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가시밭길 끝엔 영광이 있다.
영철이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숨을 내쉰다.
시선이 천천히 간이 침대 위로 고정된다.
침대 위엔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래진이 보인다.
누군가 와서 치료를 해준 듯 한쪽 팔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링거가 꽂혀있었다.
피부 곳곳이 쓸리고 다쳐 엉망인 모습의 래진.
“형님은 괜찮으십니다. 하지만 아직 정신을 못 차리셔서 계속 누워만 계십니다.”
수화기 너머 상철은 떨리는 한숨을 내쉰다.
안도의 한숨이었지만 다시 걱정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20,30대야 살아만 있으면 몸이 금방 괜찮아지지만 이제 그의 나이가 어느덧 60이 다 되어간다.
부상을 입으면 쉽게 낫지 않는 나이.
-어떻게 된 일이야.
영철이 책임을 통감하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주무른다.
“저희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쉘터로 밀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전원 사살하긴 했지만 쉘터는 폭파당했습니다.”
사건의 경과를 말하는 영철이 이를 꽉 문다.
그도 분할 것이 자신들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대장을 지키지 못한 부하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에게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다.
분노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뒤섞여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드는 영철이었다.
-그럼 VIP는.
상철의 질문에 영철이 고개를 젓는다.
“이재하씨는 사망했습니다.”
이재하를 통해 블랙러프의 투자자들을 알아냈지만 그를 지켜내지 못하였다.
사실 영철도 그럴것이 포그스컬스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제대로 한 방 먹었구만. 그래 너네는 괜찮고?
“예. 저희는 전원 이상 없습니다.”
상철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아무말도 없었다.
-그래. 몸조리 잘하고. 형님 부탁한다.
짧은 한마디로 통화가 끊어졌다.
전화를 끊은 영철이 착잡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돌아본다.
급하게 임시거처를 마련하여 가구 하나 제대로 없는 곳에서 널부러져 있는 찰리팀.
수많은 임무와 격전으로 닳고 닳은 베테랑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의 표정엔 여유가 없었다.
단순히 임무가 실패했거나 큰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닌 완벽한 패배감을 느낀다.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그들이기에 이번 래진의 사건은 사기가 꺾이기 충분했다.
영철은 누워있는 래진을 바라본다.
‘형님...’
그러나 그는 아직 영철에게 평소처럼 웃어주지 못했다.
***
한국에 도착한 두호 일행.
늘 그렇듯 입국장을 걸어 나오자마자 엄청난 인원수의 취재진이 달려든다.
터지는 셔터음과 플래쉬 때문인지 여행객들이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그들은 막무가내로 달려들 수가 없었다.
경호원들과 필린의 직원들이 순식간에 두호 일행을 감싼다.
취재진 앞을 막아선 채호가 싱긋 웃으며 기자들을 차분히 진정시킨다.
“지금 저희 선수가 부상으로 인해 극도의 안정을 필요로 합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니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열테니 그때 필요하신 질문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호가 곧바로 몸을 돌려 두호를 향해 걸어간다.
경호원들과 필린 직원들의 도움으로 편안히 공항 문밖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두호는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맨날 경호만 해봤지. 이렇게 경호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네.’
그에게도 이색적인 경험인 것은 분명하다.
어느새 따라붙은 채호가 공항 앞에 서 있는 카니발을 가리킨다.
“일단 저 차로 이동하시죠. 기자들과 항공기 이용객들의 시선이 있으니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두호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빠른 속도로 차에 탑승한 두호와 채호 그리고 예수였다.
그들이 차에 탑승하자마자 미끄러지듯 공항을 벗어난다.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도로로 진입하자 그제서야 채호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레이첼을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네요.”
언제나 비즈니스중 가장 어려운 일은 실무관리자가 아닌 그 회사의 대표를 만나는 일이었다.
채호보다도 훨씬 더 큰 거물이기에 그 역시 미팅을 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두호의 실력과 상품성으로 일이 훨씬 쉬워졌다.
하지만 엄청난 일을 해내고 온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예수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대표님. 사실 레이첼과 경기 후 미팅을 가졌습니다만...”
그녀는 레이첼과 나누었던 대화를 천천히 채호에게 전달해주었다.
알도프에 관련된 흉흉한 소문과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보낸 두호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내용.
채호 역시 어느정도 사건의 전말을 안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도 알도프를 조사하다보니 루머가 많이 돌더군요. 사실상 레이첼 정도 되는 사람이 그렇게 언질을 줄 정도면 맞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말에도 예수의 얼굴이 그늘지자 채호가 씁슬한 표정으로 두호를 힐끔 본다.
알도프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게 기정사실이 되었는데도 두호는 한가롭게 차 창문으로 경치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정말 형님은...’
배짱이 좋은 것인지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채호가 어깨를 으쓱한다.
“뭐 시기적절하게 인원을 보충한 게 맞아떨어진 것 같네요”
창밖을 보던 두호가 채호를 향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인원을 보충했다는 말이 무엇인가.
채호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한 사내를 가리킨다.
어깨가 떡 벌어져 조수석 시트를 벗어날 만큼 큰 덩치의 소유자.
짧게 자른 머리로 인하여 위압감이 느껴지지만 의외로 얼굴은 순해 보였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 듯 슬쩍 뒤를 돌아본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백동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대로 얼굴을 바라보니 나이 역시 그렇게 많지 않은 듯 보였다.
