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2) (5/187)

3장. 신화의 계승자(2)

[ ‘3천 년 전의 약속.’ ]

- 분류 : 미완성 풍문(E)

- 인연 : 호구별성, 염라

- 내용 : 역병의 신이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 저편의 왕을 찾아왔다는데(……)

- 효과 : (!) 해당 풍문은 인연(因緣)의 풍문입니다. 현재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인연의 풍문이라고?”

‘인연의 풍문’은 말 그대로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풍문이다.

일반 풍문처럼 무용담, 영웅담으로 변할 수 있지만, ‘인연’, 즉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고블린 로드를 잡은 파티원들에게 ‘고블린 로드 협공’ 같은 풍문이 생긴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인연의 풍문은 그냥 풍문보다 훨씬 얻기 힘들다.

말 그대로 인연, 깊은 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연의 풍문은 성장 조건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반 풍문이 던전을 돌거나 해서 카르마 포인트가 모였을 때 성장한다면, 인연의 풍문은 ‘인연이 강해질 때마다’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 연인, 생사를 같이한 파티원 사이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건데.

이게…… 오늘 처음 본 나랑 호구별성 사이에 발생한다고?

대체 왜?

“막내야.”

호구별성이 나를 불렀다.

“아니지, 이제 진짜 염라라고 불러야 하나?”

그런데 가볍게 말하는 목소리에 어째선지 감정이 묻어났다.

“별건 아니고 그냥…… 영감탱이 죽었다니까, 그 영감네 핏덩이가 눈에 밟히네.”

대왕님의 무덤 앞에서 뿜던 독기처럼.

한순간에 무척 짙고 무거워진 감정이.

“내가 옛날에 영감한테 빚을 좀 졌거든.”

독기처럼 묻어나는 축축하고 깊은 무언가.

그에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승이 망했다는 말에 찾아온 것.

무덤을 밀려던 공무원에게 제 일처럼 화를 낸 것.

내게 정말로 왕이 될 자신이 있는지 묻던 것.

“……염라, 그 영감탱이가 2만 년이면 뭐, 벌써 살 만큼 살다 갔지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꾹꾹 담아 누른 그녀의 한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자연히 흘러들어 오고 있었으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못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하긴, 내가 적적해도 새 염라 너만 하겠냐만 말이지.”

말꼬리를 흐리던 그녀가, 다시 좀 멋쩍게 웃는다.

“그냥, 옛날에 영감이 빚 갚는 셈 치고 나중에 차사나 좀 하랬거든. 귀찮아서 미뤘더니 벌써 3천 년이 되어가네.”

[ ‘호구별성’을 저승의 신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

[ 예/아니오 ]

다시 한번 팝업창이 떴다.

“어때, 너라도 나 차사 시켜줄래?”

과거의 인연에서 다시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는 창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100억도 나누면 50억이잖아.”

나는 인연의 풍문이 발생하는 조건을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때때로, 처음 만난 이에게도 강한 유대를 느낄 때가 있음은 알고 있다.

그래, 이를테면.

이제는 없는 이를 똑같이 그리워한다든가.

[ ‘호구별성’이 저승의 신이 되었습니다. ]

그래서 그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이에게 그 깊은 한을 털어놓고 싶다든가.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풍문(E)’이 완성되었습니다. ]

그러니까 이 인연은, 이제는 없는 나의 두 번째 아버지 염라의 것이다.

[ ‘3천 년 전의 약속.’ ]

- 분류 : 풍문(E)

- 인연 : 월직차사 호구별성, 염라

- 내용 : 역병의 신이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 저편의 왕을 찾았다. 그러나 왕은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녀는 홀로 남은 왕의 아들에게 약속을 지켰다. 언젠가 왕의 차사가 되겠다던.

- 효과 : (!) 해당 풍문은 인연(因緣)의 풍문입니다. 차사가 왕의 명령을 수행할 시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3천 년 전의 약속이라.

그 아득한 옛날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굳이 묻지 않고 그녀를 받아들였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인연이 정말로 나의 신화가 된다면.

***

“이야, 이게 진짜 되네!”

상태창을 확인한 호구별성이 감탄했다.

“진짜 차사라고 뜨잖아?”

이제 그녀의 공식 지위는 월직차사.

또한 저승의 새로운 으뜸차사이기도 하다.

뭐, 어차피 한 명밖에 없지만.

어쨌든 저승의 최고신인 나도 그녀의 상태창을 볼 수 있다.

