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화 : 절대 두 팔은 떨어트리지 마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사내는 김도혁이었다.
자신을 아는듯한 쁘레오의 말투에 도혁의 눈이 좁혀진다.
“나를 알고 있습니까?”
도혁은 오늘 처음 그를 본 것이다.
쁘레오가 흠칫 놀라며 짐짓 모른 척을 했다.
“아니군. 내가 착각했네.”
하지만 도혁은 이미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뒤였다.
도혁이 가지고 온 의자에 털썩 앉는다.
“원래 이렇게 모질게 하는 사람은 아닌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쁘레오는 도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표정은 애매했다.
오히려 차분하게 도혁을 설득하려 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사람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만.”
그 말을 들은 도혁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이윽고 사진첩을 열어 사진을 한 장 고르더니 쁘레오에게 보여준다.
여자 아이 두 명이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모습.
그리고 한 여성이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자 쁘레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가족들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모르오...”
“내가 묻는 것에 대답만 잘해주면 됩니다. 그럼 아무런 탈 없이 여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쁘레오가 잠시 도혁을 노려본다.
자신을 고문하는 것 또한 두렵지만 어찌 버텨낸다 하더라도 가족이 해를 입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하는 쁘레오.
이내 눈을 떠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본다.
“물어보시오.”
“나를 아십니까?”
쁘레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김도혁. 전 옐로우 맘바 브라보팀 캡틴. 죽었다고 들었는데...”
도혁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전 맹혁이 말해준 것이 있었다.
-실리에 강한 자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그들과 협력하게 됐는지는 저 또한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손익 계산이 빠르고 의리로 움직이는 타입은 아니라는 거죠.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한다니 그 점을 파고들면 될겁니다.
도혁 역시 짧은 순간이지만 강하게 느낀다.
모든 것을 계산하려 하는 타입.
달리 말하면 그에게 이득만 된다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도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윈스턴과 블랙러프. 무슨 관계입니까?”
쁘레오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굴리는 듯 하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긴 어려운 문제였다.
어차피 블랙러프와 틀어진다면 목숨 또한 부지하기가 힘들었다.
도혁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당신은 나를 안다고 했습니다. 원한다면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쁘레오는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내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만약 김도혁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블랙러프와 옐로우 맘바의 전쟁은 더욱 격렬해지지만. 어차피 승리는 블랙러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의외라는 게 있다.
그렇기에 보험 하나를 들어놓아야 한다.
애초에 블랙러프가 판단하는 가장 큰 위협요인은 이자이니까.
“도와준단 말 사실이오?”
도혁이 옅은 미소를 띄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후. 담배 있소?”
“끊었소.”
아쉬운 표정인 쁘레오가 잠시 먼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블랙러프와 윈스턴. 정확히 말하면 둘이 아니라 하나요.”
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나?”
얼굴을 감싸쥐며 한숨을 뱉는 쁘레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과거 윈스턴은 재정난으로 인해 파산 위기에 처해있었소.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는 과정 중 천문학적인 돈이 소요되지만 진전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곳간은 말라갔소.”
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채호에게 말했다시피 자신 역시 의뢰받기 전 윈스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용병 바닥은 군수산업체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으니 자신이 모른다는 건 그저 그런 회사란 뜻이다.
“그렇게 이사회는 둘로 나뉘어졌소. 개발을 즉시 중단하자는 쪽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개발을 진행해야 한다는 쪽으로.”
“당신은 진행해야 한다는 쪽이겠군.”
쁘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박리다매로 메꿀 수 있는 곳간 상황이 아니기에 난 사활을 걸고 진행을 해야 된다 말했지.”
쁘레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다.
“그래. 거기서 멈췄어야지.”
도혁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멈추다니요?”
“결국 문제는 돈이었소.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투자를 끌어와야 했으니까. 그 순간 우리에게 투자를 제안한 사내가 있었소.”
도혁이 눈을 좁혔다.
“누구입니까?”
“바로크 코와르키. 블랙러프 연합의 리더이자. 포그 스컬스의 대표이사요.”
도혁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침착하던 도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듯 살짝 떨린다.
“혹시. 그 사람 가족 중에 격투기 선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 쁘레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있소. 알도프 코와르키라고.”
도혁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그 모습을 본 쁘레오가 흠칫 놀란다.
‘이런 살기가...’
가까스로 화를 삭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도혁이 계속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쁘레오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어찌됐건 그가 우리 회사에 투자를 제안해왔소. 그가 요구한 조건은 단 하나였지. 합병.”
도혁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다 망해가는 회사에 지분 사장이 아니라 인수를 하려 했단 말입니까?”
쁘레오가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쓴 웃음을 지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지. 어찌됐건 그가 밀어넣어 준 투자금으로 무기 개발을 성공했고. 단숨에 우리 주력 상품이 바뀌었지. 하지만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소.”
도혁이 페트병에 담긴 물 한 병을 그에게 건넸다.
쁘레오는 그가 건넨 물을 들이키며 입을 닦았다.
“고맙소. 단숨에 대주주로 올라선 바로크가 다른 이사진들과 간부들을 밀어내기 시작한거요. 무기 개발을 반대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할 사내들만을 남긴거지. 내가 그중 적임자로 선택되어 윈스턴의 바지대표가 된거요.”
