러지들이 삥을 뜯겠다고 예고한 날.
내 인벤토리에는 1억 우주화, 그러니까 무려 100억 원이 준비된 상태였다.
“전하, 시리얼 더 먹을래? 아니면 약과를 더 주랴?”
우유병을 든 호구별성이 물었다.
현신하면 인간처럼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우리는 삼시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는 중이었다.
세간살이가 없어 당장은 빵이나 한과, 시리얼뿐인데, 평균 연령 4100세의 두 신께서는 의외로 투정 없이 잘 드셨다.
개꼰대 강림 형이었어 봐, 쌀이 아니면 밥 취급도 안 했을 거다.
“…….”
그래도 영원히 그리울 꼰대인데.
돌아오는 추석에는 차례상이라도 차려 줘야겠다.
“조만간 저승에도 가스나 전기를 놔야겠어.”
숟가락을 든 호구별성이 툴툴댔다.
뭐, 열흘째 시리얼만 먹는 건 좀 가혹하긴 했지.
우주강도단 놈들이 그새 대왕님들 궁이며 지옥을 모조리 철거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서천꽃밭의 사라수대왕 저택에 머무는 중이었다.
그도 대왕의 이름을 쓰는 만큼 아주 커다란 집이었지만, 집을 돌보던 권속은 다 사라지고 집주인 사라도 수년을 그냥 방치했던 터라 딱히 누가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3주간 열심히 먼지를 털고 정리한 덕에 이제야 겨우 밥 먹고 각자 쉴 만한 자리가 생긴 참이었다.
앞으로도 부지런히 집답게 만들어야 할 테고.
“알겠지, 전하! 이따 이승 나가면 일회용 버너라도 사오기다.”
호구별성이 계속해서 식기구를 살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버너에 발전기라니.
문득 49년 전 저승에 처음 떨어지던 날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2022년에 전기도, 가스도 없는 저승에 뚝 떨어져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하필 룸메이트도 저승 제일의 꼰대로 걸려서 말이지.
“네, 그렇게 해요.”
고개를 끄덕였더니, 호구별성이 감정이 격해진 표정으로 탕탕 식탁을 두드렸다.
“그래, 북망산도 식후경인데, 잘 차려 먹어야지!”
응?
방금 가면 큰일 날 산을 부른 것 같은데.
……아닌가? 여기 다 저승신이라고 일부러 그랬나?
“그런데 바리는 되게 일찍 일어나네요.”
시리얼을 뜨며 말을 돌렸다.
지금도 딱히 늦은 시간은 아닌데 아침상을 둘러앉은 건 나와 사라, 호구별성뿐이었다.
바리네 가족은 벌써 물 한 바가지를 떠 놓고 치성 중이었기 때문이다.
3주 내내 저런 걸 보면 늘 해왔던 일인 듯했다.
“도사는 원래 그렇다.”
사라가 설명했다.
“우주를 따르니까. 인월(寅月)에 입춘이 있듯 그들도 인시(寅時)에 하루를 여는 거야.”
“인시요?”
“그래, 그리고 자시(子時)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지.”
인시는 새벽 세 시 반부터 다섯 시 반까지를 뜻하고.
자시는 오전 열한 시 반부터 오후 한 시 반까지를 뜻한다.
“대체 어떻게 살아 있대요?”
하드코어 한 스케줄에 놀랐더니, 사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러니까 도사 아니겠느냐.”
하긴 도 닦는 게 쉬우면 지금쯤 오만 신선들이 날아다니겠지.
정작 진짜 신인 사라는 5천 년 넘게 놀고먹는데, 신도 아닌 도사는 하루 평균 여섯 시간도 못 잔다니.
역시 이 우주는 불공평했다.
“그런데, 쟤들 사는 거 보면 재밌긴 해.”
호구별성이 말을 얹는다.
“난 내가 차사가 돼서 사람부터 살릴 줄 몰랐지.”
저승차사로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망자의 부활이었던 게, 아직도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뭐, 우리도 원래 곧잘 사람을 살리곤 했으니까요.”
그래도 많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차사를 만나고도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는 원래도 왕왕 있었으니까.
“하긴, 니네 원래 개판으로 일하잖아.”
호구별성이 낄낄 웃었다.
“강림, 그놈은 뒤질 놈한테 뇌물까지 받고.”
“…….”
음, 그렇긴 해.
