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두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땀이 흥건한 이마를 손으로 닦아낸다.
“위험했어.”
손을 뻗어 자신의 앞머리를 만져본다.
동네 바보처럼 산발이 되어버린 머리.
이번엔 깊게 베인 왼쪽 어깨와 아랫배를 매만진다.
만약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떨어졌다면 바로크 대신 자신이 저렇게 누워있었을 것이다.
두호는 그를 마음속 깊이 인정했다.
‘그런 야망을 가질만한 사내였군.’
비상한 머리와 기백.
거기다 그 기질에서 나오는 탄탄한 실력까지.
이런 자가 만약 모든 걸 갖춘 환경에서 자랐다면 세상을 빛낼 인재가 되었을 것이다.
두호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아이고.”
바로크의 옆으로 칼을 툭 던지고는 그를 보며 살짝 고개 숙인다.
악연은 악연.
그러나 강자의 대한 예우와 인정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두호씨!”
“네. 동수씨.”
들어온 사람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동수였다.
너무 긴 시간동안 두호가 쉘터에서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두호가 그를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두호씨 몸에 상처가...헉!”
동수가 눈이 휘둥그레져 바닥에 쓰러진 바로크를 바라본다.
지금 두호의 상처와 바닥에 흩뿌려진 피.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 블랙러프의 리더이자 포그스컬스의 대장을 잡아낸 두호의 실력이다.
두호가 옅은 미소를 띄운다.
“저도 죽을뻔 했습니다.”
동수는 말없이 두호를 바라본다.
사선을 건너온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목숨을 잃을뻔 했다는 그 사실에 넋이 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호는 그런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면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농담까지 건넨다.
동수가 그의 앞에 바로 선다.
“영광입니다.”
두호가 혼자 씨익 웃으며 바닥에 수건 하나를 집어든다.
이윽고 아랫배 부분을 동여매며 동수를 바라본다.
“뭐가요?”
“이런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하하, 인정받으니 좋네요.”
두호가 부상 때문인지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동수에게 다가간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는지 눈이 찡그려진다.
힘겹게 동수 앞까지 도착한 두호가 그의 어깨를 툭 친다.
“지금 이 시간부로 다시 브라보 팀으로 복귀 하시지요.”
“네? 하지만 저의 임무는...”
두호가 살짝 고개 젓는다.
그의 이런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동수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당장 브라보로 돌아가. 제가 가르쳐준 것. 또는 실전에서 느꼈던 것을 브라보에게 전하십시오.”
“하지만 두호씨...”
두호는 단호했다.
그의 눈빛을 말없이 바라보는 동수.
자신 역시 제대로 된 현장 한번 뛰어본 적이 없는 초짜이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의뢰인이 의뢰 중단을 요구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필요없다는 불명예를 뜻하는 것이다.
두호는 그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동수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이윽고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동시에 들기 시작한다.
지금 이 미천한 자신이라도 필요로 하는 것은 옐로우 맘바다.
바로크를 죽였어도 아직 그들에겐 알도프가 존재하는 이상 전쟁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부디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십시오.”
지금도 밤낮없이 전투를 이어가고 있는 래진과 영철.
그리고 먼저 하늘로 떠난 알파팀과 상철.
이 전쟁에 시작점을 알렸던 선배 브라보들의 죽음.
동수의 표정이 아까와는 달리 의연해진다.
“끝까지 두호씨를 보필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차를 준비 해놓을 테니 그걸 타고 가시죠.”
“네. 감사합니다.”
동수는 몸을 돌려 쉘터 밖으로 벗어난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지금껏 자신과 있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당한 옐로우 맘바의 일원.
그 자체였다.
동수가 밖으로 나가버린 후 두호가 쓰러져 있는 바로크를 바라본다.
“이제 어느정도 갈피가 잡혔구나.”
이 전쟁은 끝날 것이다.
옐로우 맘바의 완승이냐.
아니면 포그스컬스의 불후의 일격을 맞은 참패냐.
알도프가 두호의 눈에 어른거린다.
“곧 보자고. 애송아.”
***
레이첼은 컴퓨터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기사의 한 줄.
- 알도프 은퇴선언. 남은 두 경기 모두 계약대로 경기를 치룬 뒤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여우 같은 새끼...”
평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레이첼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침이라도 뱉고 욕지거리라도 시원하게 하고 싶은 심정.
하지면 평소 조용하던 그녀의 업무용 채팅창은 오늘따라 난리였다.
-3월 이후 챔피언전 자격을 주십시오.
-레이첼 저희 선수가 챔피언전을 요청합니다.
-만약 저희 선수에게 챔피언전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저희는 킹 챔피언쉽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하이에나 같은 새끼들.”
그녀의 채팅창을 어지럽히는 존재들은 다름 아닌 미들급 랭킹권 선수들이었다.
알도프의 은퇴 소식을 접하면서 득달같이 챔피언전을 요구하고 나온 것이다.
호랑이가 빠지자 여우가 왕노릇을 하려는 모양새.
그 역겨운 기회주의자적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레이첼이었다.
“스포츠 선수가 없구나.”
도전해서 노력하고 쟁취해낸다.
