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187화 (187/204)

187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경이로웠다.

칼날이 춤을 춘다는 표현은 무협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도프의 칼은 그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가장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나비의 궤적과 닮아있다.

만약 손에 쥔 것이 칼이 아니었다면 절대 위협으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의 가까운 움직임 속 담겨있는 지독한 살의(殺意).

래진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어째서 이런 자가 이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알도프의 눈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차분해지고 있었다.

래진의 속도와 이 공간의 흐름에 동화되어가듯 아주 자연스러웠다.

자신의 목으로 찔러들어오는 칼을 쳐내며 래진이 살짝 고개를 젖힌다.

쳐낸 알도프의 칼이 가벼웠다.

그렇다면 허수라는 뜻.

래진의 예상은 적중했다.

목을 노리고 들어온 칼은 어느덧 자신의 코 앞에서 스쳐 지나간다.

알도프의 가슴을 뻥하니 차버리며 거리를 벌리는 래진.

한 호흡에 너무 많은 합을 주고 받는 것은 자신이 불리하다.

쌩쌩한 현역 선수인 알도프와 달리 자신은 노쇠한 몸이니까.

앞가슴을 툭툭 털어내며 무표정한 얼굴로 래진을 바라보는 알도프.

얼핏 보면 압도하는 듯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노친네. 귀신 같구만.’

알도프는 뼛속 깊이 래진을 인정하고 있었다.

분명히 자상은 래진쪽이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팔뚝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공방 중 얼마나 정교하게 칼질을 했는지 무릎 뒤쪽 힘줄이 잘린지도 몰랐다.

‘전에 찾아온 그놈이랑은 아예 차원이 다른데.’

단순히 회피와 방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빈틈으로 눈 깜짝할 새에 살벌한 살수가 들어왔다.

경험이나 감각.

탄탄한 기본기가 훨씬 웃돈다.

자신이 래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바로 체력전이다.

단순히 이 싸움을 오래 끄는 것이 아닌 래진의 체력을 갉아먹는 것.

그렇게 한 호흡에 긴 합을 주고 받으려 하는 것인데, 조금의 빈틈이 보이면 벼락같이 거리를 벌리고 체력을 회복한다.

‘정점이라는 말이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단 말인가.’

래진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지금 이런 공방전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알도프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만약 이 사람이 10년만 젊은 상태로 만났다면?’

아마 자신은 순식간에 변사체가 되었을 것이다.

래진이 차분하게 호흡을 내뱉으며 알도프에게 다가간다.

“애송이. 제법이야.”

“그쪽도 나이답지 않습니다.”

여유롭게 대화를 주고 받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다.

고수의 싸움일수록 승부는 길게 가지 않는다.

순간적인 움직임.

더군다나 연장까지 들고 있으니 목숨이 달아나는 것은 찰나이다.

팔이 뻗으면 닿을 거리.

그 거리에서 두 사람이 잠시 멈췄다.

이 공간에 공기 흐름까지 멈추는듯한 순간.

그러나 두 사람의 눈은 끝없이 굴러간다.

수십.

아니 수백 번의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서 돌려보는 것이다.

‘왼쪽으로 긁고 숙여? 아니면 깊게 찌르고 반대로 나갈까.’

‘얕으면 맞고 큰 걸 노려야겠다. 만약 깊게 들어오면 어쩌지.’

1초도 안 될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계산은 끝이 났다.

“하압!”

“죽어 이 새끼야!”

푸슉!

서걱!

각자의 칼에서 각기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로를 등진 채 서 있는 두 사람.

알도프가 허리춤을 붙잡은 채 바닥으로 무릎을 털썩 꿇는다.

“제기랄...”

코어 깊숙이 칼이 들어왔다.

거친 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묻은 피를 확인하는 알도프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오묘했다.

그 순간 래진 역시 무릎을 꿇는다.

알도프와 달리 목을 부여잡는 래진.

명치와 목을 노렸던 래진과 알도프였지만 찰나의 순간 알도프가 몸을 틀어 심장으로 향한 칼을 피해낸 것이다.

알도프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만약 본능적으로 피해내지 못했다면 아마 래진의 모습이 지금 자신이었을 것이다.

래진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

이내 래진은 왼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다.

쿨럭거리는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래진은 알도프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만하자.”

알도프는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무엇을.”

“나 하나면 충분하잖아.”

휴전을 하자는 의미였다.

각 단체의 보스들이 모두 죽었고 서로의 피해가 막심하다.

더 이상의 피해는 설령 이긴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알도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끝은 봐야지.”

“그렇군...”

래진이 피를 토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두워 보이는 것이 하나 없지만 하늘이 핑핑 도는 듯 어지럽다.

그 순간 래진이 낄낄 웃는다.

“그럼 지금 이순간을 마음껏 즐겨둬라. 결국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군가에게 뺏길 테니까.”

래진이 목을 부여잡던 손을 떼버린다.

이윽고 힘겹게 마지막 말을 뱉는다.

“잘 놀다 간다.”

이윽고 눈을 감는 래진.

전대의 거물이자 히트맨의 상징이었던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숨을 거뒀다.

알도프는 쓰러진 그를 보며 슬쩍 고개를 숙인다.

어디까지나 적이었고 자신의 원수이지만 그는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알도프는 그제서야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진다.

“젠장...”

