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가시밭길 끝엔 영광이 있다.
어김없이 보육원 후원 목록을 살펴보고 있는 황성태.
어느덧 가을을 넘어서 초겨울을 바라보고 있는 날씨이다.
아이들의 건강관리와 시설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시기이니 그는 몇 시간째 가만히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똑똑!
황성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답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두호였다.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황성태의 표정에 놀라움이 스친다.
이내 표정은 수수한 반가움으로 가득 찼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얼마 전 경기도 이겼다지. 몸은 좀 어떤가?”
강원도 화천 산골에서도 경기를 모두 챙겨볼 만큼 두호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그다.
두호의 정강이와 이마에 감은 붕대가 눈에 들어온다.
단 1라운드이지만 너무나 거친 경기였다는걸 알고 있는 그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만하면 됐다.’
재기 불능의 몸상태도 아니고 격투를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부상은 흔한 일이라 생각하는 그였다.
오히려 이런 상처와 경험이 두호를 더욱 성장시켜줄 것이다.
두호가 미소를 짓는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대견하기도 하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아직은 철없고 어리광도 피워야 할 나이이지만 너무 일찍 의연해진 것 같아 괜히 씁쓸하다.
“자. 일단 앉지. 반가운 마음에 너무 세워놨구나.”
“감사합니다.”
두호가 소파 자리에 앉자 황성태는 늘 그렇듯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아껴놓은 찻잎인 듯 찬장 깊숙한 곳에 손을 집어넣는다.
찻주전자의 찻잎을 곱게 깔아놓고 끓기 시작한 물을 주전자에 조심스럽게 붓는다.
이윽고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소파로 걸어온다.
“한 입 들게. 그래. 챔피언이 이곳까지 어연일인가.”
“여쭙고 싶은게 있어 왔습니다.”
황성태는 어서 물어보라는 듯 자상한 눈빛으로 두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고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그 분위기에 황성태는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차를 소리없이 마신 황성태는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시게.”
“포그 스컬스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황성태의 눈빛이 찰나이지만 떨렸다.
항상 빈틈없는 모습과 여유로운 그의 이런 당황은 두호 역시 처음 보는 것이다.
“그게 왜 궁금한거지.”
“알도프 코와르키, 바로크 코와르키 두 사람이 흉수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두호가 필리핀에서부터 시작된 한 가지의 생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그스컬스가 이 정도까지 우리를 노릴 이유가 없다.’
단순히 업계 최고?
그것은 우스운 말이다.
이 바닥 실력제일주의는 당연한 사실 아닌가.
그저 옐로우 맘바보다 실적이 더욱 좋으면 된다.
그들이 꿈꾸는 카르텔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경찰과 군대의 눈을 피해 조금씩 영향력을 퍼트리고 정부에 뇌물 좀 먹이면 그게 카르텔 아니겠는가.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야 한다.
지금은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뵈러 온 것이 아닌 옐로우 맘바의 초대 보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다.
두호는 내어준 차를 한 입도 마시지 않았다.
마치 대답을 듣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옐로우 맘바를 노리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혹시나 허튼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
“적어도 형을 죽인 사람의 살해 동기가 궁금한 것이 허튼짓이라면 맞습니다.”
황성태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처연하다.
마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듯.
“처음 옐로우 맘바를 설립했었을 때였네. 그때는 지금보다 규모도 작고 명성 역시 보잘것이 없었지.”
자신이 알기로는 옐로우 맘바의 창립 멤버는 15명이었다고 한다.
래진도 그 시절에 옐로우 맘바로 입사했고 막내라고 했다.
캡틴이자 보스의 역할을 맡고 있던 황성태.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하네. 대형 투자자를 만나거나, 업계에 전설이 될만한 일을 해내거나.”
그러나 사실상 방법은 한가지였다.
성과가 있어야 가능성을 보고 투자할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옐로우 맘바는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업계에서 우리를 알릴 수 있는 큰 사건을 찾았고, 때마침 소말리아에 일이 생겨 그렇게 아프리카행을 결정했네.”
그 시절 소말리아 지역에서는 반군과 정부군의 전쟁이 절정을 이루었을 때다.
과거 소말리아 정부의 퇴진을 원하는 쿠데타와 더불어 과격한 이슬람세력이 대거 잠입해 아비규환의 시대였다.
“미국을 포함한 유엔에서도 그들의 전쟁이 서둘러 끝나기를 바랬지만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지 못했던거지. 그래서 우리가 그 틈을 노린걸세.”
국제정세로 인하여 뾰족한 방법을 낼 수 없는 그들의 일을 자신들이 나서 해결한다면 큰 주목과 호의를 살 것이라 판명한 것이다.
황성태와 초대 창립 멤버들은 곧바로 반군의 후방을 노렸다.
보급로파괴와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고 반군의 가장 큰 세력인 에리가보 지역을 초토화 시키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보급로 파괴와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개개인의 실력이 워낙 출중한 옐로우 맘바라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에리가보 지역 점령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개인 화기로 정리해내기엔 지역이 너무나 광활해서 연대급 병력은 있어야 했다.
황성태는 자조적인 웃음을 띄었다.
겨우 잊고 지내던 자신에 대한 후회.
그것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
“내가 거기서 딱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서 라이트를 후리는데. 아 그 새끼가 턱에 한 대 맞으니까 정신을...”
한 시간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준모의 무용담.
사실인지 그저 상상일지 모르는 이야기를 한껏 집중해 듣고 있는 동수.
왜인지 고개도 끄덕이며 듣고 있다.
그 모습을 예수가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뭣 들 하는거야...정말.”
