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4화 : 절대 두 팔은 떨어트리지 마라
그녀의 염려를 듣고 두호는 아무런 대답없이 컵에 든 물을 마셨다.
두호가 언짢아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는 예수.
”예전 두호씨는 안정되었고 차분했어요. 그저 흐르는 사람 같달까.“
그녀가 이런 말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가 있었다.
준모가 테러를 당한 이후 두호는 어딘가 모르게 변해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는 행동이나 훈련을 대하는 태도 자체도 불안정해 보인다는 코치진들의 공통된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장작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아요,”
두호의 담당 매니저로서 당연하게 걱정할만한 사항이다.
더군다나 오랜 안 사이는 아니라도 두호와 예수는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요새 날카롭긴 했습니다.”
그의 진짜 속사정을 알 수 없는 예수는 그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본인이 느끼지 못했다면 점점 큰 일로 번져 갈테니까요.”
두호는 그런 걱정을 해주는 그녀가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
직장동료.
사실 동료란 참 애매한 관계다.
같은 직장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갖기는 어렵다.
월급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보지 않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사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팀을 생각하고 인간 백두호라는 사람을 생각해주고 있었다.
“그럼 예수씨.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대신 경기 뛰어달라는 것만 아니면 다 들어드릴게요.”
그녀의 유쾌한 대답에 두호가 싱긋 웃었다.
“아쉽네요. 그걸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번지수 잘못 찾으셨어요. 준모씨한테 하셔야죠.”
두 사람은 실로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이윽고 두호가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한다.
“한 일주일 정도만 휴가 다녀올 수 있습니까?”
“휴가요?”
예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XFC의 첫 계약.
그리고 첫 데뷔 무대를 앞둔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시기이다.
그녀가 말없이 두호를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인 그.
하지만 그 흔한 고등학교 졸업조차 하지 못했으며 교도소를 다녀온 소년 범죄자.
준모를 제외하고는 누구를 만나는 것조차 잘 보지 못했다.
두호는 분명히 과거와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두호가 정중하게 예수에게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자신 같은 매니저는 건너뛰고 이채호 대표에게 직통으로 연락을 할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코치들과 자신에게 의사를 물어보고 그에 따른 판단을 존중해주려 한다.
예수가 밝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제가 코치님들한테도 말씀 드릴게요. 대표님한테는 직접 연락하시면 될 것 같아요.”
“승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방금전 두호를 안내했던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샐러드 먼저 드리겠습니다.”
“와!”
예수가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음식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두호가 피식 웃는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네.”
두 사람은 챔피언전의 경기를 다시 한번 더 자축하고 참 오랜만에 편안한 저녁식사 자리를 즐기게 되었다.
예수를 택시 태워 귀가시킨 두호가 광화문 거리를 말없이 거닐고 있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높은 빌딩의 사무실.
자신도 그들처럼 아직까지 매듭지지 못한 일이 있다.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두호.
“어 채호야.”
전화 상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채호였다.
-네. 말씀하시죠.
“나 휴가 일주일만 쓰자.”
-네?
상당히 놀란듯한 채호의 반응.
잠시 아무 말이 없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두호가 작게 미소 지었다.
-형님은 옛날부터 느끼는 거지만 항상 급작스럽네요.
“운동선수는 휴가 없어?”
-있죠. 있는데...
채호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듯 잠시 말끝을 흐렸다.
-하긴 최근 준모씨 일 때문에 제대로 쉬긴 그랬겠네요.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두호는 오늘 바르고프와 있었던 일의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채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그럼 계획은 어찌 되십니까.
두호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멀리 새 하얀 조명이 쏟아지는 광화문을 바라보았다.
“정리해야지.”
짧은 대답.
그러나 그 대답의 진짜 의미를 알아챈 듯 채호 역시 짧게 대답했다.
-네.
“필리핀 가는 비행기 티켓 예매해줘. 내일 점심쯤으로.”
-네. 그쪽 현지 사정 밝은 가이드 하나 붙여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아는 친구니 도움 될 겁니다.
“그래 고맙다.”
두호는 전화를 끊고 말없이 광화문을 바라보았다.
광화문은 눈에 훤하게 보이지만 그 뒤에 위치한 경복궁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안된다.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
바로크의 미간이 찌푸러진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 하늘을 올려다본다.
책상에 놓여있는 전화기의 스피커 폰으로 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조리킨이었다.
-시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현장 자체도 이미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습니다.
바로크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담배를 향해 손을 뻗는다.
듀퐁의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불을 붙인다.
팅!
“후우.”
그의 입장에서 바르고프는 아직 죽으면 안되는 인물이다.
그 정도 되는 실력자를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들의 프락치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정보를 메꿔주기 때문이다.
“조사는 가능한가?”
어떠한 흔적이라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옐로우 맘바의 소행인지 아니면 제3의 세력인지.
자신이 한국으로 들개를 보낸 이유는 장기전으로 묶어두기 위함이다.
찰리팀이라는 전천후한 타격대를 한국에 잡아둔다면 자신들은 병력을 나누어 다른 옐로우 맘바팀을 직접 공략할 계획이었다.
조리킨의 대답은 그의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얼마전 이 창고가 국가 소유로 바뀌어서 슬슬 직원들의 발걸음이 잦아졌습니다.
