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페이스 오프의 현장.
계체량을 마친 두호와 제이미 로엘은 관객석을 마주 앉아있었다.
가운데에는 XFC의 메인 MC인 앤드류가 마이크를 잡고 대본을 확인한다.
“지금 여러분들은 이번년도의 마지막 매치를 장식할 두 선수를 보고 계십니다!”
두호는 앤드류의 소개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로엘은 곧바로 의자를 살짝 뒤로 밀어 위태롭게 자세를 바꿨다.
불량한 고등학생이 수업을 듣는 모양새에 관객들이 웃음 짓는다.
“어이 로엘아! 자세가 그게 뭐야!”
“단단히 혼내주려고 벼르나 본데?”
앤드류는 시선을 잠시 간부석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레이첼과 실바를 비롯하여 XFC의 고위급 간부가 모두 앉아있었다.
이제 그들 역시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이다.
미들급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쫄딱 망하던가.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던가.
모두가 두호의 승리와 실력을 응원하는 상황이었다.
실바가 식은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앤드류에게 주는 신호인 듯 앤드류 역시 곧바로 미소 짓는다.
“이번 경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대체 선수로 들어오시게 된 로엘은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어떠냐니.”
로엘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물병을 뻥하니 걷어차 버린다.
“XFC의 수뇌부는 두 가지 중에 하나가 분명해.”
로엘은 시선을 돌려 레이첼을 바라본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돈독이 올라 저 아시안 놈을 밀어주려는 것이던가. 아니면 감이 떨어져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안 좋아졌던가.”
노골적으로 레이첼을 모욕하는 로엘이었다.
사실 미들급의 모든 랭커 선수들은 그녀에게 불만이 가득하다.
일 년에 많아야 세 경기.
운이 없다면 두 경기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선수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는 분명히 도움이 되겠지만, 그만큼 인기나 경기력을 유지하기엔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알도프의 철권통치 이후 챔피언전을 원하는 상황이 줄어들었다.
알도프의 은퇴소식과 두호라는 먹잇감이 등장하자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것이다.
“미리 레이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겠어.”
레이첼을 보던 로엘이 씨익 미소를 짓는다.
이후 등받이에 바짝 기대어 앉아 두호를 바라본다.
“당신들이 원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을 거야. 저 노란원숭이 놈은 내가 죽일 테니까.”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는 로엘이었다.
이윽고 두호를 보며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로엘.
“어이 꼬맹아. 넌 내일 죽었어.”
사람들은 열광하며 소리를 지른다.
어쩌면 미들급의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제일 크게 바라는것은 관중들일 것이다.
로엘의 실력 역시 모두가 인정하는 바.
그리고 두호라는 초신성이 챔프가 되어도 좋다.
미들급에서 실로 오랜만에 이런 흥미진진한 구도가 만들어지자 목말랐던 관중들은 마냥 좋은것이다.
앤드류가 고개를 돌려 이번엔 두호를 바라본다.
건방진 로엘의 모습과는 달리 두호는 굉장히 차분하게 앉아있었다.
앤드류가 곧바로 질문을 던진다.
“백두호 선수는 어떠십니까. 로엘 선수가 말한대로 정말 XFC 측의 밀어주기식 운영이라 생각하시나요?”
앤드류는 굉장히 자극적인 단어를 선택했다.
레이첼이 원하는 구도는 모든 잡음을 백두호가 삼키는 것이다.
그렇게 소문을 먹고 커진 이슈의 덩치가 두호의 챔피언전 정당성을 무마해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두호가 마이크를 집어든다.
“시끄럽네요.”
잠시 이곳 기자회견이 열리는 카지노는 정적에 휩싸인다.
두호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알도프라는 깡패놈 하나에 겁먹어 빌빌 기던 사람들이 이제 숨구멍이 트이니 주절대는 모습이 심히 보기 안 좋습니다.”
앤드류는 감탄한 듯 했다.
지금 이 두호의 한마디로 미들급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알도프와의 경쟁구도.
자신이 잠정적 챔피언이라는 도발.
그리고 미들급 선수들을 들끓게 만드는 단어 선택.
‘이렇게 된다면 패배할 경우 엄청난 후폭풍이 덮칠 텐데...’
하지만 두호의 표정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 있다는 건가?’
두호가 로엘을 담담히 바라본다.
자신과 같은 체급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체격.
절륜하다고 느껴질 만큼 완벽한 몸의 데피니션.
계체량이 끝나 수분을 충분히 보충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하지만 두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로엘. 지금 당장이라도 약물검사를 통과한다면 이번 파이트 머니의 10배가 넘는 돈을 주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중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이윽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로엘을 향했다.
로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호에게 달려들 듯이 움직인다.
“뭐 이 자식아?”
경호원들이 가까스로 말렸지만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두호를 찢어죽일 듯 했다.
두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WBA 복싱 챔피언. 대륙 선수권 우승. 천재 파이터.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진 선수가 설마 약물을 했겠습니까?”
두호는 오늘따라 도발의 수위가 굉장히 높았다.
그에게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정교한 스트라이커 두 사람이 싸운다면 오히려 지지부진해진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포인트를 쌓고 승리를 위한 운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호는 로엘을 흥분시켜야 했다.
재밌는 경기내용과 완벽한 승리.
이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두호에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두호가 씨익 미소 짓는다.
“안 그래?”
“저 개새끼가...”
두호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일 확인해보면 알겠지.”
두호는 기자회견장의 무대를 곧바로 내려가 버렸다.
그 모습에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그래! 이 미들급 새끼들아! 니네가 그러고도 파이터들이냐!”
