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절대 두 팔은 떨어트리지 마라
“무슨 말이야 그게.”
알도프의 의미심장한 말에 밝은 미소를 짓던 볼크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너 정도면 롤스로이스 타고 캘리포니아 바다 보이는 대저택에서 살아야지.”
볼크는 그의 말에 씁슬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들 안 그러고 싶을까.
가끔씩 알도프가 말한 것처럼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다.
내게 인생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다가올까.
과연 자신은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그 기회는 무엇일까.
알도프가 책상에 올려놓은 가방을 볼크쪽으로 살짝 밀며 미소 지었다.
“확인해 봐.”
명품 브랜드 G사에 이번 년도 신상 더플백.
볼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한 볼크의 입이 떡 벌어진다.
처음 보는 액수.
“이게 뭐야...?”
달러가 끈에 묶여 가방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알도프와 돈 가방을 번갈아 보는 볼크.
“100만 불. 내 부탁 들어주면 여기다 100만 불 더 얹어줄게.”
“뭐?”
총 200만불.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남은 빚을 모두 정리하고도 꽤나 남는다.
인생이 한 번에 바뀔 액수는 아니지만 새 출발하기엔 더없이 좋은 액수.
볼크가 침을 꿀꺽 삼킨다.
이 정도의 액수를 넘겨줄 일이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고민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듯 안색이 어두워진 볼크.
알도프가 그의 안색을 보고는 걱정말라는 듯 미소 짓는다.
“승부 조작 아니고. 약물 이런 것도 아니야.”
그의 말을 들은 볼크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불법적인 일은 아니라는 거지?”
“물론이지.”
알도프가 체육관 한쪽 벽면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이번 XFC에서 열리는 파이트나잇 할로윈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총 5경기 메인 게임 선수들을 포스터로 만들어놓은 것.
그 첫 경기 칸에 볼크와 백두호의 사진이 삽입되어 있었다.
알도프가 그 사진을 보며 생각만해도 재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저 놈 다리 한 짝?”
마치 음식점에서 메뉴를 주문하듯 전혀 죄책감이 없는 목소리.
볼크는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확신의 찬 알도프의 표정을 보며 사실임을 확인했다.
“부러뜨려 달라고?”
“아이 참. 징그럽게.”
듣기만 해도 무섭다는 듯 알도프가 질색을 하며 손짓한다.
알도프의 대답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의아한 표정의 볼크.
그럼 다리 한쪽을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럼 선수 생명 끝나고 곧바로 은퇴해야 하잖아. 뭔 말인지 알지?”
손바닥으로 비비며 입맛을 다신다.
이제야 그가 원하는 부탁을 깨달은 볼크가 침을 꿀꺽 삼킨다.
‘은퇴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지만 고질병 정도로는 남게 해 달라?’
볼크는 말없이 가방 안에 돈을 쳐다보았다.
저 액수라면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은 걱정없이 새 출발을 할 수 있다.
캐릭터와 경기 스타일에 가려져서 그렇지 자신은 비겁하게 경기를 하는 그런 운동선수가 아니다.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때.
알도프가 컵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한다.
“NCAA 디비전 올해의 선수. F사 그래플링대회 우승. 올림픽 국가대표.”
컵을 일부러 소리나게 내려놓은 알도프가 고개를 젓는다.
“러시아였다면 너의 동상이 모스크바에 세워졌을 거야.”
그 말에 볼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 역시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나라와 국가를 빛낼 수 있는 유망주를 조금 더 대우해줬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런 부탁 앞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자긍심이 있었을텐데.
“만약 이기면?”
사실 볼크는 두호와의 승부에서 전혀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챔피언 출신이라지만 기껏해야 프로 전적 1전의 애송이.
그저 온전히 알도프의 거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약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그럼 뭐. 100만불은 그냥 가져가는 거지. 그렇게 지는 놈이면 흥미 없다.”
알도프는 바지를 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벌써 가려고?”
“어. 준비 잘해라. 하는 걸로 알고 오늘 저녁에 입금시켜 놓을게.”
알도프는 나오지 말라는 듯 도로 볼크에게 눈을 찡그린다.
이윽고는 특유의 껄렁거리는 걸음새로 체육관을 벗어난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볼크는 눈을 좁혔다.
‘저 녀석의 진짜 무서운 점은 저거지.’
자신이 아는 알도프는 상어이다.
절대로 한 번에 승부를 거는 법이 없다.
상대를 처절하게 코너에 몰아넣고 상대의 정신까지 박살내는 사냥꾼.
그렇게 사냥감이 모든 의지를 잃고 포기하는 그 순간 삼켜버린다.
알도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다시 샌드백으로 돌아간다.
“그 성격을 뒷받침해주는 완벽한 실력까지.”
그의 일신의 무력 하나 만큼은 진짜다.
적어도 이 미들급 안에서 그를 상대로 이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샌드백에 손을 올린 채 한숨을 내쉬는 볼크.
“많이 낡았구나.”
헤진 샌드백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
XFC 트레이닝 센터의 도착한 일행들.
제일 먼저 차에 내린 예수가 감탄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든다.
이윽고 건물 외벽을 촬영하며 압도되는 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킹 챔피언쉽의 건물이 그저 특이하고 재밌는 구조였다면 XFC는 달랐다.
마치 친환경 과학센터 같다.
건물 6층이 전체 통유리로 되어있어 밖에서도 내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간히 유리창 너머로 운동을 하고 있는 XFC 소속 선수들이 보인다.
유명 히어로 영화에서나 볼법한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었다.
탁현이 그녀를 보며 미소 짓는다.
“그래도 해외에서 격투기 단체 일도 보셨을텐데. 신기하신가 봐요?”
