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레이첼은 두호의 말에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준비할 시간이 많다는 것은 곧 공격을 당할 틈이 많아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 할지라도 일찍 승부를 거는 것이 곧 유리해진다는 말과는 다르다.
“두호씨.”
“네. 레이첼.”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기회는 단 한 번 뿐입니다.”
“충분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알도프는 부상 중 일테니까요.”
레이첼은 두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오늘 알도프의 기자회견이 잡혀있다.
만약 그가 부상을 입었다면 기자회견은 취소가 됐을텐데 두호는 그가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것인가.
“정확한 정보가 있는 겁니까?”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인연이 닿아있는 PMC가 있습니다. 혹시 알도프의 친형이 유명한 해적 출신의 카르텔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레이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앉아 있다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소식들.
알도프의 배짱과 건방짐의 근원이 그 형의 존재로 인한 것이란걸 알고 있다.
“네. 하지만 지금은 인터폴과 미국연방에서 쫓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그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가 말하는 PMC 사람들입니다. 아마 그들의 정보가 제일 정확할 겁니다.”
레이첼의 눈이 좁혀진다.
어떻게 이제 갓 21살이 된 소년에게 그런 인맥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알도프의 형은 얼마 전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남은 잔당들은 알도프의 옆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그 과정중에 알도프와도 싸움이 있었습니다. 케이지 안처럼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도 아닐테니 필히 부상이 있을 겁니다.”
사실 알도프의 부상 내역은 두호 역시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자신은 래진을 안다.
알도프의 실력이 정점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상처 없이 래진을 이길 수가 없다.
전대의 거물이라는 호칭은 용병 바닥에서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네. 시간이 길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알도프의 몸 상태는 회복될 것이고 그들의 부하는 알도프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더욱 저희들을 노릴 테니까요.”
자신의 부상은 상관없다.
어찌 유리한 싸움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공격을 당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 시합을 앞당겨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당장 그 알도프의 목을 따버리고 싶다.
두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첼을 바라본다.
“경기 날짜는 2월 초로 제안 드립니다.”
“흠...”
레이첼이 캘린더를 잠시 바라본다.
이윽고 옅은 미소를 띄운다.
다시 없을 기회. 몇 년 안에 다시 없을 라이벌 구도. 성전(????戰)을 방불케 하는 열정적인 양측 팬들.
두호를 바라보는 레이첼은 어깨를 으쓱한다.
“2월 29일로 하시죠. 4년에 한 번 오는 달.”
두호는 레이첼의 말에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케팅을 기획하기도 쉽고. 저희 역시 무대를 마련하는데 드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이 정도가 적정한 날짜일 것 같습니다.”
“좋네요. 다른 사안들은 정식으로 팀 코리안 몬스터의 이름으로 건의 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눈 듯 편안함 속에 커피를 마신다.
그 순간 비서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레이첼은 다급하게 들어온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일이 시죠?”
그는 숨을 헐떡이며 TV를 가르킨다.
“레이첼! 지금 TV 좀 보시죠.”
“네?”
두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아져 있던 리모컨을 집어든다.
이윽고 전원이 켜지며 한 사내가 기자회견장 데스크에 앉아있다.
오늘 예고되어있던 알도프의 기자회견.
레이첼은 흥미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 기자회견을 지켜보았다.
“얼마전 보도된 염문설 해명이나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호 역시 그녀의 말에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도프가 팔을 단상 위로 올리며 건방진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두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난 놈은 난 놈이군.’
스캔들 폭로.
직접적인 테러 위협.
친형의 사망.
일반인이었다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여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퍽퍽!
알도프는 마이크를 툭툭 친다.
“뭐야. 이거 나오고 있는 거야?”
옆에 서 있는 다니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히죽 웃는다.
“반가워 모두들. 오늘 내가 기자회견을 연 이유가 궁금하겠지.”
기자들의 셔터음 소리가 잠시 멈춘다.
일반적인 기자회견이랑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궁금해 죽겠지. 내가 침대에서 정말 그녀와 뒹굴었는지 말았는지.”
한 기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번쩍 쳐든다.
“미쉘과의 염문설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알도프는 그 기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자기 소속이랑 이름 밝히면 얘기해주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 기자였다.
자신의 소속을 드러내고 취재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런 스캔들에서는 함부로 공개하지 못한다.
만약 단순 루머로 판정이 났을시 회사가 정치적 보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킨다.
“CNA 닉 콜라이 기자입니다.”
알도프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가르킨다.
“자 저쪽을 보시죠.”
그의 손을 따라 카메라가 알도프가 아닌 닉 콜라이 기자를 비춘다.
알도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간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관한 답이 아니었다.
“저런게 좆밥 마인드라는 거야. 남이 어떻게 하면 잘 안될까만을 생각하는. 질문으로 말장난 치다가 자극적으로 제목 한 줄 뽑아서 광고료나 받아먹는 회사.”
닉 콜라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신상과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말이 방송으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기자회견의 분위기를 알도프가 가져왔다.
함부로 말을 하다가는 회사의 대한 이미지가 들이박히게 되는 것이다.
“궁금할 것 같으니. 답은 해주지.”
