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신화의 계승자(1)
“하겠습니다, 저승왕.”
어쩌면 섣부른 치기일지 모른다.
그래도 어느 쪽이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인지는 분명히 알았다.
다른 쪽을 선택하면 그 후회마저 잊게 될지라도, 내 마음은 결국 이쪽을 원했다.
때로는 편한 길보다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내게는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야, 너 자신 있냐?”
그때 가만히 듣던 호구별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권선과 징악의 신이다. 핏덩이 혼자 엉덩이 뭉갠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인간을 내려다보던 신의 눈으로, 그녀가 불쑥 내 각오를 쟀다.
“그게 안 돼서 니 애비는 매번 똑같은 놈들을 지옥으로 보냈다.”
신의 자리에서, 숙명의 무게를 물었다.
“태어나고, 어리석게 살고, 죽어서야 벌을 받고. 다시 태어나고, 또 멍청하게 살고, 또 죽어서 또 똑같은 벌을 받고. 그런 얼간이들을 자그마치 2만 년이나 지켜봤다.”
“…….”
무슨 뜻인지 알았다.
나는 이 땅에 끌려왔던 수많은 죄인을 곱씹었다.
내가 염라의 자리에 오른다 한들 그들의 행렬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벌은 결국 생이 끝나고서야 내려지는 법이며, 그 벌을 다 받고도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잊어버리고 반복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 땅의 신화가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저편마저 사라진다면, 이제 그 어리석은 삶은 대체 어떻게 책임진단 말인가.
“…….”
호구별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만 뜻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계속 내려다볼 뿐이었다.
고작 49년 차 차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변덕스러운 역신의 눈으로.
“흐음, 뭐.”
다시 입을 연 것은 구청장이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지켜보던 그녀가 사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저승 신화 인계 문서입니다.”
그러고는 정체불명의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대충 훑고 사인을 마치자 그녀는 엄숙히 선언했다.
“좋습니다. 현 시간부로 우주질서보존회는 이제연 씨를 저승 최고신으로서 우주 신화 대통합 시범 사업에 참여할 권리가 있음을 보증합니다.”
듣다 보니 좀 우스웠다.
나름 각오하고 받긴 했는데…… 뭐랄까.
해를 쏴서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고, 괴물을 잡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게 정말 신화인 걸까?
그런데 그 순간.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미완의 ‘풍문(L)’이 발생합니다. ]
뜻밖에도 팝업창이 떴다.
[ ‘새로운 왕이 탄생했으니.’ ]
- 분류 : 미완성 풍문(L)
- 내용 : 세상의 저편에서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데(……)
- 효과 : (!) 해당 풍문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 완성까지 필요 카르마 포인트 : (0/100)
“우주 신화 대통합 시범 사업에 참여하셨으니까요. 이 ‘풍문’을 한반도 유일의 ‘신화’로 키워내시면 일차적으로 승리하시는 겁니다.”
구청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풍문을 키운다는 것.
헌터 출신 차사인 만큼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이 시대의 헌터들은 간혹 낮은 확률로 ‘풍문’이라는 것을 얻는다.
풍문이란 헌터들의 업적을 시스템이 정립하여 가시화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고블린을 특히 많이 잡다 보면 고블린을 상대로 능력치가 오르는 ‘고블린 사냥꾼’ 따위의 풍문을 얻는 식이다.
요컨대 무언가를 이뤄 내면 이름값이 높아지듯, 던전을 돌고 다른 헌터를 쓰러트리는 등의 업적이 풍문으로 남으면 그에 따라 영구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풍문은 스킬과 유사하다.
단, ‘스킬’이 각성자의 특성에 따라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풍문’은 업적에 따라 후천적으로 생겨나며 더 강력하게 진화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풍문의 급이다.
일반적인 풍문은 대부분 노멀(N) 등급이라 진화할 수 없다.