준모가 다음 이야기를 하려는 그 순간.
동수의 시선이 훽하니 돌아간다.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그가 이내 순둥한 얼굴로 머리를 긁는다.
“네. 형님. 제가 지금 화장실이 급해서 그런데...혹시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래. 동수 아우 다녀와.”
화장실이 정말 급한 듯 보육원 방향이 아니라 풀숲 방향으로 뛰어간 그였다.
그 모습을 본 준모가 아빠 미소를 짓는다.
“귀엽네. 짜식.”
“적당히 좀 해요. 만약 준모씨 싫다고 그만두면 어떡하려고.”
“이게 다 교육 아닙니까. 매니저 사상교육.”
“참내.”
예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준모는 담배 하나를 물며 멀어져가는 동수를 바라본다.
“근데 쟤는 근처에서 볼일 보면 되지 어디까지 가는거야?”
나무가 빼곡이 들어차고 풀이 무릎까지 자란 곳으로 들어온 동수.
정말 볼일이라도 보려는 듯 나무 앞에서 멈춰선다.
그러나 그가 꺼내든 것은 권총이었다.
주머니에서 소음기를 꺼내 권총에 장착한 동수가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관음증 있냐. 왜 계속 따라와서 지켜보는 거야.”
아무도 없는 듯 주위는 조용했다.
그 순간 근처 나무 위에서 한 사내가 뛰어내린다.
척.
“감 좋네?”
구렛나룻과 턱까지 이어진 수염을 가진 한 사내.
두 사람은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누군가 꿈틀하자마자 총을 겨눌 듯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돈다.
동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뭐 때문에 붙는 거야.”
“그건 니가 지키는 주인님한테 물어보고. 근데 너 같은 놈이 붙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두 사람 모두 권총이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긴장감이 극에 달하자 동수에게 어깨를 으쓱하는 사내.
“소음기를 달았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총소리 들리면 엉망 되는거 알지?”
그의 말에 동수는 대답 없이 그저 그를 응시했다.
동요하지 않고 상대의 행동을 파악하는 것.
사내가 과감하게 한쪽으로 권총을 던진다.
“맨 몸? 아니면 연장 하나 들고?”
그 말에 동수가 피식 웃는다.
권총을 다시 권총집에 끼워 넣은 그가 상의 품 안에서 칼을 꺼내든다.
“연장. 도망이라도 가면 귀찮아지니까.”
“그래. 칼질 좋지”
사내 역시 품에서 칼을 뽑아들고는 가래침을 탁 뱉는다.
“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던 사내의 표정이 돌변하고 순식간에 동수에게 달려든다.
동수의 얼굴을 향한 쾌검.
그러나 동수가 고개를 틀어 피해내고 곧바로 상대의 턱을 향해 종(縱)으로 칼을 긋는다.
어렵지 않게 고개를 숙여 피한 사내가 이번엔 동수의 허벅지를 노린다.
동수가 가볍게 자세를 바꿔 칼을 피해내고 사내의 앞가슴을 뻥하니 차버린다.
잠시 떨어진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실력에 당황한 듯 표정을 구긴다.
‘이런 놈이 갑자기 왜 접근한거지.’
‘목표물이 부상이라고 그래서 쉬울 줄 알았는데. 이 덩어리는 또 뭐야.’
서로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낀 듯 애초에 칼을 쥔 자세부터 바뀐다.
신호는 없었지만 둘 모두 동시에 달려든다.
급소가 아닌 곳은 공격할 마음도 없는 듯 치명상을 위한 공격만이 자행된다.
사내의 칼은 일반적인 군용 칼보다 조금 더 길었다.
성인 남성 팔뚝만한 크기의 칼은 동수가 연습해오던 거리감이 아니었다.
순간 동수의 앞머리가 슬쩍 잘려나간다.
그러나 동수는 당황하지 않고 깊게 칼을 찔러들어간다.
승모를 아예 꿰뚫어버릴 생각인 듯 깊게 집어넣는 팔.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내가 간발의 차로 깊게 피해낸다.
언제나 큰 공격이 실패하면 위험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동수의 자세는 무너졌고 사내의 표정엔 미소가 돈다.
“잘 놀았다. 이 새끼야!”
크게 횡(橫)으로 베어들어가는 칼.
동수의 목을 단숨에 그어버릴 듯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곳은 빼곡하게 나무와 풀들이 가득차 있는 산속.
더군다나 그의 긴 거리를 자랑하는 칼을 힘껏 휘두르니 애먼 나무에 박힌다.
사내가 당황한 듯 칼을 뽑아보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한 바퀴를 구르며 넘어진 동수가 정신을 차리고 이내 공격해 들어간다.
사내는 미련 없이 무기를 버리고 뒤로 굴러 동수의 칼을 피하였다.
사내가 표정을 구기며 전력질주로 도망간다.
‘젠장.’
이런 실력의 사내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너무 경솔하게 대처한 것이 문제였다.
멀어져가는 상대를 보며 동수가 곧바로 권총을 뽑아낸다.
푸슉푸슉.
그러나 이곳이 산속이라는 것은 동수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사내를 맞추기는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권총을 다시 재장전하는 동안 사내는 어느새 시야에서 멀어졌다.
‘제기랄.’
두호가 차를 향해 다가온다.
준모가 차에서 뛰쳐나와 그를 반기지만 그의 표정이 어딘가 낯설었다.
평소에도 무표정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어두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어깨가 축쳐져 힘없이 걸어오는 두호.
준모의 인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탁!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 탄 두호를 발견한 예수가 당황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