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래진은 쉘터를 둘러보았다.
간소화된 짐과 시설들.
애초에 오래 이용할 목적이 아니었던 듯 적당히 구색만 갖춰놓은 듯 하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모두 있었다.
래진이 손을 뻗어 부엌 위에 찬장을 열어보았다.
전투식량과 통조림.
그리고 항생제와 의료도구들로 가득차 있었다.
“목적지 바로 직전 다운 곳이군.”
래진이 고개를 돌려 바로크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한 인간이다.
마흔이 겨우 넘은 나이일 테지만 세상을 통달한 듯 보였고 실력마저 정점에 가깝다.
그런 그를 누가 죽였을까.
찰리팀이 바닥에 비닐을 하나 깔아놓고는 바로크의 시신을 살짝 들어 옮겨놓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영철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누굴까요.”
“그러게.”
“바에서도 시신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자상은 없었고 둔기로 한 대 맞은 듯한 상흔이 마음에 걸립니다. 집단은 아니고, 단독 소행이라는 얘기인데.”
“적의 적은 아군이야. 나중에 적으로 만나지만 않길 빌어야지.”
집단이라면 훈련이 잘 되었지만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좁은 공간에서 다수를 상대하면서 그런 수준을 보여주다니.
‘숫제 괴물이라는 얘기구만.’
비닐 봉지를 덮고 찰리팀 한 명이 바닥을 닦으려 하자 래진이 손을 든다.
찰리 팀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래진을 바라본다.
“어쩐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잠깐 대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래진이 그들에게 다가간다.
곱게 싸놓은 비닐을 다시 열어 제낀다.
이윽고 바로크의 시체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팀원들과 영철은 그가 무슨 의미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래진은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보스. 뭐 하십니까.”
영철이 다가와 바로크의 시신을 슬쩍 내려다본다.
“끌어내야지.”
“누구를요?”
“네가 싸움 못 이긴 애.”
“예?”
영철은 순간 짜증이 확 이는지 눈이 움찔한다.
그 모습을 본 래진이 큰 소리로 웃는다.
“농담이야. 사내 자식이 그런 걸로 화내냐.”
“하여간 보스도 참. 알도프를 왜 끌어내는 겁니까.”
래진이 책상 위에 올려진 바로크의 핸드폰을 집어든다.
“정통성이 있는 놈을 모두 잘라내야 전쟁이 끝나는 거야.”
“네?”
영철이 잠시 고민하는 듯 한다.
이내 말의 숨은 의미를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크가 죽은 이상 알도프가 포그스컬스 남은 잔당들의 실질적인 리더다.
더군다나 그의 직계 형제로서 그가 가진 정통성은 차고 남는다.
“그럴싸한 명분 하나 내거는 순간. 이 전쟁 길어진다.”
모든 잔당들의 분위기를 단 한순간에 뒤집어놓을 명분.
- 죽은 형의 원수를 갚자.
그들은 지금껏 느껴왔던 패배감을 잊고 더욱 독해질 것이다.
운동선수라서 직접적으로 일선에 나서지 않는다면 오히려 상황은 복잡해진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를 건드리는 것 역시 옐로우 맘바에게는 부담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흥분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가 직접 자신들의 앞까지 찾아오도록.
“그러니까. 끊어내야지.”
“함정을 파야겠군요. 준비하겠습니다.”
“지금은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봐.”
래진이 쉘터 내부를 돌려보더니 영철을 바라보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영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시작하자. 서둘러라.”
그의 명령에 찰리팀원들이 모두 자신의 파우치에 영철과 같은 쇠통을 꺼낸다.
휘발유를 주위에서 구석구석 뿌리고 잘 타는 것들을 바닥에 뿌려놓는다.
순식간에 실내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래진은 인상을 찡그리며 먼저 밖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눈 앞에는 워스키쉬의 호수가 보인다.
바다나 강과는 달리 평온하고 잔잔한 호수.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뺏긴다.
분명히 바로크도 죽었고 이제 전쟁의 양상은 눈에 그려질 만큼 단순해졌다.