그러나 유니크(U)나 에픽(E)이 붙은 풍문은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무용담(U)이나 영웅담(E)으로 변할 수 있다.
따라서 무용담이나 영웅담을 갖춘 헌터들은 아주 드물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영웅담을 넘어 전설로 진화 가능한 레전더리(L) 등급의 풍문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들어온 게 소문의 레전더리 등급 풍문이었다.
더군다나 풍문의 끝은 전설이 아니었다.
“‘풍문’의 최종형이 ‘신화’였군요?”
기존에 전해지던 신화와는 다른, 누군가의 업적으로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신화.
풍문을 무용담, 영웅담, 전설로 성장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신화화하는 게 이 사업의 진짜 목표였던 것이다.
“네, 그런데 신화는커녕 전설조차도 아직 아홉 개뿐이죠. 아무래도 사업이라는 게 저희 뜻대로 되지만은 않더군요.”
……그렇군.
저승이 문을 닫은 동안 그래도 ‘전설’은 몇 개 나온 모양이지?
새삼 내가 이승을 잘 모른다는 게 실감됐다.
20년 전 대별왕의 실종 이후, 우리 대왕님께서 아예 이승 출입을 금지하셨기 때문이다.
하기야,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인데.
나가면 이승의 정세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우선 그 풍문을 전설로 만드셔야 합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선생님의 전설이 나머지 아홉 개의 전설을 꺾고 한반도의 유일한 전설이 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한반도의 신화가 될 것입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내 풍문은 전설까지 성장하는 레전더리(L).
무용담이 되는 유니크(U)나 영웅담이 되는 에픽(E)도 귀한 마당에 진짜 ‘신화’로 키울 수 있는 풍문이라니, 이건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예, 된 것 같군요.”
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그러더니 불쑥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세금 준비하시죠.”
……응?
“정식으로 우주 신화 대통합 시범 사업의 대상자가 되셨으니 참여세를 납부하셔야지요.”
뭐라고?
“선생님의 사정을 고려하여 3주의 유예 기간을 드리겠습니다.”
“잠깐만요, 세금이라뇨? 뜬금없이?”
어이없어 말을 끊었더니, 구청장이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우주질서보존회가 방금 선생님의 신권(神權)을 인정해 드렸잖습니까.”
그러더니 아주 당당히 소리쳤다.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법입니다. 아무리 미개한 지구라도 그건 배울 텐데요!”
이씨, 얻다 대고 선생질이야!
“아니, 댁들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세금을 냅니까!”
울컥해서 따졌더니 구청장이 근엄하게 가슴을 폈다.
“나라에 살면 나라에! 우주에 살면 우주에 세금을 내는 겁니다!”
와, 뭔가 진짜 짜증 나네.
“그래서 세금이 얼만데요?”
분하지만 일단 넘어가자.
70년을 살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우주공무원이다만.
어느 날 갑자기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상대로 나 같은 약소 신이 뭐 어쩌겠는가.
“기다려주시죠.”
구청장이 또 어딘가에서 계산기를 꺼내 보였다.
“흠, 저승 신화에 쌓인 카르마에 따르면.”
자판을 두드리던 그녀가 말했다.
“1억 우주화로군요.”
“1억?!”
기막힌 금액에 비명이 터졌다.
“3주 안에 1억 원이요?!”
황당했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금방 침착해질 수 있었다.
1억은 분명 큰돈이다.
하지만 한 번에 몇 억씩 벌곤 하는 게 바로 헌터 아닌가.
내가 가진 풍문을 성장시키면 1억 정도는 어떻게든, 아니, 솔직히 1억은 우습게…….
“아뇨, 선생님. 1억 우주화입니다.”
그때 구청장이 정정했다.
“우주화요?”
“우주질서보존회에서 새로 통용한 지구 공용 화폐죠.”
이름 구려!
“환율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은 원화 기준 백 배 정도군요.”
“백 배요?”