오랜 세월 개판이었던 게 사실인지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빵차사였던 우리 강림차사께서는, 뇌물 받고 수명을 삼십(三十)살에서 삼천(三千)살로 고쳐 줬다는, 2만 년 저승사에 길이길이 박제될 희대의 사고도 치셨다지.
“근데 너도 사람 살려 본 적 있어?”
호구별성이 불쑥 물었다.
고작 49년 차 막내였던 나도 사람을 살린 적이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음, 몇 번 있었죠, 저도.”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조금 쓴웃음이 났다.
“제일 처음은 2년 차 때였는데.”
칠삭둥이 쌍둥이를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데려오라는 일이었지.
산모는 애들을 낳자마자 죽었고, 하루아침에 홀아비가 된 애 아빠는 매일 밤 기도했었다.
제발, 제발 아이들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인큐베이터 속 핏덩이 둘을 보니까,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 거예요. 이럴 거면 그냥 태어나게 하지를 말지.”
“저런.”
호구별성도 낮게 탄식했다.
“그렇게 팔자 센 애들이 꼭 있다니까.”
도대체 왜 이런 인생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는 결국 아기들의 명부를 찢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작살났죠, 대왕님한테.”
오랜만에 떠오른 기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뺨을 한, 열 대는 맞았나?”
말이 뺨 열 대지, 지옥 최강자가 싸다구를 갈겼으니 한 대 맞을 때마다 땅바닥을 열댓 번씩 굴러야 했다.
“……그래, 그 영감도 성질 참 드러웠지.”
대왕님을 떠올린 듯 잠깐 멈칫했던 호구별성이 곧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우리 대왕님께서는 저승의 질서를 지키셔야 하니까요.”
그걸로 딱히 악감정은 없던 터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강림 형이랑 다른 형, 누나들이 부르더라고요.”
아직도 선명했다.
명부를 찢은 죄로 대왕님께 피 터지게 두들겨 맞은 날.
그날 밤, 내가 속한 발설지옥은 물론이고 다른 지옥 차사들까지 모여서 나를 불렀다.
“진짜 차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다들 그러셨죠.”
-야, 임마! 잘했어!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2년이라니, 오히려 늦었지. 아마 네가 우리 중에 제일 늦었을걸?
-야, 우린 네가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줄 알았다!
아직도 형, 누나들의 웃음소리가 생생하다.
처음 사람을 살린 날, 다들 똑같이 대왕님들께 떡이 되도록 쥐어 터졌댔지.
“우리는 죽음의 신이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당연히 여기면 안 된다고. 우리는 결국 죽음이 애석한 마음에서 비롯된 존재니까요.”
그 말에 호구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죽음이 두려운 마음에서 저승이 시작되었듯이.
병마에 맞서던 사람들이, 더 살고 싶은 마음에 역병의 신 호구별성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으니.
“네가 왜 저승에 미련이 남았는지 알겠다.”
결국 나는 다시 웃었다.
“네.”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사랑할 만한 세계였죠.”
그런 마음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오빠!”
밖에 있던 바리가 식당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구청장님께서 오셨어요!”
드디어 우주강도단이 쳐들어왔다.
***
“확인했습니다. 1억 우주화, 원화로 100억 원.”
세금을 징수한 구청장이 말했다.
여전히 내 두 배는 됨직한 우람한 몸에 칼 같은 양복 차림이다.
“돈도 냈으니, 이제 정말 딴말하는 거 없는 거죠?”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 더러운 우주강도단, 또 희한한 핑계로 저승을 뺏겠다는 건 아니겠지?
“예, 현 시간부로 우주질서보존회는 정식으로 선생님의 저승의 영구 임대권을 인정합니다.”
“잠깐만요, 영구 임대요?”
단어 선택이 뭔가 이상한데?
“그야 당연히 지구의 모든 영역은 우주질서보존회의 소유니까요.”
누구 마음대로 당연해, 이 우주침략자!
“만물이 함께 사는 우주에 개인 부동산 같은 게 어불성설 아닙니까?”
……이것들, 사실 우주공산당이었어?
“어쨌든 우주질서보존회는 선생님의 저승 영구 임대권을 인정합니다.”
구청장이 정리했다.
“선생님께서 소멸하시기 전까지.”
“……!”
뭔가 찝찝한 사족을 덧붙인 그녀가 저승을 한 번 둘러보았다.
선글라스를 써서 눈은 보이지 않지만, 입꼬리는 왠지 재수 없게 올라간 채로.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음, 뭔가 화날 것 같은데.
“100억 못 내실 줄 알았습니다.”
오, 역시 화나는군.