[ 호구별성 (역신)(저승차사) ]

* 권능 – 독, 역병, 사후세계

* 스킬 – [L]독(lv.1), [L]역병(lv.1)

* 체력 33/33

* 근력 37/37

* 마력 31/31

* ……

“스킬도 다 레전더리네.”

하긴, 마마신 호구별성은 역신들의 왕 대별상의 딸.

말하자면 역병나라의 공주였으니까.

한반도에서 그녀보다 큰 신은 생불왕 삼신할미나 내가 모시던 저승 시왕 정도밖에 없다.

강림 형도 동격이면 동격이지 그녀를 밑에 두진 못했으니.

그래서 기존 권능도 두 개나 있던 거겠지.

이제는 저승신까지 되어 사후세계도 붙었고.

다만 레전더리라도 스킬 레벨은 아직 1이다.

이 레벨은 여러 풍문을 더해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딱 가진 마력만큼만 힘을 발휘할 테고.

“그래서,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

옆에 와서 앉은 호구별성이 물었다.

귀신 같던 검은 머리는 그새 비녀로 틀어 올렸는데, 자세히 보니 몇 가닥씩 녹색이 감돌았다.

오늘 처음 만난지라,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현대에 적응한 그녀가 멋으로 물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글쎄요. 일단 제 풍문을 완성하기 좋은 곳으로 찾고 있습니다만.”

단말기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지금 우리는 어느 한적한 버스 정류장에 단둘뿐이었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우주강도단…… 우주질서보존회가 선심 쓴다는 듯 포털을 열어준 곳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깡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놈들이 ‘헌터 전용 단말기’ 하나를 쥐여준 덕에 크게 막막하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 스마트폰을 기본으로 한 통신 단말 장치였다.

거의 50년 만에 쥐어 보는 스마트폰이었지만, 생각과 달리 헌터 시대 이후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룰 수 있었다.

……그냥 세상이 뒤집혀서 발전이 멈춘 줄 알았는데, 어쩌면 문명의 발전마저 우주질서보존회가 개입한 걸지도 모르겠다.

뭐, 그래도 2071년인데 내가 모르는 어떤 변화가 또 있을 수도 있고.

“사후세계의 왕이니까, 일단은 귀신과 관련된 풍문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죠.”

스크롤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미완성인 풍문은 어떤 효과를 가진 풍문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말 그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은 엉뚱한 풍문으로 발현되면 끝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풍문을 ‘저승왕의 신화’로 만들려면 그에 걸맞은 활약이 필요했다.

“일단 그냥 헌터인 척 의뢰를 받으면, 의뢰비도 받고 풍문도 성장시킬 수 있을 거예요.”

화가 나면 바로 독기를 뿜는 그녀가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인 것은 숨겨야 한다고 나는 거듭 강조했다.

“일하는 동안은 인간이랑 지내야 해요. 신이라고 티 내 봤자 지금은 딱히 좋을 게 없어요. 이 몸으로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고.”

“흠, 그건 나도 대충 알아. 걔들 요즘 불경한 거.”

의외로 그녀는 별생각 없다는 듯 말했다.

언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현대에 제대로 적응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최근까지도 현역이었던 강림 형보다 훨씬 나은데.

그 꼰대는 현대 이승이라면 자동차도 극혐했다고.

“……아.”

그러다가 문득, 새삼 형이 정말로 없다는 것이 되새겨졌다.

저승을 벗어난 지금 평소처럼 무심결에 떠오른 기억이, 도리어 그의 부재를 실감케 했다.

“왜? 뭐 나왔어?”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물었다.

그 물음에 퍼뜩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뇨, 잠깐 딴생각이 들어서.”

“여유 있네? 안 급한가 봐?”

어색하게 대답했더니 그녀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돌아오는 핀잔이 차라리 반가웠다.

잡생각을 지울 수 있으니까.

“죄송해요. 계속 찾아볼게요.”

안개처럼 머릿속을 메우는 감정들을 몰아내며, 나는 다시 스마트폰에 집중했다.

마침 스크롤을 내리자 바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아, 이거 괜찮아 보이네요. 귀불 퇴치 의뢰.”

마침 조건에 딱 맞는 공고.

마을에 나타난 귀불을 잡아달라는 의뢰였다.

귀불은 말 그대로 귀신 붙은 불상인데, 본체인 불상을 태우기만 해서 퇴치가 무척 간단하다.

이 의뢰를 받는다면 사후세계에 관련된 풍문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귀불도 결국 몬스터니까요. 귀불이 나타났다는 곳은 아마 던전이 되어 있을 거예요.”

