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4년에 한 번 오는 날.
레이첼은 말없이 한참 동안 알도프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 사람은 예의라는 것도 없을뿐더러 상대를 배려 없이 곤란하게만 하는 사람이다.
언질도 없이 이렇게 중대 사항을 턱 하니 통보하다니.
“자세히 좀 얘기해주시죠?”
표정은 겨우 숨겼지만 싸늘한 말투까지 숨기지는 못한 레이첼이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똑같은 분위기의 알도프였다.
“뭐 자세히 말할게 있나? 그저 계약을 마친다는 얘기지.”
“그럼. 은퇴를 한다는 건가요?”
“아마 그럴 것 같은데.”
확답을 주지는 않지만 은퇴를 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유나 알죠?”
이제는 레이첼 역시 마음이 완전히 떠난 듯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알도프는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조명 쪽으로 비춰 확인한다.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는 롤렉스.
“뭐 별 게 있나. 회의감, 열정의 부재 이런거지. 그리고 나도 오랜 기간 활동했잖아. 기록도 쌓을 만큼 쌓았고. 다른 미들급 선수들 배려도 좀 하고.”
“갑작스럽긴 하네요.”
“인생이 원래 그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지.”
레이첼이 굳은 표정으로 알도프를 바라본다.
“3경기 추가 재계약 제안 드립니다. 지금 받는 모든 경기 오퍼 금액 2배를 약속드리구요.”
레이첼은 지금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단순히 이 자를 잡아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MMA 만큼 챔피언의 정통성을 따지는 스포츠가 없다.
지금 두호가 발군의 경기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또 차기 미들급 대권후보로 급부상하고 있지만 이제 1전을 치른 선수일 뿐이다.
그는 경기외적으로도 체급을 키워야 한다.
인기와 영향력.
그가 완전히 알도프의 그늘을 지울 수 있는 정통성을 만든 다음, 그의 벨트를 뺏어와야 아무런 피해 없이 미들급의 시장을 이어갈 수 있다.
심지어 알도프의 남은 두 경기 중 한 경기는 두호와 같은 연말에 잡혀있다.
사실상 남은 것은 단 한 경기.
알도프가 고개를 젓는다.
“아냐아냐. 난 이제 마음이 떠났어.”
장난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그의 대답에 분노한 레이첼이 소파 손잡이를 꽉 움켜쥔다.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지켜 본 알도프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이윽고 여태까지의 짓궂은 행동은 온데간데 없었고 표정엔 알 수 없는 싸늘함이 가득차 있었다.
“얼마 전 나랑 마주친 그놈 말이야.”
레이첼은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백두호씨 말인가요?”
“어. 그 아시안놈.”
“네. 무슨 일이시죠.”
알도프가 슬쩍 미소 짓는다.
“그놈이 나를 내놓으라고 했었지. 아마?”
그날 경기장에서 직접 들었지만 왜인지 레이첼의 입을 통하여 확인을 하려는 알도프였다.
레이첼은 그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죠.”
“내 남은 마지막 한 경기 그놈이랑 붙겠어. 그 정도의 이벤트는 해주지.”
레이첼은 당황한 듯 눈이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낭패다.’
경험.
선수로서의 완벽한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
축구 선수들이 꼭 영국 리그가 아니라 벨기에 프랑스라도 이동해서 해외 무대의 경험을 쌓으라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경험만큼 완벽한 학습과 큰 성장폭을 만들어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두호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XFC에서 보여준 것은 미미하다.
레이첼은 입술을 깨문다.
‘만약 내가 두호씨에게 바로 챔피언전 오퍼를 준다면?’
두호보다 윗 랭크에 선수들을 모두 배제한 채 두호에게 챔피언전의 기회를 준다.
경험이 부족한 두호가 알도프를 꺾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패배한다면?
알도프가 빠져나간 미들급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순번을 무시한 채 챔피언전을 진행한 XFC에게도 비난의 여론이 쏟아질 것이다.
-그의 은퇴경기를 이딴 서커스 매치로 만들다니.
-백두호라는 놈한테 돈이라도 먹은 거냐 XFC?
이런 반응이 쏟아질 것은 당연한 얘기.
완전히 알도프에게 당한 것이다.
레이첼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묵묵부답이자 알도프가 미소 짓는다.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 어설프게 나를 밀어내려고 한 것에 대한 댓가를 치루라 이 말이야.”
알도프 역시 알고 있다.
XFC에서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당한만큼 갚아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곳에서도 통하는 말이다.
알도프는 소파 자리를 쾅 치고 일어난다.
“이만 가보지. 내일 저녁 먹기 전까지는 답변 들었으면 좋겠는데?”
레이첼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럼 내일 연락 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죠.”
알도프는 손을 흔들며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레이첼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내 실수야.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다니.’
레이첼은 머리를 감싸쥐며 생각에 잠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
그러나 마땅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니 달이 다시 보인다.
“어찌하면 좋을까...”
***
몬테나를 바라보는 고속도로.
양옆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미국을 찾는 여행객들이 한 번쯤은 와보고 싶은 도로이다.
가을을 지나가는 날씨다 보니 특유의 사람 키만한 밀밭은 모두 없어졌지만, 그 밭의 크기만으로도 미국의 기상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누군가가 보인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 100명에 육박한다.
“씨발, 이게 무슨 고생이냐.”
“좀만 참아. 좀 있으면 쉘터야.”
“미국의 반을 걸어서 이동하는 게 말이나 되냐.”
사내는 땅에 침을 탁 뱉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보이는 것은 끝없는 평야뿐이다.