결과는 극과 극이겠지만 완전히 전황을 예측할 수 없을 때보다는 훨씬 나은 듯 싶었다.
하지만 래진의 기분은 뒤숭숭했다.
자신의 주적인 바로크를 제 손으로 잡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아니면 이 전쟁으로 잃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일까.
“너무 오래 살았나.”
젊었을 적에는 성취에 목숨을 걸었지만 이 나이쯤 되니 그런 건 의미 없어졌다.
“그래도 해내야 되는 위치겠지.”
맑은 공기를 맡던 래진의 주위로 탄내가 순식간에 덮쳐온다.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니 쉘터에서 찰리팀이 하나둘씩 걸어 나왔다.
영철은 마스크를 쓴 채 래진에게 다가온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십시오.”
“뭐?”
“보스. 아니 선배 얼굴 보고 산지도 15년이 넘어가는데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이 자식아.”
래진이 옅은 미소를 띄우며 입에 담배 하나를 물었다.
영철이 그걸 모르냐는 듯 마스크를 벗으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형님. 엉뚱한 행동 하기 전에 짓는 표정이 또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니야. 이 자식아.”
“두고 보겠습니다.”
“에이. 재미없는 새끼.”
말은 불만이 많은 듯 하지만 래진의 표정이 밝다.
“가자.”
래진이 천천히 걸어가자 그 뒤를 영철과 찰리가 따라 걷는다.
해가 없는 곳에서 워스키쉬에서 붉은 빛이 올라온다.
잠시 후 그곳에는 수많은 경찰차와 소방차가 모여들었다.
***
한 달 뒤.
팀 코리안 몬스터가 로스엔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드디어 왔네요.”
“그러게요. 일주일만이라더니.”
탁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공항을 벗어난다.
팀원들 대부분의 표정은 담담한 듯 싶지만 그늘이 끼어있었다.
계획대로라면 한참 전에 입국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두호의 요청으로 인하여 한 달이 넘어선 지금에야 미국으로 온 것이다.
두호가 걱정되니 개인 사비를 써서라도 오려했지만, 수미의 만류와 두호의 신신당부가 있어 진행하진 못하였다.
팀 전체가 미국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채호는 깨어나지 못한 상태.
주민과 채수는 간호와 국내 선수들을 위하여 한국에 남아있기로 했다.
얼마 전 예고편이 방송된 PRIDE-K 2.
1편보다도 더욱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며 참가자는 1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두호의 성공을 동기 삼아 이제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하나의 격투기 등용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탁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두호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한 듯 싶었다.
‘이게 팀인가.’
조금은 섭섭한 마음까지 느끼는 듯 했다.
지난 시간을 함께해온 팀원들한테까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이번 경기는 파이트매니아 사람들과 독자적으로 준비해보겠습니다. 경기 전 페이스오프 날 보시죠.
준모는 그러거나 말거나 두호를 볼 생각에 신나 있는 듯 했다.
“형님은 괜찮으시려나. 김치 없으면 밥도 못 드시는 분인데.”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처음 보는듯한 여성이었다.
검은색 단발머리.
평소와 달리 옅은 화장을 한 예수였다.
머리와 옷만 바뀌었을뿐인데 사뭇 달라보이는 그녀였다.
그녀가 핸드폰 시계와 태블릿 PC를 번갈아 본다.
“경기 일정을 보아하니 시간이 조금 촉박하군요. 곧바로 XFC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하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숙소는 XFC측에서 제공한다고 하네요.”
“XFC에서요? 요즘 왜 이러나 몰라.”
탁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유가 있었다.
XFC가 어느새부터인가 너무나 협조적이었다.
두호를 위해서 일방적인 편의를 봐주고 있다 생각할 만큼.
“신기한 일이네요. 좋은 일이기도 하구요.”
준모가 짐을 번쩍 들어 방지턱을 넘어간다.
“일단은 택시로 이동하시죠. 호텔은 저녁에 가는 것 같으니 차량 대여는 다음 날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일행들의 짐은 단순히 원정 경기 한 번을 소화할만한 양이 아니었다.
두호가 미리 말해준 것은 2월에 한 번 더 경기가 있을테니 짐을 단단히 싸놓으라는 얘기뿐이었다.
