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미주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금 XFC 최초 라스베이거스 A&T 아레나에서 열리는 ‘XFC 4년에 한 번 오는 날’을 중계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A&T 아레나.
미국의 주류 메이저 스포츠를 상징하는 경기장으로써 한국에서는 장충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다만 그 권위와 위상은 비교가 불가할 정도이다.
미국의 슈퍼볼.
WBA 메인 타이틀전.
메이저리그 플레이오프.
이러한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경기쯤 되어야 개최와 대관이 가능한 곳인데, MMA 역사 최초로 A&T에서 개최가 된 것이다.
단순히 폭력으로 치부됐던 MMA가 거대 메이저 스포츠 산업으로써 인정을 받게 된 셈이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굉장히 격앙된 표정이었다.
“지금껏 동양인은 세계의 벽을 넘지 못한 체 번번히 프로 투기 종목에서 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4년에 단 한 번 오는 오늘!”
카메라의 앵글이 A&T 아레나의 벽에 붙은 대형 현수막을 비춘다.
그곳에는 서로를 마주 본 체 싸늘한 시선을 던지는 두호와 알도프가 있었다.
“그 길고 긴 시간 속에서 대한민국 최초. 아시아인 최초. 동양인 최초로!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에 도전하는 코리안 몬스터 백두호 선수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페이스 오프를 진행하는 오늘 입장을 기다리던 관객들이 미주의 목소리를 듣고는 환호성을 내지른다.
“코리안 몬스터! 한번 가보자고!”
“역사에 남아야 진짜 전설 아니겠어?”
“알도프 저 재미없는 새끼 짓밟고 너가 진짜 미들급의 왕이라는 걸 보여줘!”
전 세계의 다양한 인종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사람들.
이번 페이퍼뷰는 150만장을 넘기며 최고의 흥행을 만들었다.
그들의 어깨는 두호를 응원하기 위한 태극기와 굿즈들이 여럿 보인다.
간간히 보이는 붉은 악마의 옷들.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 교민들 역시 두호를 응원하려 온 것이다.
미주는 그들의 응원에 자신 역시 흥분되었음을 느낀 듯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가 이 패권에 도전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년.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낙오되었던 어두운 시절을 딛고 일어나 어느덧 전 세계에 수많은 젊음들의 희망이 되어있는 백두호 선수는 과연 자신의 가치를 한 번 더 증명할 수 있을까요!”
가슴이 웅장해지는 발언들의 연속.
미주의 말은 주위 관객들을 몰입시켰고 미주는 손을 번쩍 들었다.
마치 경기 전 팀 코리안 몬스터의 응원과 닮아있는 모습.
갈라지는 목소리로 크게 외치는 미주.
“코리안 몬스터!”
사람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함께 외쳤다.
“화이팅!”
A&T 아레나는 엄청난 긴장감이 맴돌았다.
***
진행 요원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준비 되었습니까? 코리안 몬스터 팀?”
수염이 잔뜩 자란 탁현이 거울 앞에서 수건을 뒤집어 쓴 채 앉아있는 두호를 바라본다.
“두호씨?”
“가시죠.”
두호는 수건을 벗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기실 안에 있던 팀 코리안 몬스터와 파이트 매니아 직원들이 따라 일어선다.
두호가 그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탁현과 데이비드가 그의 뒤를 따라나선다.
“가봅시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수 많은 카메라맨들이 셔터음과 플래쉬를 터트린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두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지금 이 길을 이런 기분으로 걷기를 원치 않았는데.’
두호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본다.
수많은 팬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자신에게 소리친다.
“두호형! 나 진짜 원래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려 했는데 형 도전 보고 진짜 용기내서 살아!”
“코리안 몬스터! 이혼하고 도박 빚 때문에 망가진 내 인생. 너 보면서 청소부 일부터 다시 시작했다!”
각자가 자신의 사연을 언급하며 두호를 응원한다.
