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가시밭길 끝엔 영광이 있다.
회의장 안에 팀 코리안 몬스터가 모두 모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평소와 같이 활기차지 못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피습사건이 아님을 잘 안다.
자신들이 모르는 모종의 상황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것들을 아는 순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암묵적인 걱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표님이 없으니. 굉장히 허전하네요.”
허전이 아니라 그의 공백은 대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기본적으로 XFC를 비롯하여 필린이 진행하는 수많은 비즈니스들.
그 일이 문제없이 잘 진행되는 것은 필린의 능력 역시 있겠지만 이채호라는 간판의 무게값 역시 존재한다.
필린을 신뢰한다기보다는 이채호라는 인물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들.
“이번 경기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가 감이 잡히지 않네요.”
채호의 부재로 인하여 당장 12월 31일날 준비된 XFC의 경기준비 과정이 불투명해졌다.
당장의 스파링 파트너부터 전지훈련까지.
숙소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항공편은 언제로 이용할 것인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슬며시 두호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며칠 동안 전혀 체육관에 나오지 않던 두호가 오늘에서야 나온 것이다.
탁현은 그런 두호를 보며 속으로 아파했다.
‘어째서. 저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 걸까.’
참 기구한 팔자라고 생각된다.
보통 사람은 한 번을 겪기도 힘든 일들이 그에겐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얼룩진 그의 젊은 시절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을 텐데 말이다.
그 순간 누군가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별다른 일정이 없던터라 전혀 예상을 못한 눈치였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수미였다.
두호와 동수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예수 역시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자연스럽게 원래 채호가 앉던 자리에 착석하는 수미.
그녀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울상인 그들의 표정을 보며 수미는 옅은 미소를 띄운다.
“다들 왜 이렇게 울상이에요. 이채호 대표가 저렇게 번듯이 살아있는데.”
탁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죠. 하지만 일의 지장이 많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끊이지가 않네요.”
예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음. 여기 회의 참여하는 값이 굉장히 비싸. 큰돈을 쓰니 나이에 맞지 않게 조금 거들먹거리게 되네요?”
그녀가 알 수 없는 농담을 던지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두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 이채호 대표 다음으로 가장 많은 필린의 지분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채호 대표의 권한 대행을 맡게 되었습니다.”
팀 코리안 몬스터는 크게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채호 대표의 피습 사건으로 필린의 주식은 상당히 큰 폭의 하향곡선을 그렸다.
만약 그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필린이라면 투자 가치는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귀신같이 주식은 원 상태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대형 투자자 조수미의 투자 소식과 몇몇 굵직한 주주들이 필린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수미는 두호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고생 많으신 것 같아서 애로사항이나 해결해드리려고 이 늙은이가 왔습니다.”
“네?”
탁현과 채수 모두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두호가 수미를 바라본다.
“훈련 캠프와 파트너 선정. 기타 발생하는 부대비용 일체. 저희가 원하는 대로 승인 부탁드립니다.”
“그래. 또?”
10억을 가뿐히 넘는 비용이지만 수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승인했다.
두호는 손을 들어 보인다.
“트레이닝 캠프를 더욱 길게 사용하고 싶습니다.”
“근데 그 캠프가 어디누?”
“로스엔젤레스입니다.”
예수가 번쩍 손을 들어 대답하자 수미가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쩜 그리 내 젊었을 때를 똑 닮았을까.”
예수는 민망한 듯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런 관련된 일들이 모두 필요한 일이니까 하겠지. 여기 대표가 탁현씨라고? 그분이 누굴까요?”
“접니다. 반갑습니다.”
탁현이 슬쩍 손을 들자 수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다운 인상이 한 눈에도 진중해 보이는 사내이다.
“필요하신 것 다 결제 올리시면 제가 결제하겠습니다. 안된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추진해 줄터이니 걱정 마시구요.”
“분에 넘치는 호의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호와 동수를 바라보는 수미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방금전 까지는 그저 밝은 미소였다면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생긴다.
“자네가 부탁한 것까지 준비해 놓았으니. 내일 비행기로 출발하면 될 걸세.”
팀원들끼리 전혀 상의 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탁현과 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
수미가 그들을 바라본다.
단 한마디의 말도 붙이는 걸 허락하지 않는 위엄.
그녀에게 느껴지는 기운에 탁현과 채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개인적인 행사라 공개하기는 그렇고. 그저 일주일만 두호씨를 빌리자는 겁니다. 괜찮겠지요?”
탁현과 채수는 할 말이 많은 듯 싶었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어려운 일들을 순식간에 해결해준 그녀였기에.
채호와는 다른 리더십의 소유자인 수미.
그들의 시선이 두호에게로 옮겨간다.
두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마치 여태 저질러왔던 독단적인 행동들에 사과하듯.
탁현과 채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말하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겠죠, 1주일간 몸 관리 잘 부탁드립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톡톡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정 정리해서 다음주에는 출발할 수 있도록 진행하세요. 그리고...”