팀원들은 모두 앞으로의 일정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는 답답해했고,
누군가는 그저 신뢰했다.
그리고 준모는 마냥 좋았다.
***
XFC 기자회견이 열리는 라스베이거스의 한 카지노.
아직 정식 오픈전인 곳이라 XFC에서 경기 전 페이스오프와 계체량을 위해 특별히 섭외한 곳이다.
탁현과 예수가 핸드폰과 대기실의 입구를 번갈아 살펴본다.
“방이 되게 많네요.”
예수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지만 눈은 끊임없이 방 번호를 살핀다.
“격투기 단체는 원래 연말에 가장 바쁩니다. 사람들이 기념할 것을 찾다보니 티케팅 파워도 가장 쎄니까요. 더군다나 이번 메인 경기는 유례없을 정도로 알차지 않습니까.”
알도프의 9차 방어전.
두호의 탑 랭킹 진입전.
한 체급에서 2개의 경기가 진행되는 일도 드물뿐더러 가장 뜨거운 감자인 그들인지라 이번 PPV는 80만 장에 육박한다.
순간 준모가 멀리서 손을 번쩍 든다.
“여깁니다 1803호!”
“아. 잘하셨어요 준모씨.”
탁현이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걸어간다.
덩달아 코리안 몬스터의 발걸음이 모두 빨라졌다.
문 앞에 도착한 사람들이 망설이자 준모가 가슴을 툭툭 친다.
“사람들이 거 참. 이렇게 담이 작아서.”
준모가 거침없이 문고리를 잡자 탁현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준모씨. 잠시만...!”
하지만 탁현의 만류는 한발 늦었고 이내 문은 열렸다.
그리고 준모의 표정이 환해진다.
“형님!”
“어 왔어?”
방 안에서는 소파에 앉아 로엘의 경기 영상을 지켜보는 두호가 있었다.
준모가 글썽이는 눈으로 두호에게 다가간다.
준모 역시 이 정도로 오랜 기간 두호와 떨어져 있던 것은 처음이었다.
“형님...”
“뚝. 징그럽게 왜 이래.”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두호의 표정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 역시 오랜만에 본 준모와 팀 코리안 몬스터가 반가운 것이다.
파이트매니아의 데이비드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미스터 탁! 반갑습니다.”
“데이비드 오랜만이에요.”
탁현과 가벼운 포옹을 한 데이비드가 두호를 향해 손짓한다.
자신보다 먼저 인사를 나누라는 뜻이었다.
탁현이 두호와 말없이 포옹을 한다.
그러나 두호의 왼쪽 귀를 보고는 휘둥그레지는 탁현의 눈.
“귀가...? 어찌된 일입니까 두호씨!”
“하하.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 명씩 반가운 인사를 나누던 중 맨 마지막에 들어온 예수.
“오랜만이에요 두호씨.”
“네. 머리 자르셨네요?”
두호가 미소를 띄우며 살짝 예수의 머릿결을 손으로 만져본다.
어찌보면 실례되는 행동일 테지만 예수의 얼굴이 괜시리 붉어진다.
이윽고 예수와도 가벼운 포옹을 하는 두호.
데이비드가 박수를 치며 모두를 집중시켰다.
“자. 반가운 마음은 알겠지만 두호씨는 지금 페이스오프를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는 잘 되셨습니까?”
탁현의 시선이 로엘의 경기 영상으로 옮겨간다.
위력적인 스트라이커.
두호보다 더욱 농익은 선수이다.
자신이 직접 훈련과정을 지켜보지 못했으니 괜시리 걱정이 되는 것이다.
데이비드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준비요?”
그의 시선이 두호에게로 옮겨가자 어깨를 으쓱하는 두호.
두호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직접 마사지 한다.
두 사람의 느긋한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탁현.
그 순간 데이비드가 미소를 짓는다.
“탁현씨.”
“네.”
“준비가 되셨냐고 했죠?”
“그렇습니다만.”
데이비드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치켜올린다.
“만약 두호씨가 진다면. 전 감독직에서 은퇴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