두호는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외로운 줄 알았지만 아니었구나.’
팬들이 너무나 과열 양상을 띄며 두호에게 달려들자 누군가 막아선다.
영철과 찰리 팀 멤버들이었다.
“더 이상의 접근은 안 됩니다. 선수분의 안전을 위해서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시죠.”
영철이 살짝 눈을 찡긋하며 두호가 걸어갈 길을 터준다.
XFC와의 직접계약으로 이번 경기가 끝나는 동안 두호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이다.
찰리팀의 인원은 평소와 달리 숫자가 줄어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포그스컬스와 쉼없이 교전과 전투를 벌이며 3명이 부상 1명이 사망을 하였다.
그만큼 이번 경기는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 모두에게 치열한 싸움이었다.
큰 반원 모양의 입구를 들어서자 앤드류가 큰 목소리로 외친다.
- 미들급의 도전자 코리안 몬스터 백두호 선수입니다!
두호는 팔을 번쩍 쳐들어올리며 계체량이 진행되는 단상 위로 올라선다.
무대에서는 레이첼이 미소를 지으며 두호를 반겼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마치 폭포가 떨어지듯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컨디션은 어떠세요?”
“베스트입니다.”
“좋네요.”
두호는 그녀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계체량을 봐주러 온 팬들에게 손을 흔든다.
이윽고 망설임 없이 웃옷을 벗어 던진다.
사람들은 두호의 몸을 보며 탄성을 자아낸다.
“와...”
그리스의 예술품처럼 완벽히 조각된 몸.
두꺼운 흉통과 떡 벌어진 어깨.
자신이 어떤 훈련을 하고 왔는지 증명이라도 하듯 날이 서 있는 몸이었다.
체중계 위로 올라선 두호가 말없이 자신의 몸무게를 바라본다.
이내 씨익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 하나를 편다.
- 183lb로 백두호 선수가 계약 체중을 통과했음을 알립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두호의 이름을 연호한다.
“백두호! 백두호!”
두호가 단상에서 내려와 한쪽 자리로 비켜서자 이윽고 모든 장내의 불이 꺼진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일렉기타 소리가 들려오며 이내 하드메탈음악이 들려온다.
이윽고 빨간 레이저 조명 만이 두호가 들어섰던 반원형 입구를 향해 쏘아졌다.
붉은 불기둥이 솟아오르며 그 사이에서 선글라스를 낀 알도프가 걸어 나온다.
슬릭백 머리로 완전히 뒤로 넘긴 머리.
하와이언 셔츠를 입었지만 단추를 모두 풀어 맨몸이 드러난다.
그의 뒤로 다니엘과 볼레로.
그리고 포그스컬스들의 멤버들이 따라 들어왔다.
- 미들급의 철혈군주 알도프 코와르키 선수입니다!
미들급의 제왕이라고 불린 알도프답게 팬들 역시 엄청났다.
“알도프. 은퇴전에 애송이 잡아먹고 몸보신하게?”
“왕의 자리를 3년이나 지킨 너의 노하우 좀 알려줘라!”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며 여유롭게 단상을 올라오는 알도프.
그는 마치 춤을 추듯 스텝을 이리저리 옮기며 장난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이윽고 레이첼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자 여유롭게 손을 잡는다.
앙숙이라고 불릴만하지만 이 정도의 비즈니스 웃음은 가벼운 두 사람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알도프.”
“반갑습니다. 미스 레이첼.”
사무적인 인사를 마친 알도프는 셔츠를 벗으며 체중계를 향해 걸어간다.
그의 몸이 드러난다.
두호와 비교할지라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몸.
오히려 팔뚝의 두께는 알도프가 더욱 두꺼웠다.
그리고 두호의 몸에 난 상처쯤은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그의 몸.
자신이 어떤 지옥에서 살아남아 이곳까지 왔는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체중계를 바라보던 그가 괴성을 지르며 박장대소를 한다.