“어쩔 수 없잖아. 차를 이용하면 검문에서 바로 잡히니까. 대표님이 미국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본다고 하셨으니까 조그만 참지.”
그들은 꼬박 수십 일의 밤을 새가며 이동에만 집중했다.
바로크가 말한 몬테나의 비밀 쉘터가 어느덧 하루 거리로 좁혀졌다.
이들은 모두 얼마전 인공섬에서 아카데미에게 패배한 블랙러프와 고용 용병들이었다.
아카데미의 끈질긴 추격에 숫자는 꽤 줄었지만 그래도 100명의 숫자는 유지하고 있었다.
“근데 여기는 안전해?”
“왜. 뭐 보여?”
“아니 그게...”
블랙러프의 용병들은 모두 한 나라의 군인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도망을 치는 쪽은 절대로 이런 평야로 이동하면 안된다.
쫓는 입장에서는 이런 평야는 추격을 이어 나가기도 쉽고 상대의 숫자를 한 번에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크는 자신들에게 이 루트를 알려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
“별다른 방법 없어. 자꾸 시끄럽게 할래? 가뜩이나...”
피슉!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동료를 쏘아보던 사내의 관자놀이로 무언가 관통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하늘을 뒤집는 소리.
덜컹!
한 사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격이다! 산개해!”
“이런 개....”
사내들은 다급하게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지만 저격총의 소리는 한 번 더 들려왔다.
도망치는 사내들 중 한 명이 어깨가 터져나가며 쓰러진다.
“제길!”
쉘터가 코 앞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총소리는 멈췄고 더이상 쓰러지는 사내들 역시 없었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부하들을 지켜보며 무언가 께름칙함을 느낀 블랙 러프의 사내.
“왜 저격을 ...”
순간 머릿속에 든 한 가지 생각.
“이 씨발! 다시 집합해!”
이 숫자의 인원을 모두 저격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더군다나 모두가 흩어지는 상황 속에서 저격 소리를 들려주었다는 것 역시 이상하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
흩어지길 바라는 상대의 노림수다.
그러나 이미 저격으로 인해 꽤 멀어진 거리로 뿔뿔히 흩어지는 사내들을 보며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사내가 멀리서 걸어온다.
“오. 감 좋은데.”
나타난 사내는 다름 아닌 래진이었다.
그의 옆에는 세 명의 찰리 팀원이 존재했다.
“우리를 흐트려놓겠다?”
블랙러프의 사내가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었다.
이미 인공섬에서 격전으로 탄은 모두 소비한 뒤였기에 쓸만한 무기는 칼밖에 없는 것이다.
래진은 그것을 알고 직접 나타난 것이다.
“아무리 양 떼라도. 모여있으면 사냥하기가 힘드니까.”
적은 숫자가 다수를 이기는 기초적인 방법.
각개격파.
피곤과 긴장감으로 인하여 잊고 있던 기초를 잊은 대가는 혹독했다.
얼마전 인공섬에서의 전투로 미국은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내놓았다.
옐로우 맘바 역시 총기 사용이 쉽지 않은 상황.
그렇기에 저격수 역시 채 몇 발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
“곱게 죽어줄 순 없지.”
“살려줄 마음은 있다.”
블랙러프 사내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래진을 바라본다.
“뭐?”
“바로크 코와르키.”
래진이 칼을 뽑아들어 천천히 팔을 늘어뜨렸다.
“어딨는지만 말해. 그럼 놓아준다.”
“하하! 무슨 말 하는지 궁금해한 내가 병신이지.”
사내가 칼을 래진에게 겨눈다.
“죽여라 그냥.”
“그러지.”
래진이 망설임 없이 사내에게 달려들었고 사내 역시 자세를 잡았다.
달려드는 래진의 목을 향해 칼을 횡으로 휘둘렀지만 래진이 고개를 숙여 피해냈다.
순식간에 사내의 품 안으로 진입한 래진은 허벅지와 복부에 한 방을 찔러넣었다.
“커억.”
사내가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지려 하지만 래진의 칼이 한 발 빨랐다.
목을 사선으로 그으니 천천히 그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깔끔하게 사내의 목을 베어버린 래진.
사내는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절명했다.
래진이 싸늘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집어든다.
“전원. 청소 시작한다.”
***
두호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두호를 반겼다.
저녁을 준비하던 참인지 그녀의 앞치마는 상당히 젖어있었다.
“마침 잘 왔다. 저녁 먹었니?”
“아니요, 이제 먹으려구요”
“그래그래. 얼른 자리에 앉아라.”
두호가 천천히 식탁을 향해 걸어가자 마침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챔피언! 왠일로 일찍 들어왔구나. 요새 너무 바쁜 것 아니니?”
밝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은 아버지가 입맛을 다신다.
“오늘 반찬은 아주 풍년이구나.”
이윽고 어머니의 마지막 요리인 김치찌개가 탁자 중앙에 놓이며 어머니 역시 자리에 앉았다.
실로 오랜만에 가지는 가족들의 저녁식사.
그러나 왜인지 두호는 밥을 한 숟가락도 뜨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저녁 안 먹었다며. 왜 몸이 안 좋아?”
그러자 아버지가 숟가락을 놓으며 어머니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아버지와 같이 수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누누히 말하지만. 넌 내 아들이라는 걸 알아야 해.”
아버지가 농담을 던지자 두호가 피식하고 웃었다.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뜻이다.
두호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고생이 조금 덜 한지 아버지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 보다 훨씬 밝고 건강해 보였다.
어머니는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살이 조금 찌셨다.
두호가 고개를 숙인다.
“조금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떠나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