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179화 (179/204)

179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여우나 늑대가 아니었다.

바로크는 독수리와 같았다.

두호의 앞 머리칼이 잘려나가며 칼이 스쳐 지나간다.

두호가 고개를 젖혀 피해냈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빠르다.’

자신이 싸워본 사람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바로크의 칼은 날카로웠다.

이윽고 빗나간 칼을 재빨리 회수해 이번엔 횡(橫)으로 긋는다.

휙!

두호가 바닥을 굴러 바로크의 거리를 벗어난다.

바로크가 칼을 반대손으로 바꿔잡으며 씨익 미소 짓는다.

“칼을 안 무서워하네. 역시.”

바로크는 천천히 두호의 몸을 훑어보았다.

안정적인 무게중심.

칼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과 어깨 모양을 쫓는 눈.

‘확실히 프로다.’

이번엔 두호가 먼저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바로크의 하체를 노린 듯 아래로 향하는 칼.

그러나 바로크는 피하지 않았다.

속임수를 간파한 듯 오히려 자세를 낮춰 단단하게 맞받아칠 준비를 한다.

그의 예상대로 하체가 아니라 가슴으로 향하는 칼.

반대손으로 날아오는 두호의 칼을 쳐내고 망설임 없이 종(縱)으로 긋는다.

두호는 단 한 발자국을 옮겨 그의 칼을 피해낸 다음 섬전같은 속도로 목을 향해 찌른다.

그러나 목을 시계방향으로 크게 돌린 바로크가 두호의 뒤로 빠져나간다.

이윽고 곧바로 두호의 옆머리를 향해 킥을 날려보지만 두호가 두 손을 모아 방어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엄청난 공격과 방어.

바로크가 손목을 툭 털며 두호를 바라보았다.

“내가 병신인 줄 알아?”

“뭔 소리지.”

두호는 아까의 존댓말은 사라졌고 평대하기 시작했다.

“훈련과 경험이 녹아 들어있는 네 움직임. 운동선수가 단순히 반사신경으로 쫓는 게 아닌데?”

바로크 미소를 지으며 두호를 바라보았다.

“정체가 뭐야?”

수 없이 전쟁터를 겪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공포의 결여.

공포가 결여되면 그때부터 자신이 겪은 모든 상황은 정보가 된다.

그 정보를 가지고만 있어도 실력이 늘고 눈은 정확해지며 몸은 발달하기 마련이다.

바로크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칼을 잡는 솜씨부터 자신을 쫓아오는 속도까지.

단순한 운동선수가 아니다.

두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그 의미를 알아챈 바로크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같이 온 놈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건가?”

동수는 아예 쉘터 바깥으로 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

두호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바로크를 바라본다.

“김도혁.”

“뭐?”

자신이 잘못 들은 것 같아 고개를 내밀고 되물어본다.

“전 옐로우 맘바 브라보 캡틴 김도혁이라고.”

잠시 말없이 두호를 바라보던 바로크가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 실성한거야? 아니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놀리는 건가?”

“272명.”

두호가 자신이 칼을 손아귀 안에서 핑그르르 돌린다.

“그날 이라크 모술에서 내가 죽인 놈들만 272명이다. 알도프 자식 얼굴도 봤고.”

“완전히 미쳤구만.”

“마지막 한 명을 물어봤는데. 내가 답을 안 해줬지. 안 그래?”

순간 바로크의 낯빛이 변했다.

방금 두호가 한 말은 알도프가 채호를 놓쳤을 때 자신에게 다가와 한 말이다.

“그걸 어떻게?”

“말했잖아. 나라고.”

전혀 이해되지가 않는다.

저 얼굴은 무엇이며 이 젊은 나이로 돌아온 것은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두호가 칼을 허공으로 툭 던져 다시 잡아낸다.

아까와 다르게 손아귀 아래 방향으로 잡은 칼.

여지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자세를 잡는다.

뺨 옆에 붙은 오른손.

복싱의 크랩가드와 같은 왼팔 자세.

완벽하게 중심이 나뉘어진 11자의 발.

“이걸 말해주는 이유는...”