수미는 두호와 동수를 바라보며 따라 나오라는 듯 고개짓을 했다.
천천히 일어나는 두 사람.
수미가 싱긋 웃으며 체육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늘 고생하는 것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기쁨이 되어주는 여러분께 대신 감사의 말씀 전해요.”
몸을 돌려 나가는 수미.
그녀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어딘가 모르게 뭉클함을 느끼는 팀 코리안 몬스터였다.
***
케이지 앞 계단에 앉은 수미.
그의 옆에 두호가 앉아있었고 동수는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수미가 그를 올려다본다.
“자네도 앉지.”
“서 있는게 편합니다.”
“늙은이 목 부러트릴 생각이면 그렇게 계속 있고.”
전혀 농담같지 않은 말에 동수가 당황하며 서둘러 자리에 앉는다.
“그래. 알아보니 미네소타 주 워스키쉬라고 하더군.”
“멀군요.”
동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신뢰 가능한 정보입니까?”
적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확실하거나 함정이거나 둘 중 하나다.
너무나 뚜렷한 정보이기에 속이기도 쉬울뿐더러 함정이라면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것이 뻔하다.
“상관 없습니다.”
수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호를 바라 보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눈빛이었다.
“태건이라도 붙여줄테니 같이 가는게 어떤가. 두 사람이면 너무 적은 듯 한데.”
“오히려 태건씨가 붙으면 더욱 위험합니다. 한국처럼 쇠붙이로 싸우는곳이 아니니까요.”
훈련되지 않은 아군은 오히려 적군보다 위험하다.
잘못된 판단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호가 동수를 슬그머니 쳐다본다.
“가르쳐야 할 것도 있습니다.”
동수는 의아한 눈빛이다.
싸움을 잘하는 것은 지난 격투를 통해서 알고 있다.
챔피언을 노리는 사람이니 운동신경이나 반응까지도 월등히 뛰어나다.
하지만 이런 군 작전류는 일반 싸움과 전혀 다르다.
자신같이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 아닌가.
자신을 너무 얕잡아 본다는 생각이 들어 동수는 조금 언짢았다.
‘저번 경호 얘기도 그렇고. 뭘 안다고 그러는 거지 두호씨는.’
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마지막 일수도 있겠구만.”
“네. 저는 이제 챔피언이 되기까지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니까요.”
동수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두호를 돌아보았다.
“이것 역시 협의된 내용입니까?”
두호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가 한 말이 있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나이는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한국에 있으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전쟁터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야 오히려 편하게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장부가 집을 나서는데 그만한 각오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수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호를 바라본다.
“부디 품은 큰 뜻 이루고 돌아오게나.”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어르신.”
두호 역시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돌아서려는 수미를 두호가 살짝 안는다.
수미가 징그럽게 왜 이러냐는 듯 살짝 밀어낸다.
하지만 그녀가 두호를 안아주지 않은 채 밀어내는 이유는 하나였다.
손주 같은 두호를 정말 못 보게 될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생하게나.”
“건강하십시오.”
수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두호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레이첼의 사무실.
그녀는 컴퓨터에 앉아 이채호 대표의 피습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구나.”
얼마 전까지 자신과 화상회의를 했던 사람이 순식간에 목숨이 위태위태하다.
하지만 자신은 알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알도프를 목표로 한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겪는 일이란걸.
그녀는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맑은 하늘에 덩그러니 떠 있는 달.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처연하게 떠 있는 달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나 역시 은퇴를 할 때가 된건가.”
지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밀자 레이첼은 고개를 젓는다.
아직 자신은 해야 할 일이 많다.
“피곤해서 그런지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오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대표의 방을 그 누구도 저렇게 불쑥 들어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의 면면을 보고는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이해했다.
이 사람은 충분히 이럴 사람이니까.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죠?”
레이첼은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는 소파로 이동한다.
“알도프.”
“긴급하게 논의할 일이 있어서.”
“네. 이쪽으로 앉으시죠.”
자리를 안내하던 레이첼이 알도프의 손을 바라본다.
얼마전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전해 들었다.
부상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아직까지 감겨져 있는 깁스.
알도프가 털썩 자리에 앉자 레이첼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의논할 일이 뭐죠? 지금 저희가 할 말이...”
레이첼은 달력과 자신의 일정 다이어리로 사용하는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렇다 할 일정과 안건이 없어 다시 알도프를 바라본다.
“재계약도 아니고. 아직 두 경기가 남았잖아요.”
알도프는 다리를 꼬으며 거만하게 자세를 잡았다.
레이첼의 눈썹이 순간 꿈틀하지만 다시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여간 안하무인이라니까.’
“뭐 나야 당신과 얘기할 것이 재계약밖에 없지.”
“벌써부터 재계약을...?”
그 순간 알도프가 손을 들어 보인다.
“남은 두 경기를 끝으로. 난 XFC의 미들급 챔피언 자리를 내려놓고 은퇴할 생각이야.”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젖혀 뒷목을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