“처음부터 우주질서보존회가 저승을 합병할 생각으로 내건 세금이니까요.”
그래, 짐작했지만 정말 정말 화나는군.
“하지만.”
말을 잇던 그녀가 빙긋 웃었다.
“이렇게 된 것도 결국 우주의 뜻이겠죠.”
그 순간, 나는 구청장이 말하는 ‘우주’가 뭔지 궁금해졌다.
이들의 ‘우주’는 신들이 말하는 ‘우주’와 같은 걸까?
“선생님께서는 우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물었다.
“우주란 하나의 시공간에서 관측될 수 있는 모든 사건의 집합체입니다.”
솔직히 와닿는 설명은 아니었다.
다만 사라나 호구별성은 이런 식으로 우주를 말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우주질서보존회의 언어는 확실히 우리와 달랐다.
“시간은 지구인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 우주의 시공간은 사실 하나니까요.”
그녀가 픽 웃었다.
“선생님께 친숙한 개념 중 그나마 유사한 것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정도겠군요. 형성된 카르마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이 중첩된 상태가 우주입니다.”
나름대로 내 수준에 맞췄다는 설명이란다.
“저희는 우주가 완벽을 추구한다고 봅니다. 그 무수한 가능성들의 집합 중에서 시시각각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선택하는 거죠.”
설명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아리송했다.
하지만 대충 예지 능력자들이 왜 다른 미래를 보는지는 이해했다.
뛰어난 예지 능력자는 결국, 우주가 선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미래를 보는 거겠지.
“즉 우주 신화 대통합 시범 사업이란 우주의 선택인 겁니다. 어떤 신이, 어떤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가 가장 완벽에 가까울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퍼어엉!
갑자기 뭔가 폭발하는 굉음이 울리더니.
믿을 수 없게도, 구청장의 몸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렸다.
대포라도 맞은 듯 커다란 구멍이.
……뭐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없는데 난데없이 구멍이 뚫리다니!
게다가 더 비상식적인 것은 구청장 본인의 반응이었다.
“음.”
그녀는 구멍이 뚫린 몸을 내려다보고는.
“새 옷이 필요하겠군요.”
허공에서 새 셔츠를 만들어 걸칠 뿐이었다.
몸에 뚫린 구멍을 가리면서.
“놀라실 것 없습니다, 선생님.”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지금 이 좌표에서 허용되지 않는 말을 했기 때문에 제 우주 인과(因果)가 조금 부서졌을 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 우주의 본질을 아실 때가 아니라는 거죠.”
뭐야, 그럼.
나한테 말 한마디를 잘못해서 저렇게 됐단 거야?
“우주질서보존회니까요. 우주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하면 저를 구성하는 인과도 부서지는 게 당연합니다.”
내 경악이야 어쨌든 구청장은 태연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선생님.”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별로 큰 타격은 아닙니다. 대충 23만 년이면 복구되겠군요.”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23만 년이요?”
말 한마디 잘못해서 23만 년이나 구멍이 뚫린다고?
“선생님.”
그러자 구청장은 차분하게 답했다.
“23만 년은 저희에게 찰나와 같습니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느낄 수 있는 말을.
“하물며 이 작은 행성 지구에서조차, 23만 년은 벌써 2만 번쯤 지나갔지요.”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왜 지구에 대한 행정이 개판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던전이라는 날벼락을 때려 놓고도 50년이나 대충 일했는데, 그조차도 그들에게는 그냥 눈 한 번 깜짝할 시간이었다.
“그래도.”
구청장이 다시 말했다.
“제 나름대로 선생님께 공을 들인다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잠깐이나마 우주의 심판을 감수할 만큼.”
이어진 말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저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으신가 봅니다?”
곧바로 되묻자 구청장이 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예, 부탁드리러 왔지요.”
부탁이라니.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겸손한 표현이 아닌가.
“10년 전, 저희는 한반도의 저승 신화가 완전히 끝났다고 판단했습니다.”
10년 전이라면 1만 명의 헌터가 저승을 침공했을 때였다.
그때 대다수의 저승신이 소멸해버린 것을, 우주질서보존회도 알았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우주 역사에 기록된 저승 데이터를 토대로 또 하나의 신화급 던전을 만들었죠.”
신화급 던전.
나도 개념은 알고 있었다.
강한 헌터일수록 쉽게 클리어할 수 있는 일반적인 던전과 달리, 모든 헌터가 똑같은 조건에서 도전해야 한다는 기묘한 던전.