바로크가 두호가 멈춘 말을 뒤이어 말한다.

“오늘 나를 죽일 작정이니까.”

바로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마지막 싸움은 전쟁터에서 멋지게 총을 들고 싸울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보다 20살은 어린 꼬맹이랑 칼싸움이라니.

하지만 두호가 말한대로 정말 김도혁이라면 다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

바로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년을 김도혁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압!”

바로크가 전속력으로 두호에게 달려간다.

애초에 방어따윈 염두에 두지 않는 듯 공격일변도의 태세.

자신의 목에 구멍이 뚫리더라도 두호가 먼저 쓰러지는 것을 보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였다.

현란한 칼의 움직임.

샤아악!

두호는 마치 비를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두호의 몸에는 상처들이 늘어났다.

처음엔 오른팔.

그리고는 왼쪽 어깨.

치명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두호의 입장에서도 피하기가 힘들만큼 어지러운 공격이었다.

두호는 불현듯 황성태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 눈과 귀는 실로 얄궂은 감각이지. 속이기도 속기도 쉬우니까. 그러니 베테랑의 칼끝은 쳐다보는 게 아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간파하기 위해 상대의 머릿속을 봐야 하는 법이다.

1분이 넘게 공격 한 번을 제대로 못 해보고 방어만 하는 두호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바로크의 눈에 고정되어 있다.

‘오른쪽 허벅지? 아니야. 그러기엔 발이 너무 얕게 들어왔어. 그렇다면 어깨인가?’

반격을 하지 않으면 머저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눈에 띄는 공격이 들어온다.

지독하디 지독한 허수의 연속.

하지만 멋모르고 달려 들었다가는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잡았다 싶으면 생뚱맞은 공격이 들어왔고 그로 인해 두호의 몸엔 상처가 더욱 늘어난다.

그 순간 팔뚝 위가 꽤 깊게 베인다.

서걱!

처음으로 정타에 가까운 자상이었다.

바로크는 전혀 지치지 않는 듯 쉼 없이 두호를 공략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공격이 먹힌다 싶으면 한 방을 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닳고 닳은 베테랑.

단번에 사냥할 수 있는 것은 소나 돼지 같은 가축뿐이다.

‘이놈은 호랑이다.’

두호를 살려 보내면 분명히 더욱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다.

래진과 옐로우 맘바 따위는 비교도 못 할 만큼 엄청난 산불이 되어 자신들을 덮칠 것이다.

‘여기서 잘라내야 한다.’

지금껏 공격보다 훨씬 작은 스텝이 움직였다.

두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거리가 짧으니 자연스레 중심은 무너진다.

바로크의 눈이 빛난다.

‘지금!’

두호의 목을 향해 그어지는 칼.

두호는 차라리 뒤로 넘어지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아예 몸을 뒤로 눕힌다.

사악!

두호의 턱에 실선이 생기며 피가 베어 나온다.

뒤로 나자빠진 두호가 한 바퀴를 굴러 신속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손가락으로 턱을 살짝 찍어본다.

피가 묻은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는 두호.

바로크가 미소를 지으며 방금전 자신의 동작이 아쉬운 듯 허공에다가 재차 휘둘러본다.

“힘이 너무 들어갔어. 조금만 부드러웠으면 그 목이 잘렸을 텐데.”

“아니. 넌 절대로 내 목을 못 벤다.”

“미친놈. 뭐라고?”

바로크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두호를 바라본다.

하지만 두호의 표정은 아까 전과는 달리 확실히 여유로워졌다.“

두호가 처음과 같이 칼을 툭 던져 주먹 아래쪽으로 향하게 칼을 들었다.

“보면 알아.”

이번에는 두호가 다시 달려든다.

얼굴로 향하는 찌르기 하지만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바로크가 칼로 쳐낸다.

맥없이 두호의 품이 벌어진다.

그러나 바로크의 표정은 당황했다.

두호의 칼이 너무나 가벼웠던 것이다.

그 말인즉슨 다른 노림수가 있다는 것.

두호가 그대로 낙법을 하듯이 바닥으로 굴러 바로크의 발목을 베어낸다.