그가 닉 콜라이를 보며 씨익 미소 짓는다.
“사실 무근 입니다.”
이윽고 어깨를 으쓱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는 다니엘에게 손을 뻗는다.
이윽고 다니엘은 들고 있던 종이를 알도프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종이를 단상 위에 올려놓고 마치 초등학생이 발표하듯 자료를 읽는다.
“이 기자회견을 통하여 백두호에게 단 한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기자들은 순식간에 특종의 냄새를 맡으며 셔터의 불이 붙었다.
“이번 경기에서 너가 나를 이긴다면 내 벨트와 함께 XFC에서 받는 수익을 제외하고 200만 달러를 더 얹어주마. 대신.”
알도프는 다니엘이 넘겨준 자료를 구기며 단상 밖으로 던진다.
“역시 이런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 백두호 이 새끼야.”
그의 욕지거리 한 번으로 기자회견장 안의 모든 기자들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알도프의 기자회견은 이런 맛이다.
마치 엄청난 서커스를 보듯 위태로운 것.
수위 조절이란 없는 그의 스탠딩 코미디인 셈이다.
“내가 국회의원이랑 뒹굴었다면 너는 아마 레이첼이랑 뒹굴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랭킹 7위인 너가 앞 순서를 모두 배제하고 나랑 붙을 수가 있겠어?”
기자들의 셔터음 소리는 더욱 빨라지고 플래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오냐. 니 장단에 맞춰서 칼춤 한 번 춰주지. 네가 나를 이긴다면 200만 달러 현금과 내가 XFC에서 받은 모든 커리어를 반납하마. 대신 너가 패배할 시에는...”
알도프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그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마치 렌즈 너머의 두호를 바라보듯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XFC를 떠나고 다시는 MMA로 돌아오지 마라. 다시는 그 주먹으로는 먹고 살지 못하게.”
알도프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한다.
“모가지 잘 닦아놓고. 꼭 몸 성하게 다시 보자고.”
알도프는 마이크를 냅다 밀고는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기자들은 열띤 반응을 보이며 질문을 하려 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를 따라 붙으려 했으나 한 무리의 사내들이 막아선다.
포그스컬스 멤버들이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자 기자들은 그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대기실로 돌아온 알도프가 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러더니 볼레로를 쳐다보면서 낄낄 거린다.
“아까 그 기자 새끼 표정 봤어? 완전히 나라 잃은 표정이던데.”
“알도프.”
굳은 표정으로 다가온 다니엘.
알도프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적어도 상의는 하고 일을 진행해야지. 커리어 반납이라니.”
알도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다.
다니엘은 그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적어도 오늘은 해명을 하는게 맞았어. 지금 경찰이 테러다 뭐다 찔러대는 통에...”
알도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볼레로에게 다가간다.
“잠깐.”
순식간에 손을 뻗어 볼레로의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다니엘에게 겨눈다.
다니엘은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친다.
마치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뻗으며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다.
“왜... 왜이래...”
“쥐새끼.”
알도프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귀를 후빈다.
“네가 한 게 뭐가 있어? 막말로 데이비드는 실력이라도 있었지.”
다니엘은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등이 벽에 닿았다.
“근데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그 새끼랑 똑같이 입을 털면 어쩌자는 거야?”
알도프는 그의 이마에 총을 겨누며 미소를 짓는다.
“그 빈약한 커리어에 나라는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으면 아가리 잘 닥치고 숨만 쉬어. 알았어?”
알도프가 총을 장전하며 그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다니엘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볼레로가 알도프의 총구를 붙잡고 땅으로 내린다.
“알도프 그만. 밖에 사람들 많다.”
알도프는 잠시 다니엘을 쳐다보더니 흥미가 떨어진 듯 몸을 돌린다.
“됐다. 다니엘? 처신 잘하라고.”
이윽고 총을 볼레로에게 건넨다.
볼레로가 장전을 해체하고 다시 자신의 권총집에 집어넣는다.
외투를 챙겨 곧장 나가버리는 알도프.
그 모습을 보며 다니엘이 주저앉듯 땅으로 쓰러진다.
“씨발...”
***
기자회견이 끝나자 두호가 말없이 일어선다.
레이첼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있었다.
심기가 아주 불편한 듯하다.
알도프에게 대놓고 모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멋대로 판을 흔드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보겠습니다.”
레이첼이 일어난 두호를 돌아본다.
“미안합니다. 두호씨.”
“아닙니다.”
두호는 자신이 입고 온 외투를 챙겨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간다.
“당분간 훈련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페이스 오프날쯤 보게 되겠죠.”
“네. 그럼 경기 일정 통보 드리겠습니다. 건의 사항은 따로 메일로 주세요,”
두호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두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었다.
“거의 다 왔다.”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절한 패배인가.
모든 것을 얻을 기회인가.
두호는 외투를 훽하니 둘러 자신의 몸에 걸쳤다.
떠나간 상철과 래진.
죽어버린 자신의 브라보 팀원들과 알파팀원들.
채호와 예수 그리고 준모.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
“누가 지옥에 떨어질지 한번 보자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2월 28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