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터널 같은 입구에서 두호가 걸어 나온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쉐도잉을 하며 입장하는 두호.
영화에서 허세라고 생각한 이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경기에 돌입하기 직전까지 몸을 예열해놓는 것.
이완된 근섬유들과 뼈에서 진짜 자신의 퍼포먼스가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도전자 두호를 반겼다.
“코리안 몬스터! 다 왔어!”
“손만 뻗으면 된다. 저 재미없는 놈 찢어 발겨버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응원을 던지며 두호를 격려했다.
두호가 묵묵히 자신의 몸을 풀며 입장하는 그 순간 함성 같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오오오오오
승리를 위하여
오오오오오
그대와 함께 가리라
대한민국 대표 응원가가 미국 프로 스포츠의 중심 A&T 아레나에서 울려 퍼진다.
후드를 뒤집어쓴 두호가 고개를 들어 한 곳을 바라본다.
철 지난 붉은 악마 티셔츠를 맞춰 입은 동양인들이 보인다.
이들의 정체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이다.
그들은 두호를 벅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타향살이.
간혹 K-POP이 세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프로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이다.
몇 명의 걸출한 선수들이 거쳐가지만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새롭게 맞이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외로운 타향살이를 위로해주며 자랑스러운 한 명의 동포를.
두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심판의 앞에 섰다.
평소처럼 바셀린을 눈가에 바르고 글러브를 점검 받는다.
팀 코리안 몬스터와 파이트 매니아 동료들과 포옹한 뒤 케이지 계단 앞에 선다.
일곱 번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서서
끝까지 싸워 가리다.
오오오오오
승리를 위하여
오오오오오
그대와 함께 가리라
두호는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계단을 올라간다.
단순히 자신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자신을 응원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이 어깨에 걸린 것이다.
두호는 양팔을 하늘로 뻗어 보인다.
“으라차차!”
큰 기합 소리와 함께 케이지 철창을 강하게 치고 입장하는 두호.
관객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의 도전이 성공하기를 바랬다.
“다음은 미들급의 철혈군주. 챔피언 RKO 알도프 코와르키 입니다!”
두호가 입장을 마치자 다시 A&T 아레나는 암전된다.
특유의 강렬한 전자음악 소리와 붉은 조명이 입장 터널을 비추며 알도프가 걸어나온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니엘을 비롯하여 골드 스피릿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주 보이던 경호원들도 오늘은 없었다.
두호의 팀원들은 그 이유를 알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관중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리친다.
“이건 뭐야?”
“알도프는 왜 혼자 나오냐! 세컨은 어디 간거야?”
주위 사람 모두가 그를 떠나갔고 그를 버렸다.
그 원인은 온전히 알도프에게 있었다.
챔피언 가운을 뒤집어 쓴 채 묵묵히 걸어나오는 알도프.
그러나 그가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머리에 뒤집어 쓴 모자를 치운다.
평소와 같은 헤어스타일과 컨디션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달라진 그의 눈빛.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담긴 듯했다.
그와 눈빛만 마주치더라도 일반인들은 몸을 부르르 떨 정도의 독기.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가는 게 인생 아니겠어?’
그의 눈빛이 카메라에 담겨 전광판으로 송출된다.
사람들은 그의 눈빛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다 이내 열렬히 환호한다.
“가자고 챔피언! 너가 왜 왕으로 군림했는지 보여줘!”
“알도프. 오늘 진짜 백두호 죽이려 나왔구나!”
사자같은 걸음걸이로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알도프.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 왕의 길은 언제나 외로운 법이지.’
그 모습을 보며 레이첼은 인정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챔피언은 챔피언이다. 이건가?’
물론 케이지에서는 언제나 일대일이다.
그렇다 해도 케이지에 들어서기까지와 경기 중 휴식 시간은 팀 동료들의 시간이다.
혼자서 견뎌내기엔 너무나 외롭고 고독한 시간.
그러나 알도프는 필요없다는 듯 혼자서 입장하기로 한 것이다.