잠깐, 그럼 1억 우주화를 원화로 환산하면.
“100억?!”
충격적인 금액에 다시금 비명이 터졌다.
“아니, 3주 만에 100억을 어떻게 만듭니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항변했다.
“그거야 선생님 사정이시고요.”
그러든 말든, 구청장은 뻔뻔하게 덧붙였다.
“기한 내로 세금을 납부하지 못했을 시, 우주질서보존회는 이제연 씨의 최고신 자격을 박탈함과 함께 저승은 우주질서보존회의 소유가 될 것을 미리 고지합니다.”
“야, 이 우주 양아치들아!!!”
결국 나는 폭발했다.
“당신들, 처음부터 나한테 저승 넘길 생각 없었지!”
이제야 불도저가 먼저 들이닥친 게 이해됐다.
어쩐지 철거부터 밀어붙이더라니, 애초에 저승을 내줄 생각이 없던 거다!
그냥 세금 핑계로 뺏어버리면 되니까!
처음부터 강제합병이었다고!
“두고 보자, 이 우주강도단!”
***
잠시 뒤.
나는 100억을 벌기 위해 이승에 나왔다.
저승이 닫힌 후 무려 20년 만의 이승이었지만, 감회에 젖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 이제연 (염라) ]
* 권능 – 권선, 징악, 죽음, 사후세계
* 스킬 – [L]명부, [L]도산지옥(비활성), [L]화탕지옥(비활성), [L]한빙지옥(비활성)
* 체력 9/9
* 근력 9/9
* 마력 10/10
* ……
49년 만에 열어본 내 상태창이, 정말이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10을 넘는 스탯이 하나도 없다니!”
평균 스탯이 10을 넘지 않는다는 건,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이라는 뜻이었다.
“이 자식들, 이런 쓰레기를 몸이라고 줘?”
지금 나는 우주질서보존회가 만든 가짜 몸에 빙의한 채였다.
가짜 몸.
공식 명칭은 반영구 빙의체.
우주질서보존회가 인간을 본 따 만든 생체 아이템이다.
헌터가 스탯을 올리듯, 신도 가짜 몸의 스탯을 올리면 강해진다.
인간처럼 시스템의 힘으로 성장하라는 얘기다.
그런데 가짜 몸이 치명상을 입어 기능이 정지되면 빙의한 신까지 소멸한다.
그러니 몸이 치명상을 입으면 신은 빨리 몸에서 나와야 한다.
인간과 달리 신은 영체로도 존재할 수 있으니까.
그나마 몸이 죽기 전에 영체로 탈출할 수 있는 게, 신의 특권이라면 특권인데.
이런 조건에 굳이 하찮은 몸을 줬다는 건.
“이거 그냥 죽으라는 거지?”
100억을 벌어오라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유리 몸에 빙의하라니.
약한 몸은 죽기 쉽고, 영체로 살아남더라도 그 상태로는 돈을 벌 수 없다.
……결국 우주강도단의 목적은 저승이 분명했다.
유일한 상속자인 내가 죽어서 회수하든가, 100억을 못 냈다고 빼앗든가.
“젠장, 더러운 놈들.”
인상을 쓰며 상태창을 살폈다.
그런데 몸이 허접한 것치곤 이상한 게 있었다.
우선 권능이 무려 네 개였다.
-권선
-징악
-죽음
-사후세계
권능은 자체로 특수 능력을 주기도 하고, 스킬 효과를 증폭시키기도 하며, 권능과 권능을 섞어 아예 새로운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헌터들은 보통 각성한 순간 한 개의 권능을 랜덤으로 얻는다.
그 외에 다른 권능을 얻는 것은 정말 무지하게 힘들다.
‘권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목숨 건 시련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권능이 무려 네 개.
물론 전부 염라의 이름에 걸맞는 권능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네 개나 되는 권능은 절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스킬도 레전더리(L)급이란 말이지.”