두호도 동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채호를 바라본다.
“경호원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가 특별히 모셔왔습니다. 아무래도 신체적인 테러는 자기방어라 할지라도 이슈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두호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협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유명인이다.
더군다나 운동선수로서 민간인과의 마찰은 무조건적인 손해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예수나 준모를 위해서도 경호가 필요함을 느꼈는데 마침 채호가 동수를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신변을 맡길 수 있는 실력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단순히 덩치 크다고 경호를 잘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두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채호가 귓속말을 한다.
“YMNB 2023입니다.”
그 말을 들은 두호가 씨익 웃는다.
이어 그의 표정에 반가움까지 엿보인다.
YELLOW MAMBA.
뒤에 NB는 뉴브라보란 뜻이다.
그러니 2023년에 새로 뽑힌 뉴브라보의 팀원이라는 뜻.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
많이 봐줘야 스물 중반정도로 보였지만 벌써 옐로우 맘바로 뽑혔다는 것은 엄청난 실력의 보유자라는 뜻이다.
채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귓속말을 하였다.
“저도 저 나이쯤 입사했거든요.”
“알았어.”
두호와 악수를 나눈 백동수.
구 브라보의 캡틴과 신 브라보의 팀원이 만나는 역사적인 자리이지만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두호와 채호뿐이었다.
두호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예수를 한번 돌아본다.
이윽고 채호에게 말했다.
“저 화천 좀 다녀올까 합니다.”
“네? 좀 쉬시지 그러세요. 부상도 있으신데.”
한쪽 눈을 깜빡이며 채호에게 신호를 보내는 두호.
이내 채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하여간 쉴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예수를 돌아본 채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예수씨. 혹시 괜찮으실까요?”
예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그녀도 이번 미국행으로 고단할 텐데 전혀 그런 내색이 없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준모씨한테 연락을 해놓을게요.”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뒤따라 오는 준모에게 연락을 하는 동안 채호의 시선이 조수석의 동수에게로 이동한다.
“시작하자마자 첫 외근이네요. 두호씨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선배님 맡겨만 주십시오.”
채호는 옐로우 맘바에게 정식으로 경호를 의뢰했다.
현 상황에서는 마땅히 파견할 인력이 없어 옐로우 맘바 동수에게 경험도 쌓게해줄 겸 파견한것이다.
동수 역시 기쁜 마음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뉴 브라보 캡틴에게 채호가 과거 브라보 출신이라는 것을 들었다.
전설로 남은 과거의 브라보.
그들과 같은 전설로 남기를 목표로 삼은 기회이기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온 것이다.
차는 막히지 않았고 빠르게 서울로 이동할 수 있었다.
보육원 앞에 도착한 두호의 일행.
차 문을 열고 나온 준모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아 공기 여전하네. 음 피스톤칫.”
그 말을 들은 동수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고 예수가 한심하다는 듯 준모를 쳐다본다.
“피톤치드겠죠. 그리고 여기에 편백나무가 어디있어요.”
“그게 그거죠. 하여간 성격 이상해.”
그러면서 동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준모.
오면서 앞으로 함께 일할 경호원이라는 것을 들었지만 다년간의 조직 생활로 인하여 그는 알 수 있다.
지금 단단히 서열을 잡아놓지 않으면 기어오르는 놈들이 태반이다.
“동수씨.”
“네.”
동수가 준모를 바라본다.
그의 기를 죽이기 위해 차에 팔을 올리고 최대한 불량한 자세를 취한다.
어떻게 서 있는지도 모를 자세와 비정상적으로 치켜뜬 눈.
살면서 저런 몰골은 처음 보기에 동수가 흠칫한다.
‘뭐지.’
준모가 가르마를 쓸어넘긴다.
“몇 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하는 동수.
“26살입니다.”
“애기네. 완전 애기야. 응애야 아주.”
“네?”
뒤늦게 차에서 내린 두호가 준모의 모습을 보며 씨익 웃는다.
그저 준모의 행동을 뒤로한 채 곧바로 보육원을 향한다.
뒤에서는 준모의 패악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형이 나이가 많으니까 편하게 반말해도 되지? 형이 서울의 전설적인 조직 문우파의 넘버...”
그의 예절교육은 계속되었고 동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담배까지 하나 무는 모습이 가관이다.
“우리는 하나의 백. 둘의 두호 형님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준모의 말을 못 들어주겠다는 듯 예수가 재빠르게 두호의 옆을 따라붙는다.
“하여간 별꼴이야. 근데 두호씨는 화천에 왜 오신거에요?”
“아 원장님에게 말할 것도 있고 얼굴 좀 뵈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충분히 휴식을 마친 뒤 나중에 하면 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다급하게 올 정도면 심각한 일이 분명하다.
보육원 입구에서 멈춰선 예수.
두호가 왜 같이 멈췄냐는 듯 보자 그녀가 싱긋 웃는다.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저는 저분들과 차 안에 있겠습니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행동에 두호가 미소를 짓는다.
“고맙습니다. 차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금방 나오겠습니다.”
“천천히 말씀 나누시고 볼일 다 보세요. 그럼 이만.”
예수가 차를 향해 돌아가자 두호가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두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