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절대 두 팔은 떨어트리지 마라
두호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레이첼은 두호에 이어 예수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반가워요!”
“만나뵙게되서 영광입니다 미스 레이첼.”
예수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레이첼이 밝게 미소 짓는다.
“영광은 무슨. 두호씨 매니저라면서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저희 백두호선수 잘 부탁드립니다.”
“자 일단 앉으시죠!”
책상 앞 소파를 가르키는 레이첼.
두호와 예수가 소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레이첼이 두호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선하게 생긴 사람이...’
자신이 처음 백두호를 인지한 것은 PRIDE-K였다.
이 바닥에서 자신의 위치쯤 되면 어쩔 수 없는 선입관이라는 것이 생긴다.
싸움은 기세.
그 기세는 행동과 외모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백두호는 달랐다.
똑같이 피를 흘리며 싸우지만 왈패가 아닌 고고한 군자(君子).
케이지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두호의 모습에 레이첼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케이지는 자신의 캔버스.
그 캔버스에 두호를 그려넣으면 어떻게 될까.
‘아름다울까? 아니면...’
사무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두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
‘처절할까.’
레이첼은 소파 앞 책상에 놓여진 전화기를 집어든다.
“여기. 미네랄 워터 한 병과 커피 두 잔 부탁드려요.”
전화를 끊은 그녀가 싱긋 미소 짓는다.
“20살의 나이에 킹 챔피언쉽 미들급 챔피언. PRIDE-K라는 밀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아시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백두호 선수.”
칭찬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레이첼을 보며 예수가 밝게 미소 지었지만 두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제가 이렇게 보자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네. 저희도 사실은 그 점이...”
예수가 궁금하다라는 말을 하려할 때 두호가 손짓한다.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 두호를 바라보지만 두호가 살짝 미소 짓고는 자신이 대답한다.
“뭡니까.”
“우리 매치 메이커인 실바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실바의 실수.
비즈니스적으로 자신들이 손해보는 일이라는 의미다.
과연 두호와의 계약으로 XFC가 입는 손해는 무엇일까.
“아무리 제가 대부분의 실권을 위임한 상태라지만 덜컥 곧바로 랭킹전이라니. 이렇게 되면 차기 랭킹권 진입을 노리는 선수들에게 저희가 조금 낯뜨거워 졌습니다.”
방금전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진 레이첼.
생각해보니 유례없는 특례이다.
어떤 것을 요구할지 전혀 감도 못 잡는 상황에서 레이첼을 만나러 오다니.
이 만남의 파장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예수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나 그녀와는 달리 두호는 이제야 미소 짓는다.
‘길 들이기.’
어떠한 단체에 새로운 인물이 투입될 때 기존 사람들의 입장은 두 가지이다.
자신들이 변화하거나.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보통은 후자를 선택해 자신들에게 맞추도록 유도한다.
개인이 바뀌며 생길 문제보다 단체가 바뀌어 생길 리스크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실바로 길들이기를 실패했다고 판단한 듯 레이첼이 직접 나선 것이다.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장기말이 무슨 소용인가.
두호가 레이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파기하시면 됩니다.”
두호의 폭탄 발언에 예수가 화들짝 놀란다.
레이첼 역시 당황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녀의 당황은 예수의 생각관 전혀 달랐다.
‘이것 봐라. 그냥 애송이는 아니다 이거지.’
손해를 메꾸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사실상 손해보다는 이득을 끌어내기 위한 의도로 두호를 만난 것이다.
그렇게 압박을 통하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려 했는데 보기 좋게 읽힌 것이다.
레이첼이 싱긋 미소 짓는다.
“일을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면 안 되죠.”
두호가 예수를 바라본다.
“예수님. 기사 준비하시죠.”
“네?”
두호가 레이첼을 보며 싱긋 미소 짓는다.
“백두호. XFC 계약 파기. 몸 담을 새로운 단체 찾는다. 이렇게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단체를 가더라도 특급 대우를 받을 두호의 존재.
XFC에서 계약 파기라면 오히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할 단체들은 널렸다.
레이첼의 표정이 감탄하는 듯 표정을 짓는다.
두 사람의 머리싸움으로 안절부절 못 하는 예수의 표정만 더욱 울상으로 변해간다.
레이첼이 뜬금없이 손을 내민다.
“보통은 아니네요. 한 방 먹었습니다.”
두호도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잡는다.
“전적이 없는 초짜라 잃을 것이 없을 뿐입니다.”
“겸손하시긴.”
순식간에 분위기가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 신기할 따름인 예수였다.
이내 레이첼이 부탁한 음료들이 나오고 각자의 자리 앞에 놓여진다.
“자. 그럼 기 싸움은 안 먹히니 바로 본론으로 가시죠.”
레이첼이 커피 한 입을 마시고 다시 컵 받침대에 올려놓는다.
“어디까지 보십니까.”
챔피언이 되겠습니다.
이런 단순한 얘기를 듣자는 것이 아니다.
어쩌니저쩌니 해도 결국 그녀 역시 사업가.
비전과 계획을 듣고 싶은 것이다.
두호가 페트병의 담긴 미네랄 워터를 한 입 마신다.
이윽고 뚜껑을 닫아 책상에 내려놓는다.
“확실한 머니파이트. 그것을 위한 최단거리 제공을 원합니다.”
머니파이트.
명예가 아닌 철저히 돈을 위한 서커스 매치.
기획과 컨텐츠에 맞춰 이슈성이 강한 경기를 뜻한다.
레이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파악하기엔 그는 사회 운동가처럼 좋은 영향력을 퍼트리려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마이크 앞에 서야 제 목소리가 들리겠죠.”