레이첼은 그런 그에게 나중에 형평성 문제로 이슈가 될 수 있으니 직원 3명을 경기 중 세컨으로 지원했다.
닥터 한 명과 물리 치료사 두 명.
철혈 군주라고 불리는 챔피언 알도프에게는 너무나 간소한 인원들이다.
알도프가 입고 온 챔피언 가운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는 심판에게 두호와 똑같이 점검을 받는다.
점검을 마친 알도프가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라간다.
‘죽인다. 죽인다.’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섬뜩한 말을 되뇌이며 들어서는 케이지.
두호와 눈이 마주친다.
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두호의 눈빛.
불같이 타오르는 알도프의 눈빛.
상반되는 두 사람의 눈빛이 케이지의 중앙에서 얽힌다.
심판이 케이지의 중앙으로 걸어가며 외친다.
“라인업!”
두호와 알도프가 링 중앙에서 만났고 심판의 룰 설명이 이어진다.
서로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성한 곳이 없었다.
두 사람 다 이곳에 올라온 것이 기적인 것 같은 모양새.
알도프가 싸늘한 표정으로 두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너를 잡아 죽일 수 있구나.”
“나 역시 마찬가지.”
“그거 하나만 약속하자.”
알도프의 쌩뚱맞은 부탁에 두호는 눈을 좁혔다.
“여기서 누가 이기고 지든. 링 밖에서 한 번 더 만나기로.”
그의 말을 들은 두호가 피식하고 웃었다.
링 밖에서 만나자.
스포츠룰을 통해 이곳에서 싸우고 생사결(生死結)은 밖에서 치루자는 것.
그것은 어떻게든 두호를 죽이겠다는 선전포고.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바라는 바였다.
“좋다.”
때마침 룰 설명이 끝난 심판이 각자의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훽하니 몸을 돌리는 두 사람.
-역시나 터치 글러브는 없습니다. 페이스오프 때와 같이 존중 없이 시작하는 두 사람의 경기!
심판이 알도프를 바라본다.
“레디?”
알도프가 손을 살짝 들어 보인다.
“레디?”
두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심판의 손이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세상을 반으로 가를 듯 강하게 손이 떨어진다.
“파이트!”
-경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로 역사적인 경기를 치루는 두 사람을 응원한다.
거리를 조이며 링 중앙으로 걸어가는 두호와 알도프.
두 사람 모두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망설임 없이 다가간다.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던 걸음과 달리 두 사람은 가만히 멈춰선다.
시선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스텝조차 밟지 않으며 굳어버린다.
두호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자 알도프 역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뺀다.
마치 뱀 두 마리가 서로를 따라하는 듯 두 사람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예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탁현에게 묻는다.
“탐색전인가요?”
탁현은 눈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겁니다.”
그 간의 거리 싸움과는 궤를 달리했다.
마치 거울처럼 같은 행동을 취해서 거리를 파악할 단서 하나 안주겠다는 의도.
더군다나 스텝도 밟지 않는 것은 자신이 가져온 전략을 극도로 숨기겠다는 의미였다.
순간 두호의 앞 발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며 더블잽을 찌른다.
후웅!
섬전처럼 빠른 속도였지만 알도프는 고개를 젖혀 피해낸다.
이내 물 흐르듯 카운터 훅으로 맞춰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나간 팔을 곧바로 회수하여 귀 옆으로 붙인 두호의 가드에 훅이 막힌다.
퍼엉!
이윽고 두호는 곧바로 중심축을 뒷발로 바꿔 창같은 뒷손 스트레이트를 찔러넣는다.
이번에도 알도프는 번개 같은 위빙으로 그의 주먹을 흘려내며 다시 한번 더 어퍼컷을 올린다.
휘잉!
두호 역시 지지 않고 고개를 젖혀 피해내며 순식간에 공방이 끝난다.
두 사람 모두 망설임 없이 거리를 벌리며 탐색전을 재차 시도한다.
