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화 : 가시밭길 끝엔 영광이 있다
마치 유명 레스토랑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듯한 바로크.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머레이의 표정이 어색하다.
‘대체. 어떻게 참아 온거지.’
용병에게 필요한 적성.
그저 잘 견디고 잘 참아내는 정도일 것이다.
첫 전투.
첫 살인.
첫 시체.
어느것 하나 익숙치 않을 자신들의 삶에서 그저 잘 견디고 잘 참는 재능이라면 용병으로서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크를 보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그에게 이것은 즐거움 그 자체인 것이다.
순수한 살의(殺意).
이런 남자가 어떻게 그동안 넥타이를 매고 펜대를 잡은 체 책상에만 앉아 있던 걸까.
어쩌면 이 남자가 돈을 버는 이유는 더욱 많은 살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닐까.
바로크가 머레이를 힐끔 돌아본다.
“맹혁한테 전했어?”
“그가 자주 가는 카페에 저희 쪽 연락처를 남기고 왔습니다. 가까운 시간에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바로크가 손수건을 탁하고 털어 다시 머레이에게 건네준다.
그가 바닥에 널부러진 해머필드 용병들의 시체를 천천히 돌아본다.
“내가 굉장히 불쾌한 것이 하나 있어.”
머레이가 뭐냐는 듯 바로크를 바라본다.
고개만 살짝 돌려 머레이를 바라본 바로크가 씨익 웃는다.
“김도혁도 죽고 없는 지금 뱀 새끼들이 마치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움직이는 것.”
실제로도 옐로우 맘바는 실력대 실력이라면 우위를 점할 수 있단 자신감으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머레이는 그의 섬뜩한 미소에 심장이 옥죄는 듯한 긴장감을 느낀다.
바로크가 권총을 자신의 권총집에 끼워 넣는다.
“안 되겠다. 뱀굴 먼저 파내버리자.”
그가 훽하니 돌아 문밖으로 나가 버린다.
***
스탁튼의 시내를 걷고 있는 두호.
파이트 매니아에서 제공한 하루의 휴식시간 동안 이곳에 있다는 래진을 만나러 온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도시다 보니 새벽같이 출발했는데도 어느새 해가 중천이다.
핸드폰을 자주 힐끔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두호였다.
하지만 길 찾기가 영 신통치 않은지 인상이 자주 찌푸려진다.
그 순간 굉음이 들리며 두호의 옆을 오토바이 하나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부아앙!
헬멧을 쓴 사내 두 명이 타고 있었다.
두호가 멀어지는 오토바이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이윽고 주위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는 두호.
“세계 최강국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네.”
차도와 인도를 나누는 보도블럭에 머리를 댄 채 뻗어있는 수십 명의 노숙자들.
그들은 약에 취했는지 눈에 초점이 없었다.
아직 앳되보이는 아이들이 계단에 걸터앉아 벌써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더군다나 간간히 그들의 품속에서 보이는 권총까지.
마치 어느 재난영화에서나 볼법한 암울한 모습에 두호는 씁쓸함을 느낀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그 순간 다시 큰 굉음이 들려온다.
본능적으로 두호는 방금 자신의 곁을 지나쳤던 오토바이임을 느꼈다.
‘아마도 용건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노려본다.
‘나겠지.’
두호의 코앞에 멈춰선 오토바이에서 헬멧을 쓴 두 사내가 내린다.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두호에게 겨눈다.
“외부인인가봐? 그럼 입장료를 내야지.”
처음 보는데다 혼자 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두호를 강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두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귀찮으니 얼른 이것을 가져가라는 듯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그 모습에 모욕감을 느낀 사내 한 명이 격분한다.
“이 동양인 놈이 진짜 죽고 싶...”
탁!
두호가 번개처럼 지갑으로 상대의 칼을 낚아채 바닥으로 던진다.
그리고는 뚫어지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
당황한 상대는 자신이 뺏긴 칼과 두호를 번갈아 쳐다본다.