두호의 말에 레이첼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은 주목받을 단상과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
즉 머니파이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니 자신의 목적과도 맞는다는 말이었다.
“그럼 결국 최단 거리 제공은...”
“알도프 코와르키를 내주시죠.”
두호가 거침없이 챔피언의 이름을 호명하자 레이첼이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 이 소리를 한 3년 만에 듣는 것 같네요.”
미들급 랭킹은 이제 변화가 없다.
그의 강력한 퍼포먼스 만큼이나 경쟁자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그 덕분에 미들급의 PPV 수익은 처참하다.
그나마 쇼맨쉽이 넘치는 알도프 덕분에 수입이 유지는 되지만 그의 경기를 제외하고는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 저희도 고민입니다. 그는 이제 검집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검이거든요.”
두호는 그녀의 말에 자신을 보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강력한 미들급 통치자.
그의 팬 입장으로는 만족스러운 결과이지만 격투기 생태계에서는 좋은 뜻이 아니다.
언제나 모든 스포츠와 연예계 산업은 다음을 논해야 한다.
만약 알도프가 서열정리가 끝난 이 시점에서 돌연 은퇴한다?
XFC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말이다.
그가 은퇴를 하고서야 등극한 챔피언의 무게가 얼마나 존중받겠는가.
더군다나 그는 다른 체급으로 월장(越牆 : 격투기에서는 다른 체급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를 뜻함)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주객이 전도가 되었다.
그가 경기를 거절한다면 당장 XFC에서 미들급이 내는 수입은 없는 상황.
돈은 돈대로 쏟아붓지만 기대되는 성과는 갈수록 줄어가고 있다.
“저희는 사실 기대하고 있습니다. 두호씨가 과연 알도프를 꺾어줄 것인가.”
예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호를 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기대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두호 존재의의를 묻는 것이다.
알도프를 꺾어줄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한테 당신은 필요가 없다는 뜻.
두호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가 가장 고전했던 경기가 무엇입니까.”
“뭐 언제나 압도적이지만 골드스프릿 관계자한테 물어보니 4차 방어전 상대가 제일 어렵다고 했어요.”
두호가 그가 누구인지 모르니 자연스레 예수를 쳐다보았다.
예수가 잠시 이름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감는다.
이윽고 떠오른 듯 눈이 크게 떠졌다.
“로마리오 선수 아닌가요?”
“맞아요. 로마리오.”
두호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단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킥복싱 선수인데. 전형적인 포인트 복서에요. 맞불을 놓지 않고 철저한 아웃파이팅으로 점수쌓기를 선호하는 스타일죠.”
예수의 설명에 레이첼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설명이 꽤 정확한 듯했다.
“물론 그 역시 3라운에서 ko 당했지만 뒷얘기로는 그는 경기 내용이 불만인 듯 화가 나있다고 했습니다.”
두호는 그녀의 말에 무엇인가 갈피를 잡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레이첼은 두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제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해줄 때가 되지 않았냐라는 의미였다.
두호가 그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물건을 내놓기만 한다면 가져가겠습니다.”
레이첼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기대와 흥분.
자신이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주는 진짜 파트너.
두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시죠. 예수님. 검사 받으러.”
예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호를 따라 일어섰다.
“이번 경기 보시고. 가능성 보인다고 판단하면 노선정리는 알아서 부탁 드립니다. 그건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훨씬 능숙하실 테니.”
스토리텔링과 대결구도.
마케팅과 여론몰이.
레이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믿고 맡겨주시죠.”
두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밖으로 나갔고 예수 역시 급하게 인사를 마친 뒤 두호를 따라나섰다.
레이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뒷짐을 쥔 채 LA의 도시가 멀리 보이는 창문을 향해 다가간다.
“코리안 몬스터라...”
그녀가 씨익 미소 짓는다.
“건전지를 교체할 때가 됐지.”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온 예수가 멀찍이 걸어가는 두호에게 달려간다.
“두호씨!”
“네?”
예수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린다.
“못살아 정말. 이렇게 막 지르시면 어떻게 해요. 대표님이랑 상의를 해봐야죠.”
“그렇습니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지만 싱긋 웃고는 걸어갈 뿐이었다.
예수가 다시 그의 옆에 서서 천천히 걷는다.
“플랜이 우선이에요. 비즈니스도 플랜에 맞춰 가야하는거라구요.”
잘 가던 두호의 걸음이 멈춰졌다.
이윽고 복도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말아쥐며 옆에 서 있던 예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를 뿜어낸다.
예수가 두호의 낯선 모습에 당황해한다.
“두호씨 무슨 일 있...?”
그녀가 두호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자 표정이 굳는다.
한 사내가 걸어와 미소를 지은다.
태산같은 큰 키.
떡 벌어진 어깨와 수많은 상처를 가리는 검은 피부.
그리고 그의 상징 같은 눈가에 난 칼 자국.
알도프 코와르키였다.
“이야. 요새 가장 뜨거운 사람 아니야?”
그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호를 바라본다.
두호가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말을 못하네? 나 막 밖에서 때리는 사람 아니니까 긴장 풀어.”
그의 이미지는 악동으로 굳혀져 있다.
근거 없는 루머가 끝없이 생성되니 표정의 이유가 그로인한 줄 아는 알도프였다.
억울한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슬그머니 웃는 알도프.
그러나 두 사람의 눈빛은 전혀 다르다.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는 두 사람.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생각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두호가 감정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말한다.
“반갑습니다.”
두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알도프가 씨익 미소 지으며 그를 지나친다.
그리고 두호의 옆을 지나가며 무엇인가 생각난 듯 한 마디를 툭 뱉는다.
“혹시 형 하나 있지 않아?”
두호의 이마가 꿈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