최소 몇 개월은 요양해야 할 상처다.

그는 가만히 앉아 래진의 마지막 한 마디를 생각했다.

‘그럼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둬라. 결국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군가에게 뺏길 테니까.’

한 사람이 남았다.

래진보다 더욱 뛰어난 평가를 받던 도혁의 동생이자 마지막 도전자.

백두호.

“빌어먹게 꼬인 팔자구나.”

이내 알도프도 그의 옆에서 시원하게 뻗어버렸다.

***

LA의 한 대형병원.

수술실 문이 열리고 마스크를 벗으며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두호와 팀 코리안 몬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의사를 둘러싼다.

의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 알렉스씨. 02시 35분 경 사망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탄식하며 고개를 숙인다.

오늘 처음 본 사내.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운전을 맡아주던 사내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시에 문득 불안한 마음이 불쑥 솟아오른다.

만약 예수와 준모도 같은 소식이면 어떻게 해야하나.

의사는 차트를 보며 여전히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예수씨와 양준모씨는 모두 무사합니다. 목숨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체력적으로 한계까지 몰렸던 터라 지금 중환자실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두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이상은 싫었다.

소중한 사람을 또 한 번 잃는다면 자신은 그대로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좋은 소식을 말한 것 과는 달리 표정이 좋지 못했다.

“다만...”

“다만이요?”

탁현이 무언가 두 사람에게 이상이 있음을 눈치채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준모씨는 무릎의 골절과 관통상이 심각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정강이뼈에 비골과 경골은 모두 파열됐고 근처 근육 조직 중 성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 스프링이 뚫고 나간 종아리와 가자미근의 90%가 손상된 상태이구요.”

두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이 멍해졌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유감의 표시를 전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앞으로 오른쪽 다리는 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두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윽고 천천히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 앉으며 마른세수를 연거푸 한다.

탁현과 데이비드는 그의 표정을 보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멘탈 관리야 1류 코치진인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함께 일하던 소중한 동료의 큰 부상.

그리고 그것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위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와 탁현은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의사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멀어졌다.

데이비드가 천천히 걸어가 괴로워하는 두호의 옆에 앉았다.

“두호씨.”

그는 두호의 어깨를 감싸듯 천천히 팔을 올렸다.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먼저 간 알렉스 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준모와 예수씨는 살았잖습니까.”

“네.”

두호는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대 앉는다.

탁현이 두호의 옆에 앉는다.

데이비드보다 더 오래 두호를 지켜보았다.

채수에게 물어 그의 과거 역시 알게 되었고 그가 어떤 아픔을 지니고 살아왔는지를 들었다.

강한 사람이지만 더없이 여린 사람이란걸 알고 있다.

“두호씨. 우리 복수합시다.”

데이비드는 탁현의 발언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미스터 탁?”

탁현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는 듯 손을 든다.

데이비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두호는 힘없이 탁현을 돌아본다.

“우리 스포츠맨 정신 잠시 접어둡시다. 알도프 그 양아치 자식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패 죽인 다음 케이지 아래에 내려왔을 때 똑같이 복수해줍시다.”

탁현의 말은 팀 코리안 몬스터를 모두 놀라게 할 말이었다.

가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보수적인 성향의 탁현이다.

돈이 걸린 프로 스포츠와 달리 올림픽을 바라보는 엘리트 출신이어서 그런 것으로 이해했다.

답답하리만큼 원칙과 신념을 강조하는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복수를 하잔다.

두호를 위해 평생 지켜온 신념을 내던진 것이다.

“우리도 당하지만은 않는다 라는 걸 보여줍시다. 대신.”

두호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 모든 복수의 시작은 케이지 위에 올라간 순간부터 입니다. 그전까지는 절대 포기하거나 흥분하지 마십시오.”

탁현의 두 눈은 많은 의미를 내포했다.

위로와 격려.

지금 두호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었다.

두호가 잠시 눈을 감는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데이비드 코치님.”

데이비드와 탁현이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레이첼에게 연락하세요.”

“적어도 두 달 안에 경기를 원한다고.”

데이비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그를 만류할 수 있는 건 없다.

“탁 코치님.”

“네.”

“파이트 매니아로 가시죠. 오늘부터 바로 준비합시다.”

두호는 걸음을 옮겼다.

복도 한쪽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의 층 소개가 보인다.

-4층 중환자실.

그러나 두호는 애써 외면했다.

힘겹게 걸음을 뗀 그의 두 눈은 이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냐. 갈 데까지 가보자.”

그는 다짐했다.

알도프를 죽이겠다고.

***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니. 사주 경계 확실히 하고 라이칸이랑 폭스만 따라와라.”

중 무장한 찰리팀.

영철이 굳은 표정으로 명령을 내린다.

4시간 전 문자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여기 두고 간다. 받아가라.

그리고 래진이 착용하던 롤렉스와 상철이 사용하던 칼이 담긴 사진이 담겨있었다.

영철은 다급하게 찰리팀과 함께 이곳 화장터로 온 것이다.

공터로 진입하자 우두커니 하나 켜져 있는 조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쓰러져 있는 한 사람.

영철은 분노와 슬픔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간다.

“형님!”

래진의 앞에 도착한 영철이 그를 안아든다.

그러나 그의 몸은 차갑디 차가웠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결국 영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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