이런 것을 보지 못한 지가 참으로 오래된 것 같다.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를 바라보던 중 누군가 방문을 노크한다.
-똑똑!
레이첼은 의아한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없는 시간.
지금 문을 두드릴 사람이 없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레이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름 아닌 두호였던 것이다.
“두호씨. 이 시간엔 어쩐일...세상에!”
만신창이의 두호를 보며 레이첼이 황급하게 달려나왔다.
그의 몸을 살펴본다.
온몸엔 자상이 가득했고 피는 말라붙어 마치 얼룩처럼 되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그러나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잘려나간 왼쪽 귀 윗부분.
“어찌된 일이세요. 설마 알도프가...?”
“아닙니다.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빨리 XFC 닥터들을 호출할게요. 잠시만요”
“배려 감사합니다.”
레이첼이 자신의 자리로 뛰어가 급하게 핸드폰을 붙잡는다.
메디컬 팀장에게 전화를 걸던 도중 두호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다.
“두호씨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세요. 저희가...아 네! 레이첼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그녀가 메디컬 팀장에게 전화를 하는 동안 두호는 천천히 소파 자리로 이동하였다.
털썩 자리에 앉은 두호가 통증을 다스리려는 듯 차분하게 숨을 내뱉는다.
“네. 그럼 신속하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레이첼이 다시 두호에게 다가간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레이첼이 눈을 찌푸리며 두호의 몸을 살펴본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더군다나 말라 붙어있지만 피의 양을 추측해 본다면 살아있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먼저 병원을 가시지. 팀원들은 어쩌시고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팀원들한테도 못 알릴 사정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두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슬쩍 미소 짓는다.
“오는 길에 기사를 봤거든요.”
“아.”
레이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알도프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한 번의 기회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두호의 말을 들은 레이첼은 깜짝 놀랐다.
“그럼 마지막 경기를 하시겠다는 얘기에요?”
“당연하죠.”
“하지만 두호씨...”
지금 그의 몸 상태는 경기는 고사하고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해 보인다.
만약 무리하게 경기를 강행했다가는 부상이 재발하여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닌 것을 아시잖아요. 아쉽지만 기회는...”
“이 모든 것을 딛고 일어나야 챔피언으로 불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레이첼은 말을 잃었다.
챔피언.
이 얼마나 당연시 해왔던 말인가.
수많은 파이터들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을 20살짜리 소년에게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호씨 하지만...”
“레이첼. 사업가로서 선택하시죠.”
레이첼은 한 방 얻어 맞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업가에게 필요한 것은 멀리보는 눈도 있지만 뻗으면 닿을 것을 확실하게 가져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자신은 왜 두호를 걱정하며 이 경기를 망설이는가.
두호의 상품성이 아까워서?
아니면 백두호라는 선수를 보호하고자?
둘 모두 틀렸다.
“단순히 저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필요 없습니다. 제 인생 제가 선택하고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당신에게 돈이 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이번 경기 무리 없이 출전 하실 수 있습니까?”
“피를 쏟는 한이 있더라도 나갈 겁니다.”
레이첼이 두호를 바라보았다.
두호 역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같이 바라보았다.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퍼포먼스가 필요합니다.”
하위 랭커인 두호의 챔피언전을 추진하기 위해선 그만한 실력행사를 보여줘야 한단 뜻이다.
“네.”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본다.
이 단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지만 자신이 조종할 수 없는 흐름이 생겼다.
선택을 해야 했다.
“해봅시다. 두호 선수. 저희도 돕겠습니다.”
“공정성에 어긋나지 않나요?”
두호가 옅은 미소를 띈다.
레이첼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업가적인 마인드로는 두호씨가 이기는 게 훨씬 돈이 되거든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두 사람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는 동안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 대표님. 메디컬팀입니다!
“들어오세요!”
메디컬팀이 의아한 표정으로 들어온다.
“대표님. 저희를 어쩐일로...”
이윽고 눈을 돌리자 두호의 상태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가시죠. 메디컬룸에서 치료 도와드리겠습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두호가 기우뚱 거리며 일어나자 레이첼이 손을 뻗는다.
레이첼이 미소를 지으며 두호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준다.
“신세라뇨. 선수들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XFC에 역할인걸요,”
“감사합니다.”
두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메디컬팀을 따라나선다.
레이첼이 그를 배웅하다 문이 닫히니 다시 소파에 털썩 앉는다.
“아무리 사업가라도 저 어린 선수로 돈을 버는 것은 유쾌하지 않단 말이죠...”
***
문이 쾅하고 부서지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온다.
야시경과 방탄조끼까지 착용한 그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격실을 점령한다.
이윽고 유리문이 하나 보이자 맨 앞 선두에 선 사람이 곧바로 권총으로 유리문을 부수고 진입한다.
“샅샅이...어?”
쓰고있던 야시경과 마스크를 벗어던진 사내.
래진이었다.
진입해 들어온 사내들은 다름 아닌 찰리팀이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 개 같은 상황이냐...”
“무슨 일이십니까?”
다른 격실을 수색하던 영철이 그의 옆에 선다.
이윽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바로크를 보며 그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게 뭔 상황이죠.”
래진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집어든다.
-스컬킹 다운. 이 시간부로 임무를 종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