두호가 다시 지갑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옅은 미소를 띤다.
마치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라는 듯.
칼을 뺏긴 사내가 분노에 가득 차 허리로 손을 가져간다.
이윽고 뽑아져 나온 권총.
8,90년대나 볼법한 오래된 리볼버 권총이었다.
아무래도 구입한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훔친 듯 군용은 아니었다.
권총으로 두호를 겨냥한 채 흥분하여 헬멧을 벗어던진다.
짧은 머리에 흑인 남자가 두호를 보며 실실 웃는다.
“왜 또 잔재주 부려보시지?”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배를 잡으며 웃는다.
두호가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얼른 제압하고 가려는 듯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는 그 순간.
푸슉푸슉!
사내들의 발밑에 총알이 박힌다.
한 사내가 총을 겨눈 체 싸늘하게 말한다.
“꺼져. 이 짓거리라도 계속하면서 살고 싶으면.”
래진이었다.
그가 이내 흑인사내가 차고 있는 다이버 손목시계를 겨냥한다.
푸슉!
그의 손에 채워졌던 시계가 총알에 맞아 툭하고 끊어져 땅에 떨어진다.
사내들은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친다.
매달리듯 오토바이의 탑승한 사내들이 하얀 연기를 뿜으며 멀리 도망친다.
부아앙!
두호가 래진을 향해 살짝 고개숙인다.
래진이 권총을 다시 권총집에 끼워넣으며 두호에게 걸어갔다.
“주먹 싸움으로는 겁을 안 먹는게 이 동네야. 보나마나 친구들 우르르 몰려와서 다시 덤비겠지.”
두호의 앞에선 래진이 자신의 권총집을 툭 건들인다.
“이런 걸로 겁을 줘야 그제야 도망간다네.”
“제가 총이 어디 있습니까.”
두호가 어깨를 으쓱하자 래진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참 그렇지. 자리 좀 옮기지. 이 동네가 치안이 엉망이라 눈에 띄면 안좋아.”
“네.”
두 사람은 천천히 스탁튼 거리를 걸었다.
빈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잘 정비된 도로와 인도.
그리고 깨끗한 건물이 자신이 알던 빈민촌들과 사뭇 다르다.
두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래진이 피식 웃는다.
“이 동네에 한 5만 명이 거주하지만 잘 사는 사람은 열 명 남짓해. 그들 수입이 주민들 전체 수익보다 많지.”
“좋은 일로 버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정말 번듯하게 잘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위험한 곳에서 살지 않는다.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타겟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이곳에 사는 이유는 한가지다.
그 모든 위험들을 우습게 보는 사람.
그들이라면 이런 곳에서 사는 게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 대체로 멕시코에 직접 마약을 떼오는 헤비 딜러들이나 범죄조직 수장 정도 되는 사람들.”
“이 동네도 엉망이군요.”
래진이 피식 웃는다.
가만 보면 도혁이랑 대화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화 패턴이 비슷하다.
“어딜가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리는 법이야. 이 동네도 과거 재개발로 제법 땅값이 올랐었네. 하지만 이 지역에 사는 그 잘난 놈들이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몰릴만한 무엇인가가 들어오기를 바라겠나?”
결국 그들의 반대에 재개발은 취소되었고 일용직 근로자로 취직되었던 사람들마저 해고되었다.
졸지에 직업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길바닥에 나앉은 것이다.
더군다나 재개발을 한다는 소문 때문에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으니 집 하나 구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 동네이다.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집보다 빈집이 더욱 많다.
“가난한 천 명의 선함보다는 지독한 부자 한 명의 악함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큰 법이지.”
두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그 말의 무게를 크게 실감하던 중이었다.
소년 교도소의 범죄자 출신인 자신이 어느샌가 대한민국 투기 스포츠의 희망이 되지 않았는가.
두호를 흘깃 바라보는 래진.
