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가시밭길 끝엔 영광이 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움직이질 않았다.
관객들은 멍한 표정으로 전광판을 바라본다.
전광판엔 관객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단 듯 대문짝만한 TKO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단 12초.
처음부터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던 경기가 아니라 더욱 놀란 것이다.
타 단체 챔피언이라 하지만 XFC에 비하면 골목대장 수준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데뷔 2전 만에 과거 전체 랭킹 4위까지 올라왔던 베테랑 파이터를 잡아냈다.
세계무대에서 나온 언더독의 반란.
너무 놀란 나머지 라스베이거스의 경기장은 침묵에 빠졌다.
한 사내가 벼락같이 일어나 고함을 지른다.
“그래 한번 가보자고 몬스터!”
그 고함을 기점으로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하며 소리친다.
“몬스터. 앞으로 미들급은 너한테 다 건다 알았냐!?”
“드디어 왔구나! 왕좌는 너를 위한거야!”
“몬스터! 몬스터!”
관객들은 두호의 별명을 연호하며 소리를 지른다.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환호성에 잠겨 아예 들리지가 않았다.
케이지로 메인 MC 앤드류가 입장한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레이첼을 힐끔 쳐다본다.
레이첼에게 무언가 지령을 받은 듯 끊임없이 대본을 확인한다.
-앤드류.
-네. 레이첼.
-달궈봐요. 우리 시원하게 사고 한번 쳐봅시다. 제가 준비해놓은 이벤트도 있으니까. 잘 정리만 해주시고.
-이벤트 좋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앤드류의 뒤로 메디컬 팀이 급하게 따라 들어왔고 쓰러져있던 볼크를 들것에 태웠다.
볼크의 세컨들 표정은 다양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침통함을 숨기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들것에 실려가는 볼크를 따라 그들이 패잔병처럼 어깨가 축쳐져 케이지를 벗어난다.
이곳은 승자만이 남을 수 있는 케이지다.
두호에게 가까이 다가간 앤드류가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외친다.
“언블리버블! 여러분들은 지금 새로운 대권주자를 보고 계십니다!”
앤드류의 외침과 함께 다시 한번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사실 겨우 랭킹권에 진입한 것이지만 앤드류는 벌써부터 대권주자라는 호칭을 붙였다.
그만큼 강렬한 퍼포먼스를 남긴 것.
관객들이 앤드류의 말에 아무런 딴지를 걸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다.
고착되어 있는 미들급 선수들은 언제부터인가 서로 승부를 내는 것을 싫어했다.
알도프라는 철권통치자.
어찌보면 XFC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지만 미들급 내부에서는 경쟁력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자신들끼리 치고박고 싸워도 어차피 챔피언은 알도프라는 생각에 점점 싸우기를 머뭇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착화된 미들급 서열을 전혀 개의치 않는 신성의 등장.
중량급 테크니션들의 싸움을 기대하던 팬들에게 두호는 가뭄 속 단비같은 존재다.
두호의 눈가에서는 피가 흘렀고 어느덧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탁현과 데이비드는 흔한 수건 한 장 가져다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두호의 모습을 보며 미소 고 있었다.
‘자극은 쎄야지.’
카메라의 담기는 모습까지 자극적이고 이목을 끌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더욱 그에게 관심을 가질테니까.
격투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마케팅 수단이다.
“백두호 선수. 이제 랭킹 15위로 진입에 성공하셨습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예상대로입니다.”
누가 말하냐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달라보인다.
적어도 두호의 이 답변은 애송이의 건방짐이 아닌 실력에 근간을 둔 자신감으로 보인다.
앤드류가 미소를 지으며 재차 질문한다.
“화끈한 KO. 2라운드 시작 12초만에 볼크를 압살해버린 이유는 XFC 수뇌부들 위한 퍼포먼스라고 봐도 괜찮을까요?”
자극적인 단어 선택과 노골적인 의도.
두호를 뜨거운 감자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고개를 숙인 채 있던 두호가 피식 웃는다.
막을 수 없다.
흐름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타는 거다.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댄 두호가 무대 아래의 앉아있는 레이첼을 바라본다.
“레이첼!”
그녀는 듣고 있다는 듯 자신의 귀를 톡톡 쳤다.
두호가 씨익 미소 지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윽고 뱉은 엄청난 한마디.
“알도프. 준비해놓으시죠.”
마이크를 툭 밀며 케이지 밖으로 걸어나가는 두호.
그의 발언과 퍼포먼스에 앤드류는 흥분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거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관중들에게 소리쳤다.
“코리안 몬스터입니다!”
레이첼 역시 만족스러운 듯 확인의 의사를 내비췄고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인다.
“하하! 코리언이 재미를 아는구만!”
“Let’s do this monster! (가보자고. 몬스터!)”
사람들은 케이지를 벗어나 대기실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끝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그 순간 레이첼이 PD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PD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송 중계 화면을 전환했다.
APEC 가장 높은 자리 VIP석에서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알도프.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며 중계 화면으로 송출된다.
자신이 화면에 나오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준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는 다르게 속은 천불이 난다.
‘레이첼. 이 돈 벌레 새끼가...’
노골적인 스토리텔링.
어떠한 경기든 잘 싸우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다.
라이벌 관계와 사건 사고가 함께 뒷받침 되어야 관객들이 몰입을 한다.
알도프의 대항마로 두호를 낙점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알도프.
‘애송이. 너무 눈에 띄었어.’
알도프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리안 몬스터입니다!