“네. 제가 있던 곳은 중소단체라 XFC로 올 일이 없었거든요. 사진으로만 보다 이렇게 실제로 보니 압도되는 기분이네요.”
데이비드가 일행들 앞에 섰다.
“이곳은 XFC 트레이닝 센터입니다. 경기와 관련된 모든 부분을 관리하는 중앙 센터죠. 이곳에서 두호씨는 오늘 기초검사와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가 뒷말이 궁금한 듯 데이비드를 바라보았다.
“퀸즈께서 보자십니다.”
퀸즈(QUEENS).
세계최고의 격투기 단체인 XFC를 이끄는 여성 사장 데이나 레이첼의 별명이었다.
전 세계의 격투 트렌드를 이끄는 거물이자 정점.
그녀가 직접 두호를 보자고 한 것이다.
탁현과 예수는 깜짝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기뻐해야 할 두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트레이닝 센터 주위 경관을 보며 핸드폰을 꺼낸다.
예수가 두호를 보며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퀸즈라구요! 퀸즈! 챔피언들도 잘 만나주지 않는다는 그녀인데. 어떻게 두호씨가...?”
트레이닝 센터의 건물이 아닌 주변 풍경을 촬영하던 두호가 싱긋 미소 짓는다.
“좋은 일이네요.”
두호의 대답에 힘이 빠지는 듯 예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탁현이 호탕하게 웃으며 예수를 달랜다.
“원래 이런 사람이잖아요. 자 일단 들어가서 기초검사부터 받으시죠.”
그 사이 준모가 멀리서 달려온다.
“형님!”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확인하던 두호가 메신저로 누군가에게 사진을 보낸다.
두호가 자신의 말을 못 들었나 싶어 준모가 가까이 다가온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10달러만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뜬금없이 돈을 빌려달라는 준모.
준모가 양손을 포갠 채 손을 내밀었다.
두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환전 안했어?”
“제가 공항에서 너무 늦게 나와. 환전을 못 했습니다.”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주머니에 넣어놓은 지갑을 꺼내 10달러를 꺼냈다.
“근데 어디쓰게?”
준모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르킨다.
XFC 앞에 주차되어있는 푸드트럭,
“그래도 여기 왔는데 츄러스 하나는 먹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것도 하나 사오겠습니다.”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 두호.
“감량중이잖아.”
이윽고 10달러 한 장과 카드 한 장을 꺼낸다.
“일행들 인원수 대로 사오고. 이거는 필요할 때 써.”
카드와 돈을 받아든 준모가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를 친다.
“그럼 다녀올테니 먼저 들어가 계시죠. 잘 쓰겠습니다. 형님!”
“수고!”
두호가 슬쩍 손을 들어 보이며 XFC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핸드폰 알림음이 울린다.
핸드폰을 확인한 두호가 싱긋 웃는다.
- 미국 이쁘네! 아들 항상 몸 조심하고 경기 잘하려무나!
간단한 신원확인과 XFC 초대장을 보여준 일행들은 메디컬센터에 도착했다.
검진 대기하는 수많은 인원들이 센터 앞 복도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의 손에는 준모가 사온 츄러스가 들려있었다.
준모가 츄러스를 한입 베어물며 지루하단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언제나 느끼는건데 두호 형님 정도면 먼저 입장 시켜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준모의 불평을 들은 탁현이 씨익 미소 짓는다.
이윽고 한 사내를 가르킨다.
딸과 같이 온 듯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비행기를 태워주는 사내.
“저 사람은 전 군룬 라이트급 챔피언. 릭 웬즈.”
딸과 놀아주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맞은편의 사내.
레게머리를 한 채 턱이 다부진 것이 특징이었다.
“저 사람은 전 스트라이크 포스 챔피언인 다니엘 미어입니다.”
사내들의 정체를 알게 된 준모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전 세계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격투기 단체가 있습니다. 적어도 여기서 챔피언이라는 칭호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죠.”
탁현이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다.
“최강중의 최강을 가리는 XFC. 두호씨가 가진 킹 챔피언쉽 미들급 챔피언이란 타이틀은 겨우 입장 티켓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찌보면 불쾌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두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에 적극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챔피언을 한다면 전 세계인 중 동 체급에선 가장 강하다는 말이 나오는 게 괜히 하는말이 아닙니다.”
“확실히...”
킹 챔피언쉽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그들은 긴장과 신경전이 넘쳐났지만 여기는 다르다.
비즈니스를 아는 사업가처럼 자신이 일을 해야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매사 여유롭다.
완벽한 베테랑들.
“분위기가 다르네요.”
멀리서 예수가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일단은 먼저 그녀를 보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데뷔 순서로 메디컬 테스트를 진행하는 듯 하니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예수가 자신이 걸어온 복도를 가르킨다.
“두호씨 가시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탁현과 준모 그리고 데이비드는 걸어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미스터탁.”
“네.”
걸어가는 두호의 뒷 모습을 보며 데이비드가 씨익 미소 짓는다.
“퀸즈가 선수를 직접 부르는 이유 아시죠?”
탁현이 씨익 미소 짓는다.
“입장티켓...”
그리고 로비에 나와있는 수 많은 선수들을 보며 탁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티켓을 VIP 티켓으로 바꿔주겠다는 얘기겠죠.”
똑똑.
예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맑은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온다.
- 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두호와 예수.
창밖의 햇살을 맞으며 자리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일어나 걸어온다.
금발의 자연스러운 펌으로 단아한 분위기가 한층 돋보인다.
클래식한 슈트와 검은색 슬렉스를 입은 그녀가 피와 비명소리가 가득한 XFC 케이지의 주인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데이나 레이첼이 손을 내밀며 싱긋 미소 짓는다.
”반가워요 코리안 몬스터. XFC의 사장 데이나 레이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