아직 비활성이긴 하지만, 어쨌든 시왕지옥의 이름을 딴 스킬들이 전부 L급.
거기에 영혼을 읽을 수 있다는 ‘명부’ 스킬마저 L급이었다.
유니크(U)나 에픽(E) 스킬도 드문 마당에 모든 스킬이 레전더리(L)라는 건 분명 엄청난 일이었다.
“놈들이 정말로 내가 죽길 바란다면, 왜 굳이 이렇게 한 거지?”
분명, 내가 빙의한 몸은 쓰레기였다.
하지만 헌터의 능력이란 꼭 스탯에만 비례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스탯은 최고치인 100을 찍으면 다 똑같으니까.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풍문’을 가졌느냐이며, 풍문의 위력은 권능과 스킬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L급 풍문을 가진 내가 네 개의 권능과 L급 스킬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헌터들과는 비교도 안 될 가능성을 가졌다는 뜻.
“어쩌면 정말로, 내가 진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엔 또 100억이라는 터무니없는 세금과 쓰레기 몸이 너무 악의적이니까.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놈들은.
“……그런데.”
상태창을 살핀 뒤, 나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마마는 계속 거기 계실 거예요?”
안 그래도 신경줄이 타는 마당에, 호구별성, 그 변덕쟁이 역신이 날 따라왔기 때문이다.
“으음, 글쎄.”
눈이 마주친 호구별성이 나를 훑었다.
“야, 근데 너 진짜 일찍 죽었다.”
묻는 말에 대답 없이, 엉뚱한 말을 꺼내면서.
“아니, 아까 거적때기 입고 있을 땐 몰랐는데.”
“……거적때기.”
아마 차사들의 상징, 검은 두루마기와 갓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 나는 현신하면서 현대 이승에 맞게 갈아입은 상태였으니까.
뭐, 원래도 상투는 불편해서 머리야 짧긴 했다만.
“니네 유니폼 구리잖아.”
“……유니폼.”
근데 저런 말은 어디서 배웠대?
분명 예전에 사라졌댔는데.
이제 보니 그녀는 화려하게 수놓인 저고리와 붉은 치마 아래로, 발목을 덮는 검은색 캔버스화까지 신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현대에 제법 잘 적응한 것 같단 말이지.
“근데 그 머리는 강림 그놈이 뭐라고 안 하디?”
“아.”
그 말에 괜히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이게 한반도 토종치고 색도 옅은 데다가 길이가 짧아 상투도 못 틀었다 보니…… 강림 형이 처음에는 꼬라지가 그게 뭐냐고, 차사가 감히 염색을 한 거냐고 엄청 갈궜지.
“암튼 요즘 애들처럼 입으니까 또 다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가 묻는다.
“약관은 돼서 죽었냐, 너?”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스물한 살에 죽었으니 그것보단 좀 더 살긴 했지.
나는 그냥 멋쩍게 웃었다.
“좀 아깝다. 곱상한 게 한 2~3년 더 살았으면 딱 좋았을 텐데.”
“…….”
“뭐, 나름 소년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
“하긴. 죽은 놈들도 눈이 있으면 탱탱한 새 염라가 좋을 거야, 그치?”
“…….”
듣다 보니 뭔가 민망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저한테 뭐 볼일 있으세요?”
아니, 뭐…… 딱히 잘생겼다고 해 줘서 경계가 풀린 건 아니고.
“볼일이라.”
호구별성이 뜻밖에도 옅게 웃었다.
“글쎄, 뭐, 볼일이라면 볼일이겠지.”
어째서인지…… 한순간에 무척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 되어서.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미완의 ‘풍문(E)’이 발생합니다. ]
그때 난데없이 팝업창이 떴다.
그것도 무려 에픽급 풍문의 알림이었다.
“뭐야, 이거?”
나는 새 풍문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풍문은 지금으로선 절대 생길 수 없는 풍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