“캬. 도혁이 동생. 진짜 잘 치네.”
맥주 한 캔을 마시며 티비를 보고있던 래진.
그의 옆에 앉은 재하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기를 같이 관람하였다.
“아는 사람입니까?”
재하가 의아한 듯 래진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친한 지인 동생입니다.”
“대단하네요. 어린 나이에.”
래진 역시 재하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엄지를 내보인다.
잠시 다음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광고가 시작되니 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어디가세요?”
“다음 경기 보기전에 화장실이나.”
래진이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하던 중 어딘가에 시선이 고정된다.
쉘터 주변을 감시하는 메인 CCTV 영상 화면.
래진이 씨익 미소를 짓는다.
“이 새끼들 봐라...?”
그리고는 대충 벗어두었던 탄띠와 권총을 집어든다.
화장실을 간다더니 갑자기 장비를 착용하는 그를 보며 재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러자 래진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킨다.
“여기 계십시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네.”
래진은 화장실이 아니라 곧바로 밖으로 향한다.
어두운 밤
당장 코 앞의 상황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했다.
특히나 공사의 잔해물들이 널부러져 있어 함부로 움직였다간 다치는 곳이다.
그런 곳에 왜인지 사람 허리만큼 자란 풀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이렇게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강하진 않았다.
풀이 유독 흔들리는 곳을 유심히 보니 낮은 포복으로 기어오는 사내들이 보인다.
들개였다.
스무 명 남짓한 사내들이 야시경을 착용한 채 옐로우 맘바의 쉘터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로버트가 손목에 달린 송신기로 조심스럽게 말한다.
“전 부대원 현 위치와 상황 보고.”
보고를 받기 위해 멈춘 로버트.
잠시 후 귀에 꽂힌 수신기로 부하들의 보고가 들려온다.
-A섹터 이상없습니다.
-B섹터 이상없습니다.
-C섹터 이상없습니다.
보고를 받은 로버트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어보인다.
“오늘 우리에겐 훗날이란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늘 마무리 지을거야.”
로버트는 옐로우 맘바의 쉘터로 사용중인 정비소를 노려보았다.
오늘 바로크에게 받은 최후의 통첩.
-로버트. 만약 내가 필리핀에서 돌아올 때까지 이재하를 잡지 못한다면 너 역시 죽는다. 너만 죽으면 다행이지만 네 가족이랑 지인들까지 모조리 도륙낼거야. 그러니까 시체라도 들고 와. 다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로버트는 최근 옐로우 맘바 상대로 무엇하나 제대로 해결한 것이 없었다.
쓸모 없는 사냥개가 가마솥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옐로우 맘바의 찰리팀은 왜 인지 근래의 스탁튼에서 보이지 않았다.
찰리팀도 자리를 비웠고 래진이 혼자 이곳을 지키는 상황.
이런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른다.
더군다나 잘하면 래진이라는 대어까지 낚을 수 있으니 승부를 보려면 오늘이 맞다.
로버트가 송신기를 입에 가져다 댄다.
“진입해.”
잠시 멈췄던 접근을 느릿하게 다시 시작했다.
그 순간.
살짝 고개를 들어 쉘터를 바라보던 로버트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로버트가 착용하는 것은 다른 사내들이 착용한 단순 야시경이 아닌 열 화상 야시경이다.
인체의 온도로 벽 너머의 상태까지 확인할 수 있는 물건.
그러나 A 섹터 구역을 담당하는 사내들이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잔뜩 예민해진 로버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송신기에 대고 말한다.
“어이 A 섹터. 뭐하는 거야. 어서 움직여.”
그러나 수신기로는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작전중이니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답답한 표정으로 A 섹터를 노려보던 로버트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A 섹터의 낮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한 사내.
지금 일어서면 자신들의 침투 작전이 CCTV로 인해 들통날 것이다.
“저런 미친...”
말을 멈춘 로버트의 머릿속에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로버트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전 부대원 A섹터를 향해 격발한다! 빨리!”
들개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로버트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권총을 겨눈다.
A 섹터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내가 보인다.
래진이었다.
그를 향해 조준을 하려는 찰나.
팟!
팟팟!
어두웠던 이곳에 조명들이 켜지며 강한 빛이 쏘와진다.
“으악!”
야시경으로 갑자기 들어온 강한 빛으로 인해 사내들이 얼굴을 부여잡는다.
로버트 역시 얼굴을 한쪽으로 돌린 채 서둘러 야시경을 벗는다.
‘젠장.’
자신들이 침투했던 것을 래진은 이미 알아챈 것이다.
다시 꺼진 조명.
이어 몇 초 뒤에 다시 조명이 켜진다.
아마도 야시경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지 불규칙적으로 조명이 커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로버트가 자신의 옆에 쓰러지는 들개에게 소리친다.
“A 섹터로 유탄 쏴!”
“하지만 시야가 보이질 않아서...”
“답답한 새끼들!”
로버트가 들개의 등 뒤로 메고 있던 유탄 발사기를 벗겨 자신이 든다.
방금 전까지 래진이 서 있던 자리로 몸을 돌린다.
시야가 불편하여 정확한 조준이 안되지만 어림짐작하여 쏘려는 것이다.
‘죽어라.’
덜컥.
퓽!
마치 음료수 병이 열리듯 청량한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엄청난 폭발음.
쾅!
유탄이 맞은 바닥이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먼지가 자욱해졌다.
한쪽 편으로 몸을 던진 래진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미친놈들. 아주 오늘 날을 잡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