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 4 년에 한 번 오는 날.
두호는 머리를 쓸어넘긴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영철은 잠시 무거운 표정으로 두호에게 손을 내민다.
“부족하지만 이제 제가 옐로우 맘바를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잘 하실거라고 믿습니다.”
빈 말이 아니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리더는 젊어져야 한다.
옐로우 맘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영철의 실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그의 냉철한 성격은 보스의 자리에 참으로 어울렸다.
그리고 성격과 달리 부하들과는 곧잘 농담을 주고 받는 포용력까지 갖추었다.
두호는 영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큰 짐을 일찍 떠맡기게 된 것 같다.
“얼마 전 알도프의 체육관 앞에서 테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영철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역시 떠난 선배의 복수를 해야하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두호는 어딘가 석연찮았다.
알도프와 포그스컬스는 한 몸.
옐로우 맘바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제약들이 많다.
소위 명분.
포그스컬스를 잡아내는 것은 옐로우 맘바에게도 래진의 복수라는 좋은 명분이 있다.
하지만 스포츠 스타를 건드리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알도프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들의 구심점을 없애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뭉칠 구실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제가 여러분들을 고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희를요?”
“저 역시 알도프의 견제를 받아야 하는 입장으로써 여러분들이 저희 팀을 지켜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경호를 맡아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두호가 주위에 찰리 팀원들을 바라본다.
과거 도혁의 시절부터 알던 후배들도 몇 보이고 아예 새로운 팀원들도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찰리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공격 해오는 포그스컬스를 사살한다면 직무를 수행하다 이뤄진 일이니 제약도 많이 줄어들 겁니다.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셈이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듯 영철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그런데...”
영철이 씨익 미소를 짓자 두호가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본다.
“저희가 몸값이 좀 비쌉니다만?”
너무 무거운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영철의 노력이 엿보인다.
래진의 부고를 전하고 불투명한 전황을 얘기해주어야 했기에 영철의 마음속에서도 적잖이 마음 쓰인 것이다.
더군다나 얼마 전 팀원들이 폭탄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동선수에게 경기력의 반은 멘탈이다.
자신이 괜한 소리를 전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두호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물론 돈 나올 곳을 쑤셔봐야죠. 도혁이형 할인은 없습니까?”
“한 10% 정도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큰 목소리로 웃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몸 조심하시고 조만간 찾아 뵙겠습니다. 두호씨.”
몸을 돌린 영철의 뒤로 찰리팀이 따라붙는다.
두호는 멀어지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13년전.
카르텔의 마약 거래를 방해해달라는 임무를 의뢰 받았다.
브라보팀은 베네수엘라 국경에서 작전 대기중이었다.
늦은 밤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래진.
그의 옆으로 누군가 털썩 주저 앉는다.
“안 주무세요?”
“잠이 안오네.”
도혁은 래진에게 술이 담긴 수통을 건넨다.
평소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작전 현장에서 몰래 마시는 술은 참으로 달콤했다.
래진은 그런 도혁을 흘겨본다.
“이놈이 캡틴 앞에서 술을. 팀 기강이 아주 좌로 취침했구만?”
“이거 다 캡틴한테 배운 겁니다. 언제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래진이 양철컵을 내밀자 도혁은 싱긋 웃으며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른다.
잔을 가져와 벌컥 들이킨 래진은 인상을 찡그린다.
“아우. 좀 좋은 것 좀 처먹지. 돈은 다 어디에다 쓰는 거냐.”
“제가 아직 술맛은 잘 몰라서. 이것저것 다 잘 먹는 편입니다만.”
“하여간 이리봐도 저리봐도 재미가 없는 놈이야.”
둘은 모닥불 앞에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풀 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가득하다.
래진이 슬쩍 도혁에게 말을 건다.
“일은 안 힘드냐?”
“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군대랑은 다르지?”
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와 용병 생활은 참 닮은 듯 달랐다.
완벽한 위계질서와 체계로 운영되는 군대이지만 틈새의 자유가 있었다.
그에 반해 용병 생활은 자유롭고 한가한 듯 싶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완벽한 우선순위와 명령이 존재한다.
군대의 책임은 국가가 용병의 책임은 개인과 사업자가 지게 된다.
각자가 얻고자 하는 이득이 아예 다르니 생활방식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군대가 함께 가는 것이라면 용병은 각자 잘 달리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
도혁이 장작 하나를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는다.
탁!
“그래도 군대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씨익 미소를 짓는 도혁과 래진.
래진이 팔짱을 끼며 헛기침을 한 번 한다.
“군인이랑 용병이 참 닮아있는 게 하나 있어.”
“뭡니까.”
“신념.”
“신념이요?”
래진은 자신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도혁에게도 하나 태우겠냐는 듯 담배곽을 건넨다.
“끊으려구요.”
“치사한 놈.”
담배의 불을 붙인 래진이 연기를 천천히 내뿜는다.
“이 일은 참 인간 같지 못한 일이야. 돈을 받고 사람을 죽여주거나 납치한다. 우리가 가진 전문지식과 전투기술이 없었다면 그저 뒷골목 해결사랑 다를 것이 없지.”