바로크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화를 삭혔다.
더군다나 자신의 대형 투자자인 이재하마저 옐로우 맘바에 납치되어 미국으로 이동한다는 첩보가 들려온다.
자신들이 쫓던 모두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상황.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까지 예상했을까.’
정확하게 꼬리를 자르기 위해 장소와 시기까지.
누군가 이 싸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일단 백두호는 잠시 보류하지. 배후를 찾기 전까지는. 자네들 모두 미국으로 이동해. 새 리더를 보내놓겠다.”
-네. 알겠습니다.
이윽고 전화는 끊어졌고 바로크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끈다.
소리를 줄여놓아 화면만 재생되던 티비에서 한 사내가 비춰진다.
바로크가 리모컨을 집어들어 티비 음량을 높인다.
- 알도프 코와르키 선수가 XFC 미들급 챔피언 6차 방어에 성공합니다!
자신의 형제가 방어전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미소라도 지을법 하지만 바로크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하필 김도혁이 동생이란 놈이 알도프와 같은 미들급이라니.’
더군다나 실력마저 포드탱을 꺾을 정도의 실력이다.
입식 출신 선수이지만 그 선수의 강함은 자신도 인정하는 바이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다.
‘알아볼 필요는 있겠어.’
이윽고 책상 위에 설치된 호출버튼을 누른다.
얼마 되지 않아 정장차림에 한 사내가 바로크의 방으로 들어왔다.
“들개 몇 마리나 남았어.”
직원이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이야기했다.
“작전 투입중인 인원을 제외하고 모두 열일곱입니다.”
“모두 미국으로 보내. 지금.”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여지껏 단 한 번도 이 정도 인원의 들개들이 움직인 적이 없었다.
바로크는 눈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사내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의자에서 일어나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바로크.
이내 그의 표정은 미소로 바뀌어있었다.
“미국이라니. 차라리 다행이지.”
***
다음날 체육관.
캐리어를 옆에 둔 두호가 팀원들과 마주보고 있었다.
채수가 심통 난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두호를 노려본다.
“우리는 여기에다 박아두고 본인은 휴식을 즐기시겠다?”
두호가 그의 반응을 보며 싱긋 웃는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노는 사람...”
주민이 표정을 구기며 채수의 어깨를 툭하고 밀었다.
“그만해 임마. 누가 놀고 누가 일하는데.”
탁현이 미소를 띄운채 두호에게 무언가를 내민다.
“고체 파스입니다. 아직 정강이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그가 생각하더라도 올 한 해 동안 너무 많은 경기를 소화한 두호였다.
프로 선수들도 일 년에 4전 이상을 치루지 않는다.
그러나 두호는 비공식적인 경기까지 합한다면 벌써 8전이 넘어간다.
그렇기에 오히려 두호가 잠시의 휴가를 원하니 대견하게 생각하는 그였다.
‘어리다고 눈치 볼 법도 한데. 프로답게 자기 몸상태를 잘 짚어서 다행이군.’
두호가 탁현이 건넨 파스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잘 쉬다 오십시오.”
“네.”
두호가 자신의 캐리어를 집어들고 몸을 돌린다.
사람들은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계속해서 손을 흔든다.
두호가 계단을 올라오자 주차장에서 채호가 그를 맞이했다.
“가시죠.”
“차 상해서 싫다고 하지 않았어?”
채호가 짐짓 모른 척을 한다.
“제가 언제요.”
두호가 피식 웃자 채호가 그의 캐리어를 받아든다.
두호는 곧장 조수석에 탐승했고 채호 역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운전석에 탑승했다.
채호의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 순간 무엇인가 깜빡한 듯 채호가 조수석의 수납함을 가르켰다.
“그곳에 티켓과 자료 넣어 놓았습니다.”
두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납함을 열어보자 서류 봉투가 보였다.
곧바로 봉투를 집어들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코드네임 하프피노. 아버지는 필리핀 사람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라 하프피노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과거 옐로우 맘바 델타팀 소속으로 있었는데 현재는 필리핀에서 가장 잘 나가는 오퍼상이죠.”
“얼굴 보니까 기억이 나네.”
“네. 그 친구가 윈스턴 간부들의 비자금 조성과 현금화를 도맡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왜인지 어느 순간부터 손을 뗐다고 하네요. 아마도 그 부분을 파고들면 윈스턴의 내부사항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 안에 항공권을 확인했다.
“비즈니스야?”
“네. 아무래도 이코노미로 가면 사람들 때문에 피곤하실테니. 퍼스트가 없어서 좀 아쉽긴 합니다만.”
“고맙다.”
두호가 봉투에 다시 자료를 넣은 다음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이상하지.”
채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호를 바라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두호는 눈을 좁히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용병이었을때도 윈스턴은 군수 산업체 10위권 안에도 못 드는 회사였는데. 어느새 6위권. 심지어 다른 사업으로도 진출하려는 의도도 엿보이고.”
그제야 채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 차분하게 되짚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느덧 차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두 사람 모두 차에서 내렸고 채호는 트렁크에서 두호의 짐을 꺼내주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고맙다. 다녀올게.”
척-
두호는 목에 걸어두었던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공항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