도혁은 바로크가 윈스턴에 투자를 한 이유를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크는 윈스턴을 자신 발 아래에 두어 무기 밀매를 하려고 한 것이다.
단순히 유통이 아닌 무기밀매의 공급자의 역할로서 활동하려는 것.
‘그럴려면 돈 욕심 많고, 말 잘 듣는 놈이 필요했겠지.’
그 적임자로 쁘레오가 선택된 것이다.
쁘레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우리의 주류 고객은 테러단체, 반군, 해적 등등 비정규군이 대부분이었고, 블랙러프에 직접 무기를 대고 있소.”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회의 악에 힘을 보태는 자가 되가고 있지. 알진 모르겠지만 윈스턴 간부들은 대부분 인터폴에 쫓기는 입장이오.”
결국 바지사장일 뿐이지만 명목상 자신들이 운영진이기에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이렇게 쁘레오가 살아남은 이유는 포그 스컬스에 협조적이기 때문.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포그 스컬스가 옐로우 맘바를 공격한 이유가 뭡니까?”
“걸림돌이니까.”
쁘레오가 도혁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카르텔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 뭔지 아시오?”
도혁이 그를 말 없이 바라보자 쁘레오가 옅은 미소를 띄운다.
“경쟁자가 없어야지. 압도적이어야 사람들이 두려워하니까.”
군수 산업체를 가지고 있는 대형 용병 업체에 무기밀매.
이 장사는 어쩌면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업종이다.
모든 국가에는 정적(政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서로의 정적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자금줄이 되어주는 존재가 된다면?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보다 더욱 큰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마이너 용병시장을 모두 접수해야 한다.
하지만 옐로우 맘바라는 강력한 경쟁상대가 있으니 포그스컬스는 옐로우 맘바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군수산업체가 해적들에게 무기를 뺏겨? 이게 말이 된다 보시오. 바로크가 당신들을 끌어내기 위해 수를 쓴거지. 첩보도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지 않았소?”
도혁은 눈을 질끈 감고 끌어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결국 윈스턴의 무기 회수 임무는 포그스컬스가 옐로우 맘바의 주축부대를 없애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도혁과 브라보만 제거한다면 승산이 있다.
그 순간 거친 목소리가 들려온다.
“샅샅이 뒤져! 신호가 여기서 끊겼다!”
쁘레오가 당황한 듯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이러고 있는 것은 좋을 일이 아니다.
도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난다.
그러나 쁘레오는 순간 밖에서 자신을 찾는 사내들을 잊었다.
도혁의 눈에서 쏘아지는 시퍼런 살기.
악귀가 보여주는 눈빛이 이렇지 않을까?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죠.”
쁘레오는 움츠러들 듯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도혁이 오른손에 권총을 왼손엔 칼을 든 채 오두막 밖으로 걸어나간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간지 몇 초 되지 않아 밖에선 비명소리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기괴하고 잔혹해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은 쁘레오였다.
10여 분이 지나자 점차 비명소리가 줄어들었고 거칠게 문이 열린다.
쾅!
그리고 도혁이 걸어들어온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쁘레오는 기겁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목욕을 했다.
하지만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표정과 눈빛이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몇 명인지 모를 사내들을 단숨에 죽인 사람의 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눈.
“덥군.”
걸어오던 도혁이 책상 위에 있던 1.5L 페트병의 뚜껑을 열어 머리에 붓는다.
물이 흘러내리며 묻었던 피가 쓸려 내려갔지만 곳곳에 묻은 피를 깔끔하게 씻어내지는 못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다시 쁘레오 앞에 털썩 앉은 도혁.
쁘레오는 경외가 가득한 시선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세계 최고의 히트맨.
블랙러프가 가장 경계하던 사내.
이 설명을 듣고도 사실 믿지 못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사내의 실력이 아닌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협조한 것이니까.
하지만 틀렸다.
앞의 두 설명으로는 이 남자를 정의할 수 없다.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
전쟁의 신이다.
도혁이 세수하듯 얼굴을 세차게 비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아직 말도 꺼내기 전이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쁘레오였다.
숙소로 돌아온 도혁은 거실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맹혁이 편하게 사용하라고 잡아놓은 장소였다.
모든 의문이 풀린다.
자신을 죽인 알도프.
브라보팀 모두를 죽인 바로크.
그리고 그들은 현재 유일무이한 카르텔을 만들기 위해 옐로우 맘바를 제거하려 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하는 선택.’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두호는 소파 옆 바닥에 놓여진 아주 긴 가방을 집어들었다.
낮에 맹혁에게 부탁했던 물건이다.
사람 키 정도는 되보이는 가방을 번쩍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이윽고 가방의 잠금쇠를 풀어헤치니 분해되어있는 저격총이 들어왔다.
Mk.11.
미 네이비씰이 사용하는 최신형 저격총이었다.
도혁은 저격총 위에 얹여진 맹혁의 쪽지를 확인했다.
- 내일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저희도 준비 끝났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총기를 조립하기 위해 부품을 집어든다.
부품을 확인하던 도혁이 말없이 창문을 바라본다.
이윽고 혼잣말을 하는 도혁.
“어떻게든 보자고. 코와르키 형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