래진은 장작 하나를 더 집어들어 모닥불 안으로 던져넣었다.
불은 조금 더 강하게 타올랐다.
“그 뒷골목 놈들과 우리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신념이야.”
“무슨 신념입니까.”
“모든 일들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신념.”
“책임감 말씀이십니까.”
래진은 도혁에게 양철컵을 내밀었고 두호는 천천히 잔을 따라주었다.
한입에 다시 술 한 컵을 비워낸 래진이 인상을 찡그린다.
“단순히 무엇이든 해결해 드립니다. 이런 게 아니란 말이지. 뒷골목 양아치들은 자신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때 회피하고 변명하려 잔머리를 쓰지.”
래진은 도혁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고. 만약 실패할 때에는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 거지. 인생도 마찬가지야.”
도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이야기 같았지만 무엇인가 명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
두호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듯 래진이 싱긋 미소짓는다.
“도혁이 네 나이가 어리지 않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을 거다.”
래진이 담배를 내뿜고는 꽁초 역시 모닥불을 향해 툭 튕긴다.
“도혁아.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해야 한다 싶으면 해. 모든 도전과 선택의 책임만 네가 진다면 그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다. 대신.”
래진이 싱긋 웃으며 도혁의 어깨를 툭 친다.
“다시 도전할 때 두려워하지 않을 각오까지 한 상태라면 언젠가 그 일은 무조건 성공으로 끝난다. 알았나?”
도혁은 옅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래진은 팔짱을 끼며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살아야 이 몸이 받는 연봉 반 정도는 따라올 수 있다. 이거지.”
“그럼 나머지 반은 뭐로 채웁니까.”
“아마 잘생긴 외모. 화려한 언변. 이런 것 아닐까.”
“실력을 키워라. 이 말씀이시네요.”
“이 자식이?”
래진은 웃으며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턴다.
“이제 자라. 내일 할 일 많다.”
“예.”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고, 다음날 임무 역시 완벽하게 해결해냈다.
***
레이첼은 평소와 같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업무는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한 일이었다.
백두호 대 알도프 코와르키.
모든 격투기와 스포츠 팬들이 집중하며 벌써부터 언론의 관심이 쏟아진다.
더군다나 각자에게 일어난 한 번의 테러로 인하여 양측의 팬들은 벌써부터 과열 양상이다.
장소 선정부터 경기 매치 구성.
프로모션과 경기 날짜 선정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첼은 사업가.
두호의 승리가 곧 자신의 사업에 이득임을 알고 있기에 조금씩이지만 두호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가.”
요새 들어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그녀의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레이첼의 개인 비서였다.
“미스 레이첼. 지금 손님 한 분이 와 계십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스케줄표를 바라보지만 오늘 약속된 미팅은 없었다.
“누구시죠?”
비서의 뒤로 누군가 고개를 내민다.
두호였다.
그의 얼굴은 본 레이첼은 반갑게 두호를 맞이하였다.
“두호씨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너무 불쑥 찾아온 게 아닌가 싶네요.“
“두호씨라면 새벽에도 환영이죠. 여기 앉으세요.”
두호는 감사의 의사를 전하며 소파 자리로 이동한다.
레이첼이 물끄러미 그의 복장을 확인한다.
훈련중에 온 듯 트레이닝복 차림의 두호.
그가 이렇게 준비도 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호의 맞은편에 앉은 레이첼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전에 있었던 폭탄 테러에 대해서 유감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희가 더욱 신경 썼어야 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 때문에 목숨을 잃으신 운전 기사님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다른 분들의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치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서는 두 사람에게 각각 커피와 비타민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두호는 살짝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레이첼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호에게 묻는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매치 날짜에 대하여 건의를 드리려고 합니다.”
두호의 말에 레이첼이 살짝 미소 짓는다.
‘건의라.’
실로 오래 들어본 말이다.
어느 정도 자신과 비즈니스를 오래 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직접 건의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건의는 대체로 청탁이다.
두호가 하는 건의는 의미가 사뭇 달랐다.
진짜 건의.
“뭡니까? 마침 그 이야기도 하려 했는데요. 저희는 4월쯤...”
“2월로 부탁드립니다.”
“두호씨?”
너무 갑작스러운 두호의 제안에 레이첼의 표정이 굳는다.
두호 역시 그녀를 바라본다.
레이첼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두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선다.
“뭣 때문입니까.”
“이 게임을 오래 끌면 불리한 건 저희입니다.”
레이첼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상대는 XFC 파운드 포 파운드 1위에 챔피언입니다. 차분히 시간을 가지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두호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기회가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상대는 XFC의 미들급 제왕.
수많은 데이터와 경험으로 그 자리를 몇 년째 굳건하게 지키는 디펜딩 챔피언이다.
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와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해볼 시간이 필요하다.
두호는 고개를 젓는다.
“준비 기간이 길면 길수록 알도프는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저희를 공략할 테니까요.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건 싫습니다.”
“.....”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놈을 날려 버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