원래도 한반도에 몇 개씩 존재했으나, 내가 마지막으로 이승에 나섰던 10년 전까지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 던전을 클리어하면 새로운 저승 신화가 시작되는 거였군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우주퇴적물 때문에 사후세계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저승이 무너진 이후, 우주질서보존회는 신화급 던전으로 어떻게든 빨리 사후세계를 다시 복구하려던 모양이었다.
“네, 그런데 지난 10년간 그 던전에 알 수 없는 버그가 무한 발생하더군요.”
재밌다는 듯 구청장이 입술을 비틀었다.
“알고 보니 이 땅에 아직 저승 신화의 잔재가 남아 있었지 뭡니까.”
“……!”
그 말에, 나는 왜 이제야 저승 철거 요청이 내려왔던 건지 알아챘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남아 있었으니, 이제라도 없애야 했단 거군요.”
헌터들의 침공 이후 우리 대왕님께서는 저승문을 완전히 닫으셨다.
지난 10년 간 차사들의 이승 출입을 금했던 저승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시고 다시 또 10년 동안 문을 아예 봉해버리신 것이다.
그 때문에 우주질서보존회는 저승이 사라졌다고 착각했고.
그게 착각인 줄도 모른 채 저승 신화 던전을 새로이 만들었다.
버그가 발생한 건 그래서였다.
하나여야 할 게 두 개가 되었으니.
“저희도 감히 생각지 못했죠.”
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3차원의 신이…… 10년이나 우리의 눈을 속일 줄이야.”
마치 우리 대왕님이 일부러 그랬다는 듯한 뉘앙스다.
“그러니까, 선생님. 저는 지금 이해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해요?”
“예, 아무래도 저희 우주질서보존회는…… 선생님의 저승 승계가 다소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말과는 달리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선생님이 승계하신 왕위의 전임자는, 결국 버그거든요. 10년이나 저희를 골치 썩인.”
그 순간.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아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우리 대왕님이 버그인데.
이 새끼들이, 지금 나한테 뭘 바란다는 거지?
“아, 물론 저희한테 10년은 찰나지만 지구인들에게는 제법 길지 않습니까.”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구청장은 계속 혼자 웃었다.
“저희는 빠른 시일 내에 선생님께서 저승 신화 던전에 도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 그대로 그녀가 말을 정리했다.
“하루빨리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길 바라는 거죠. 던전이든, 선생님이든.”
“…….”
그래, 그렇단 말이지.
새삼 또 화를 낼 것도 없어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다만 그간의 일이 조금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왕님께서 왜 저승문을 닫으셨는지.
우주날강도들이 왜 저승을 뺏으려 했는지.
“물론 선생님께서도 하루빨리 던전을 클리어하셔야 할 겁니다.”
구청장이 마저 말했다.
“지금 선생님께서 보유하신 스킬들이 비활성 상태인 건, 일부 데이터가 저승 신화 던전에 계승됐기 때문이거든요.”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날 던전으로 보내기 위해 꾸며낸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가급적 빨리 던전에 도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애초부터 버그로 여겼다는데, 던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날 그냥 버그처럼 삭제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던전에서 데이터를 승계하시면 비활성 스킬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지금의 그 효과 없는 풍문도 제대로 완성될 테고요. 유일무이한 진짜 저승 신화가 시작되는 거죠.”
마치 내게도 호재라는 듯 구청장이 말했다.
쇼 호스트처럼 가볍고 괘씸한 어조로.
“또한, 저희 우주질서보존회는 던전과 선생님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굳이 손까지 내밀면서.
“저는 웬만하면 당신이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꼭 누구 놀리는 것처럼.
“저희들 사이에서도…… 사실 편애라는 게 존재하거든요.”
퍼엉!
낯설지 않은 폭발음이 울리더니 이번에는 구청장의 새끼손가락이 날아갔다.
“음, 마침 새끼손가락이군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지구인한테는 제법 의미가 깊다던데.”
그러더니 허공에 하얀 장갑을 만들어냈다.
“전 정말로 당신이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위해 1만 년쯤 새끼손가락을 포기할 만큼.”
장갑으로 손을 가린 그녀가 내게 목례했다.
“그럼,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습니다.”
전해야 할 것은 다 전했다는 듯.
아주 자기 할 말만 늘어놓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하아.”
나는 잠시 구청장이 서 있던 허공을 바라보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개거지 같은 우주 세금 버러지들.”
아무래도 나의 왕위 계승은 이제야 진짜 시작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