사람들은 입을 벌리며 두 사람이 보이는 경기 수준에 놀라워했다.
엄청난 속도와 동체시력.
혼란스러운 틈에서도 가장 완벽한 카운터를 선택하는 능력.
그러나 그 모든 수 싸움에서 정타는 없었다.
“이런 싸움 본 적 있어? 난 없어!”
“이게 진짜 신선놀음이구나...”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경기를 지켜본다.
예수는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이네요.”
그러나 탁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번 공방은 두호씨가 조금 손해를 봤군요.”
“네? 분명히 정타는 없었잖아요.”
“닿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거리감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눈대중은 물론 스텝으로 몇 발자국 밖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거리재기는 선수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방법에는 한가지 전제가 붙는다.
닿아야 한다는 것.
자신의 공격이 상대에게 닿았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비교하며 조금씩 거리를 알아갈 수 있다.
알도프는 닿았고 두호는 닿지 못했다.
이제부터 알도프는 수십 가지의 공격을 취해보며 조금씩 두호와의 거리감을 확신할 것이다.
그 말에 반증이라도 하듯 알도프가 자세를 바꾼다.
중심을 낮추고 발 사이의 간격을 살짝 줄인다.
빠른 공격을 위한 자세가 아니라 언제든 방어와 반격이 가능한 자세로 바뀐 것이다.
공격 하나하나씩 신중하게 맞춰가며 거리를 잡아가겠다는 의도.
그의 성격과는 상반되는 경이로운 운영능력이었다.
알도프가 앞 잽을 짧게 쳐본다.
두호는 피하지 않고 나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받아버린다.
팔을 뻗어 주먹을 먼저 받아버리면 상대는 정확한 거리감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거리감을 확인하려는 알도프의 전략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의지표명이다.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전보다 더욱 긴 잽을 뻗어보는 알도프.
그러나 이번에는 두호가 스텝을 한쪽으로 물러서며 그의 앞발을 노린 듯 로우킥을 찬다.
알도프는 슬쩍 다리를 뒤로 물리며 피해버리자 두호의 발이 아쉽게도 허공을 가른다.
숨이 턱 막힐듯한 긴장감과 수 싸움.
데이비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쉽지 않겠군요.”
탁현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타격 공방은 계속되었다.
눈으로 쫓기 힘든 손과 발의 속도.
저들은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하고 어떻게 피해내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두 사람이 미리 합을 맞춰놓고 시합을 진행한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도프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앞 발 페이크 주고. 나오는 펀치 따라들어가면서 왼뺨...’
두호는 크게 고개를 뒤로 젖히지만 눈은 알도프에게 고정되어있었다.
‘하체 킥이 너무 얕게 들어온다. 펀치가 들어오겠군. 그대로 받아칠 준비를 해야돼.’
서로의 노림수를 노리는 두 사람의 엄청난 수 싸움.
하지만 두호는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조금이지만 밀리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허공을 가른다고 동수(同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모든 공방전은 알도프에게는 데이터가 되어주지만 자신에게는 그저 체력낭비일 뿐이다.
이 흐름을 바꿔야 한다.
알도프의 펀치가 턱을 향해서 밀고 올라온다.
두호가 몸을 살짝 들어 턱 대신 어깨를 내준다.
‘지금!’
두호가 받아낸 왼쪽 팔을 그대로 뻗어 비어있는 알도프의 오른뺨을 노린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펀치.
하지만 알도프는 미소 지었다.
자세를 완전히 낮추어 고개를 뒤로 젖히듯 무게중심을 옮긴다.
이윽고 불가능할 것 같은 각도의 킥이 두호를 향해 날아간다.
두호의 왼뺨에 꽂히는 그림 같은 하이킥.
큰 공격을 허용한 두호가 비틀거리듯 땅으로 쓰러진다.
사람들 역시 놀란 듯 탄성이 흘러나온다.
알도프가 재빠르게 달려들려는 그 순간.
-때애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