보통 이렇게 생활 구역에 발생하는 던전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

이런 던전은 유니크나 에픽 등의 상위 등급이 붙지 않은 노멀 던전으로, 운이 좋으면 카르마 포인트를 10 정도 얻을 수 있다.

카르마 포인트는 시스템이 대상을 평가하는 기준인 ‘카르마’를 수치화한 것이다.

이때 카르마는 대상이 존재하면서 쌓아온 영향력, 즉 ‘업’을 가리킨다.

카르마를 수치화한 카르마 포인트에는 몇 가지 쓰임새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풍문을 상위 등급으로 성장시키는 경우였다.

“제가 가진 미완성 풍문을 완성하려면 카르마 포인트가 100이 필요해요. 이런 던전은 최소 10개를 처리해야 한단 거죠.”

“음, 빡세긴 빡세다, 야.”

호구별성이 문득 인상을 썼다.

“그 풍문인지 뭔지 키우면 좋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야 언제 강해지고 언제 100억을 벌어?”

그러더니 또 팔짱을 끼며 물어 왔다.

“그것보다 좀 더 확실한 돈벌이도 있지 않을까?”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신이면 신답게 권능을 부려야지.”

“권능이요?”

“그래, 내가 인간들한테 역병을 뿌려서 치료비를 받는 거야.”

“……!”

아, 잠깐 솔깃했다.

“그래도 제가 이제 권선과 징악의 신인데…… 그런 흉악한 방법은 좀.”

“아니지, 넌 저승의 신이잖아.”

후후 웃은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생각해 봐, 염라야. 그러다 몇 명 뒤져도 어차피 다 우리 백성들이다.”

“……!”

음, 사실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조금만 더 냉담한 성격이었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마마 권능이 그만큼 돼요?”

아니 뭐, 꼭 진짜 하겠다는 건 아니고.

일단 그녀도 전성기 힘은 없는데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물었더니 호구별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이란 결국 세상 인과의 조율이니까. 삼라만상의 저울이 기울지만 않으면 되지.”

뭔지는 몰라도 대충 신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내가 계산해 봤는데.”

그녀가 진지하게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일단 100만 명한테 설사병을 뿌리는 거야. 그래서 두당 만 원씩 받고 고쳐주면, 딱 100억이다.”

세상에.

마마신, 진짜 무서운 신이었네.

강림 형이 괜히 분기마다 역신을 경고하던 게 아니었어.

“근데 너, 나 계속 마마라고 부를 거야?”

문득 호구별성이 물었다.

“따지고 보면 마마는 염라 너잖아, 대왕마마.”

아무래도 호칭을 정리하려는지.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편한 대로 해주려니 호구별성이 눈을 빛냈다.

“너, 강림 걔도 형이라고 불렀지?”

“네, 뭐 그렇죠.”

사실 이건 우리가 정말 형제이기 때문이었다.

저승차사는 원래 염라를 진짜 아버지로 모시니까.

그러니 피는 안 섞였어도 삼백 차사는 모두 형제자매다.

애초에 몸이 없으니 피도 못 섞이지만.

“흠, 내가 강림보다 1600살밖에 안 많은데.”

그랬어?

“그럼 나도 누나라고 불러라.”

친근하게 어깨를 툭 치며 호구별성이 낄낄 웃었다.

백 살도 안 된 핏덩이한테 누나라고 불리려니까, 그새 천 살은 젊어진 기분이라나.

“그럼 나는 너를…… 그래! 전하는 어떨까?”

그러더니 그녀가 내게 새 호칭을 붙였다.

“뭔가 염라는 아직 영감탱이가 떠올라서 영 입에 안 붙는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덧붙여지는 말에, 나는 살짝 깊어지는 그녀의 눈을 못 본 척 대답했다.

“네, 누나. 그렇게 불러주세요.”

***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린 뒤, 또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어느 산속 마을.

아무리 그래도 100만 명 단위 생화학 테러는 너무한지라, 결국 귀불을 퇴치하기로 했다.

“와, 이게 다 뭐냐.”

마을 입구에서 호구별성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요즘도 이렇게 큰 장승이 다 있네.”

이를 드러내며 웃는 천하대장군과 옆에서 눈을 부라리는 지하여장군.

큰 몸으로 손님을 굽어보는 두 장군은 마을의 수호신답게 위엄이 넘쳤다.

그런데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근데 마을 이름은 딱히 없나 보네요?”

찾아오는 방법만 안내되었을 뿐, 구체적인 주소지가 없어서 좀 의아했었는데.