“가난하게 컸다는 얘기를 채호한테 들었는데 가만보면 꽤 좋단 말이지.”
두호가 입고 있는 옷들은 명품은 아니지만 꽤 고가의 옷들인 것이다.
래진의 말을 들은 두호가 피식 웃는다.
두호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모두 채호가 해준 것이다.
-우리 체육관의 간판이 후줄근한 모습이면 안되죠. 당장 준모씨랑 예수씨랑 가서 쇼핑이라도 하세요. 이제 이쪽 바닥도 근성을 넘어 멋과 끼로 하는 겁니다.
두호가 래진을 바라보며 웃는다.
“대표님께서 다 해주신 겁니다.”
래진이 감탄하는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채호 놈이 또 정이 많지. 근데 형님이 물려주신 재산이 좀 되지 않나?”
장난스런 물음에 두호가 헛웃음을 짓는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래진식 농담인지.
“그게 어디 제 돈입니까.”
두 사람은 스탁튼의 거리를 한참 동안 걸었다.
미국 서부에서 치안이 가장 위험하다는 곳.
그러나 마치 동네 앞을 산책하는 듯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지금 두 사람이 처해진 현실이 이곳 정도는 우습게 보이기 때문이다.
래진이 걸음을 멈춰 싸늘한 표정으로 두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제 그만 빠지게나.”
두호가 래진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래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자네 필리핀에도 갔다면서.”
두호가 몸을 돌려 래진을 바라보았다.
“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사실 두호가 만약 도혁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변사체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곳은 베테랑 용병들조차 살아남기 힘든 판이다.
한쪽을 완전히 재기불능상태로 만들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지독한 전쟁.
래진은 그 점이 걱정된 것이다.
도혁의 동생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보여줘야 할 인생은 이런 데서 허비되고 위협받을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청년들의 우상. 투기 스포츠의 희망. 가난 속에서 핀 꽃. 한국 언론에선 자네를 이렇게 부르더군.”
래진이 굳은 표정으로 두호에게 다가간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행보를 보여주는 젊음이 꺾이길 그는 원치 않는다.
“자네가 보여줘야 할 싸움은 케이지 안이지. 피칠갑을 하며 시체를 밟고 다니는 곳이 아닐세. 그러니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고 이제는 빠지게나.”
두호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래진의 복장을 돌아보았다.
아마 올해 그의 나이가 환갑이 되었다.
일반적인 그 나이대의 남자라면 자식들 모두 대학 보내고 슬슬 퇴직을 준비할 나이다.
하지만 그의 복장은 여전히 전투복이다.
닳아버린 군화.
잔뜩 흙이 묻어 이제는 얼룩이 벗겨지지도 않는 바지.
곳곳에 핏자국이 보이는 상의.
그는 여전히 전쟁터에 남아 잔혹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딘가 모를 측은함이 느껴졌다.
래진이 단호한 표정으로 두호에게 말했다.
“부탁일세. 자네마저 잘못된다면 내가 죽어서 도혁이를 볼 낯이 없어.”
두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한다.
“네.”
너무나 쉽게 나온 대답.
그 대답에 오히려 래진이 당황했다.
한 번쯤은 망설일 법도 할 텐데.
“그래...야지.”
“형이 말하길 옐로우 맘바랑 절대 엮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피 묻는다고.”
래진의 진지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고 이제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필리핀은 도혁이 형 복수라 생각하고 한 겁니다. 이제 뭐 저도 손 털어야죠.”
두호는 살짝 고개 숙여 래진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몸 조심하시고 일이 다 잘 풀렸을 때 꼭 다시 뵈면 좋겠습니다.”
이윽고 두호는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고 래진은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내 헛웃음이 나오는 래진.
“허허. 거참.”
진지한 분위기가 잡히지 않는 모습까지 도혁과 똑 닮았다.
“여러모로 신기한 친구이구만.”
래진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찰칵찰칵
둘의 멀어지는 모습을 누군가 촬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