서걱!

“크윽!”

바로크의 자세가 무너지며 칼을 떨어트리고는 무릎을 꿇는다.

언제나 흐름은 찰나에 바뀐다.

두호가 칼을 찌르자 급했는지 바로크가 맨손으로 잡아챈다.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있지만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지 표정 변화가 없다.

두호가 칼끝을 살짝 돌려 손바닥으로 후벼 들어가게 했다.

바로크의 눈이 순간 떨렸다.

두호는 깨달았다.

‘그저 버티고 있는 것이구나.’

아파하는 모습마저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 남자의 독기는 어디서 기인된 것인가.

피가 손바닥에서 주르륵 떨어져 바닥이 흥건해진다.

“누구나 살다보면 빌어먹을 순간이 온다 그러더라고?”

바로크가 미소를 지은 채 두호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서로 칼을 맞잡은 채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여기서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바로크는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근데 그 빌어먹을 순간이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였다...”

가난한 국가.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던 난민.

전쟁의 풍파 속에서 빌어먹고 훔쳐먹을지언정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아이.

어린 동생의 손을 붙잡고 총알을 피해야 했던 바로크였다.

“그러니 그 삶의 끝에서 얻은 건 독기밖에 없어.”

칼날을 더욱 세게 붙잡는 바로크.

피는 더욱 흘러나오고 이제는 줄기가 된다.

“니가 진짜 김도혁이라면. 그냥 받아들여.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은 모두 운명이었던 것 뿐이야.”

바로크가 두호의 앞가슴을 뻥하니 차버린다.

뒤로 넘어진 두호와 바닥에 누워있던 바로크가 동시에 일어난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닮은 듯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것이 달랐던 두 사람이었다.

“죽어. 이 개새끼야!”

“으아아아아!”

서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든다.

죽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만약 이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자신의 삶마저 부정당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인 바로크였다.

두호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바로크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수 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동료들.

그들의 복수를 해야 했다.

사사롭다 해도 상관없다.

내로남불이라고 욕해도 의미 없다.

그저 이 불행의 고리 중 하나를 끊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도혁의 어깨가 깊게 베인다.

바로크의 허벅지로 칼이 꽂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서로의 목숨을 거둬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두호의 아랫배에 칼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서늘한 감각에 눈이 찡그려진다.

- 더러운 제 영혼으로 저지른 잘못. 이 아이의 몸만큼은 용서해주십시오.

팔뚝을 베어낸 두호가 가슴팍에 재차 칼을 찔러넣으려 하자 바로크가 오히려 그를 껴안아 공간을 없앤다.

핑그르르 몸을 돌려 두호의 등에 칼을 꽂아 넣은 바로크.

- 전생에 지은 죄를 모두 씻어내기엔 이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선택했습니다.

두호는 바로크의 아랫배에 칼을 찔러넣는다.

그를 밀어내며 연거푸 복부를 찌르니 바로크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천 년 동안 불에 타오르더라도. 차가운 얼음 속에서 천 년을 갇혀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책장에 부딪힌 채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두 사람.

바로크가 두호의 등에 꽂힌 칼을 뽑아 휘두른다.

두호의 왼쪽 귀 일부가 잘려나간다.

귀가 잘린 곳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제가 뿌린 불행의 씨앗 제가 거둬가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공명정대한 당신의 앞에 설 때 이 아이의 죄는 하나 없다 말해주십시오.

허리부터 목.

목부터 머리까지 온 힘을 다해 뒤로 젖힌 두호.

“으아아아!”

두호가 쥔 피 묻은 칼이 순간 천장의 전등에 비쳐져 번쩍하고 빛났다.

이윽고 바로크가 무릎을 털썩 꿇으며 목을 부여잡는다.

그의 눈빛은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복잡했다.

- 그렇다면 이승과 저승 그 어느 곳에서도 저는 후회하지 않고 당신이 내린 벌 달게 받겠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바로크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

그러나 힘겹게 부풀어 오르던 그의 등이 멈춘 것이 보인다.

자신의 삶을 바꿔보자 악인이 되었던 바로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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