이 마을은 정말 이름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장승까지 세우고도 흔한 안내 팻말 하나 없는 것을 보면.

게다가 낮인데도 입구부터 좀 어두컴컴한 게, 의뢰가 아니면 딱히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게, 음침한 게 뭔 전설의 고향 같다.”

호구별성도 맞장구를 쳤다.

근데 또 ‘전설의 고향’이라니.

이 양반, 사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온 게 아닐까?

그런 고전까지 다 알고.

“아니, 저건 또 왜 저래!”

그때 불쑥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당산나무가 왜 저렇게 썩었어!”

뭔가 하니 새까맣게 죽은 나무였는데, 신이라서 그런지 신목(神木)이 방치된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

입구부터 썩은 당산나무라.

수호목이라는 위상이 무색하게 가지에 걸린 오방기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밑으로는 치우지 않은 제사상이 악취를 풍겼다.

정성껏 쌓았을 서낭당의 돌탑도 반쯤 무너져 있는 게, 확실히 저걸 그냥 방치하는 건 이상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둘러보던 호구별성도 계속 혀를 찼다.

“염병, 가만있어도 저주받게 생겼네.”

실제로도 저주받은 게 맞긴 했다.

그러니까 귀불 같은 게 생겼지.

“뭐, 일단 가 보죠. 신경을 못 쓸 정도로 큰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니까요.”

투덜대는 호구별성을 달래며 한 발 내디뎠다.

우뚝 선 장승 부부의 시선을 느끼면서.

그런데.

[ (!) 법멎믹력띤흐흐흐 ]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팝업창이 떴다.

[ (!) 법멎믹력띤흐흐흐 ]

[ (!) 법멎믹력띤흐흐흐 ]

“응? 뭐야!”

같은 게 떴는지 호구별성도 반응했다.

[ (!) 벨괵겨궉둠렸걷걍베꼐땍긱뒷뢍뱐독딩귐뤠벅 ]

[ (!) 벨괵겨궉둠렸걷걍베꼐땍긱뒷뢍뱐독딩귐뤠벅 ]

[ (!) 벨괵겨궉둠렸걷걍베꼐땍긱뒷뢍뱐독딩귐뤠벅 ]

……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상한 팝업창.

그리고.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어느 순간, 읽을 수 있는 창이 떴다.

“뭐야, 이거?”

내가 알기로 ‘지배법칙이 바뀌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였다.

“……던전?”

그래, 던전.

신화나 전설 속의 몬스터가 실체화되면서 나타나는 이공간.

“아니, ‘필드’인가?”

혹은 ‘무용담’이나 ‘영웅담’으로 만들어 낸 필드.

“마을…… 전체가?”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필드란 곧 무용담이나 영웅담으로 법칙을 바꾼 공간을 말한다.

각성자는 본인이 가진 무용담이나 영웅담으로 일정 공간의 법칙을 바꿀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보유한 ‘카르마 포인트’나 자신을 떠받드는 자들의 ‘신앙’을 소모해 그 힘을 더욱 증폭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을 전체가 필드라면 최소 영웅담…… 어쩌면 전설일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렇다기엔 ‘법칙 안내’가 없어.”

침착하게 상황을 짚어 보았다.

이 마을이 정말로 던전이나 필드라면 설정된 ‘법칙’과 ‘영향력’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팝업창만 떴을 뿐, 안내 표시는 없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헌터님이십니까!”

그때였다.

혼란한 와중에 열댓 명의 젊은 남녀가 우리를 둘러쌌다.

“와주셨군요, 헌터님!”

우리를 헌터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귀불을 잡아달라던 의뢰인들인 모양이었다.

“뭐야, 얘네 옷이 다 왜 저래?”

의뢰인들을 둘러본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얘네 다 무당이야?”

그들은 하나같이 소복 차림이었다.

특히 가운데 선 남자는 혼자만 색동옷을 입었는데, 얼굴에는 하얗게 분칠까지 해서 누가 봐도 무당 그 자체였다.

그런 차림을 하고도 서낭당은 아무렇게나 방치한 게, 되레 경계가 들 정도로 이상했다.

“헌터님, 저희 좀 도와주십시오.”

분칠남이 말했다.

“기도를 드리던 불상이 이상합니다.”

일단은 받은 의뢰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명부(L)’가 발동됩니다. ]

명부 스킬이 저절로 발동되면서 시야에 분칠남의 정보가 떴다.

또한 그 정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조금 전 왜 그런 이상한 팝업창이 떴는지 깨달았다.

그래, 그런 이유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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