“운동선수가 도전을 무서워해? 너네가 무슨 공무원이야!?”
두호는 관객들의 반응에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로엘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넌 꼭 죽일거다...”
***
-여러분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메인이벤트 첫 번째 경기! 불세출의 타격가 불릿 제이미 로엘 대 코리안 몬스터 백두호 선수의 경기입니다!
앤드류의 소개 멘트가 라스베이거스를 울린다.
80만의 페이퍼뷰.
수십만의 사람들이 내쉬는 숨은 거대한 바람이 될 법 하지만 케이지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는 두 사람.
선수 소개를 진행하는 앤드류가 긴장감에 눈치를 볼 만큼 섬뜩했다.
심판의 선언으로 케이지의 중앙으로 모인 두 사람.
룰 설명이 이어지지만 시선은 서로에게 고정되어있다.
두호는 천천히 로엘의 몸을 살펴보았다.
계체량이 끝나면 선수들은 XFC에서 제공하는 회복키트로 음식과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동안 회복을 거치면 몸은 평소의 체중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듣기로는 회복키트를 수령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들 왜 그렇게 약물에 의존하는 건지. 참.’
두호가 고개를 젓자 묘한 불쾌감을 느낀 로엘이 묻는다.
“뭐지.”
“별 것 아니다.”
두호의 대답에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껴 더욱 화가 나는 로엘이었다.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심판이 각자의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터치 글러브도 없이 훽하니 돌아선다.
관객들은 그들의 뜨거운 신경전에 환호한다.
-터치 글러브는 없습니다. 존중 없이 시작되는 그들의 경기입니다!“
심판이 로엘을 쳐다본다.
“레디?”
로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두호를 바라본다.
그러나 두호의 시선은 로엘이나 심판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응시하는 듯 하자 심판이 손가락을 튕기며 두호를 집중시킨다.
“백두호 선수! 집중 하십시오.”
탁현이 소리치자 그제서야 심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호.
무시가 도를 넘은 듯 하자 로엘은 이를 간다.
“넌 꼭 내가 죽인다.”
심판의 손이 허공을 가른다.
“파이트!”
시작부터 거침없이 달려가는 로엘.
거리조절이나 스텝.
이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저 저 건방진 놈을 두드려 팰 생각이었다.
로엘의 생각처럼 두호에게 달려드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두호에게 뻗는 뒷손.
그러나 두호의 표정은 느긋했다.
단 한 발자국을 옮겨낸 두호.
그리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뻗어낸다.
무심하게 뻗는 주먹이지만 엄청난 타격음이 케이지에 울려 퍼진다.
퍼억!
이윽고 땅으로 쓰러지는 로엘.
그 모습에 라스베이거스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뭐야?”
“어떻게 된 일이야.”
땅으로 쓰러진 로엘이 움찔거릴 뿐 일어나지 못했다.
단 한 발자국을 옮겨 만들어낸 그림같은 숏 어퍼 카운터.
달려오는 힘과 맞받아치는 힘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긴 것이다.
“말도 안돼!”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잡으며 소리를 질렀고 두호를 응원하는 관객들은 모두 기뻐 날뛰었다.
탁현은 크게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보였다고?”
달려오는 것에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운동신경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따라 나오는 공격을 확인하며 회피하는 것까지도 뛰어난 선수라면 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공격을 단 한 발자국을 옮겨 회피함과 동시에 이만한 카운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호가 일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그를 말 없이 바라본다.
“애송아. 이성만 담겨야 할 주먹에 감정이 담기면 닿지 않는 법이야.”
후속타는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KO와 서브미션을 노리고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 테지만 두호는 그러지 않았다.
왜인지 그가 일어나는 순간까지 기다려주었다.
로엘이 힘겹게 일어난다.
‘어떻게 된 일이지...’
순간 필름이 끊긴 듯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바닥에 엎어져 있던 것이다.
그가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지만 굉장히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자신이 투여한 약의 가장 중요한 효능은 무통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로엘의 기억을 끊어놓을만큼 엄청난 공격.
‘운이 좋은 놈이었군.’
그저 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로엘이 자세를 잡자 그제서야 두호가 마주 자세를 잡는다.
“들어와봐.”
가볍게 통통 튀는 스텝으로 그에게 손짓하자 로엘은 아까와 달리 천천히 스텝을 밟는다.
이윽고 뻗어 들어가는 가벼운 잽.
그러나 두호는 가볍게 손으로 패링해냈다.
로엘은 나간 손을 끌어당기듯 뒷손을 던졌다.
평소의 뒷손보다도 배는 빨라진 듯한 주먹.
그러나 그 의미가 무색하게도 두호는 그의 주먹을 걷어내듯 가볍게 막아낸다.
두 번의 공격이 무위로 끝났지만 로엘의 눈이 순간 빛난다.
두호의 관자노리를 향해 날아가는 하이킥.
‘건방은 끝이다. 아시안놈아.’
상식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양손은 모두 내려와 있고 두 발의 무게중심은 땅에 박혔다.
무게를 그대로 받아낸다면 두개골 골절까지도 예상될 만큼 엄청난 힘이 실린 공격.
천천히 두호의 머리가 움직인다.
뒤로 피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
마치 복싱의 위빙을 보여주듯 로엘의 하이킥을 피해낸다.
이윽고 스텝을 살짝 물려 거리를 벌리는 데까지 성공한 두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번엔 조금 날카로웠어.”
로엘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잊고 지내던 감정.
단 한 번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가장 확실한 감정.
패배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