“으아아아!”
광기가 가득한 눈동자.
어쩌면 안일함에 질렸던 팬들은 알도프의 이런 모습을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앤드류가 미소를 지으며 크게 소리친다.
- 183lb로 알도프 코와르키 선수가 계약체중을 통과했음을 알립니다!
망설임없이 체중계를 내려온 그가 두호의 앞으로 걸어간다.
거침없이 걸어간 그는 가슴팍을 들이밀며 두호의 이마에 박치기를 하듯 이마를 맞댄다.
순식간에 벌어진 몸싸움에 앤드류가 황급히 떼어놓으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나 두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일말의 감정 동요없이 그저 싸늘하게 바라본다.
두호와 알도프 뿐만이 아니었다.
영철과 볼레로의 눈이 마주친다.
서로의 형제들과 팀원 수백을 죽인 원수.
다니엘과 데이비드도 눈이 마주친다.
모든 원수지간이 이렇게 모인 것은 아마도 운명일 것이다.
앤드류가 좋은 웃음으로 두 사람을 겨우 떼어놓자 알도프에게 다가간다.
“알도프씨. 이번...”
알도프가 훽하니 앤드류가 쥔 마이크를 뺏어간다.
“어이 원숭이 새끼야.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네? 그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주지.”
그는 땅에다 침을 한번 탁 뱉으면서 두호를 비웃는다.
“그렇게 죽고 싶다니까 내가 소원은 들어주지. 네 목을 닭모가지처럼 비틀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앞에 걸어두마.”
이윽고 마이크를 앤드류에게 거치지 않고 두호에게 던진다.
두호가 한 손으로 척하니 마이크를 받아든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어야지.”
순간 장내가 모두 조용해졌다.
두호는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알도프를 바라본다.
“네가 지금 나를 만난 건. 그 수많은 기회를 실패했기 때문이야.”
알도프는 눈을 좁혀 두호를 바라보았고 두호가 씨익 웃는다.
“그래서 넌 죽을 거야. 내 손에.”
평소와 같지 않게 원색적인 도발을 날린 두호가 마이크를 앤드류에게 전달하고는 몸을 돌린다.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환호성.
알도프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고 볼레로에게 무엇인가 귓속말을 한다.
다니엘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으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
늦은 저녁 호텔로 돌아온 코리안 몬스터 팀.
데이비드는 기분이 좋은 듯 큰 목소리로 웃었다.
“두호씨 아주 입 그래플링이 수준급이던데요! 천하의 알도프가 한 마디도 못하는 꼴이란.”
탁현 역시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한국 무대에서 두호씨한테 한 방 먹은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두호는 그저 옅은 미소를 띄우며 차분히 회복을 하고 있었다.
열량이 많은 음식과 소화가 빠른 음식을 섭취하며 체중을 회복 중인 두호.
영철과 찰리팀 멤버들도 함께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경기 전날에는 팀원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접촉하지 않는 게 업계 관례이다.
데이비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한다.
“누구지?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로 알도프의 코치인 다니엘이었다.
정체를 확인한 데이비드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는다.
“여긴 뭐 하러 왔어 다니엘?”
순식간에 날선 말투로 돌변한 데이비드를 보며 탁현이 그를 만류한다.
다니엘이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두호에게 다가간다.
이번엔 탁현이 그를 막아섰다.
“경기 전날 상대 선수와의 접촉은 삼가주셔야 하는데요.”
“할 말이 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두호의 앞자리에 앉은 다니엘.
두호가 그를 보며 싱긋 미소 짓는다.
“저를 보러 오신 겁니까?”
“네. 드릴 말이...아니 꼭 전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앞에 있는 물병을 집어든다.
하지만 손이 심하게 떨리자 두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알도프가 병원에 있는 당신의 동료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영철과 찰리팀이 반사적으로 일어났고 탁현과 데이비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호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