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화 : 절대 두 팔은 떨어트리지 마라
“좋은 하루 되세요!”
택시기사의 힘찬 인사가 있었지만 두호는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쾅!
택시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올린다.
저 멀리 높은 언덕에 자신의 집이 보인다.
‘이 먼거리를 준모는 아무 불평 없이 매일 왔던거구나.’
오늘의 사건은 자신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감행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두호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만큼 물러졌다는 얘기겠지.’
전쟁터에서는 잠을 자다 포탄을 맞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작전지로 이동중에 적에게 저격을 당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고 적의 움직임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전장을 떠나온 용병은 평화에 굶주려 있다.
잊고 지내던 평화의 달콤함에 조금씩 몸은 위험을 감지하는 방법을 잊게 된 것이다.
과거 래진이 한 말이 떠오른다.
- 확인 사살은 왜 하는지 알아?
- 위험하기 때문 아닙니까?
- 뒷탈이 없으려고 하는 거야. 운 좋게 살아난 놈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복수할지 모르거든.
- 그렇군요.
자신의 안일한 대처로 인하여 이런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과거의 시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하고 뛰어나야 한다.
정신과 각오도 새롭게 무장해야 한다.
날카롭게.
더 차갑게.
문득 조금 전 무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무의 표정은 두호가 처음 본 것이다.
세상의 공허함은 모두 가진듯한 차가움.
그녀의 인간미 가득한 말투는 사라졌고 위엄을 가진 절대자 그 자체였다.
“이 녀석이. 오냐 오냐 하니까.”
하지만 두호 역시 지지않고 그 시선을 받아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팽팽히 얽힌다.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게 그리 힘든 일이었더냐.”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한 듯 했다.
이윽고 그녀의 주위에 뜨거운 아지랑이가 올라온다.
태풍의 찬 바람이 아닌 뜨거운 바람이 몰려와 순식간에 두호와 그녀를 감싼다.
주위에 사물들이 세차게 흔들리며 기괴한 소리를 낸다.
끼익!
이내 건물 외벽에 붙어있던 간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쾅!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도 두호는 무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켜내야 할 것을 다 버리면서까지 하지 않는 게 지혜란 말입니까?”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이유와 결과가 있는 것이지.”
언제나 하나의 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미래의 결과는 현재 자신에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그녀의 말을 들은 두호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두호의 사건은 어떤 잘못 때문이냐고.
반성과 극복을 보여주는 준모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냐고.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숙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호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모습을 본 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수증기와 살을 태울듯한 뜨거운 바람은 사라졌다.
무가 천천히 걸어와 두호의 뺨을 어루만진다.
“아해(兒孩)야. 여지껏 지혜롭게 잘 대처하더니 이게 어찌된 일이니.”
두호는 억지로라도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감는다.
“그렇기에 말했잖아.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을거라고.”
무는 두호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그녀 역시 인간사의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옴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자의 역할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조율할 뿐.
두호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부탁이 있습니다.”
무는 평소와 같이 온화한 얼굴로 바뀌었다.
“뭔데?”
“처음 제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 한가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무는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적인 면죄부 있잖습니까.”
“그래. 기억하고 있어.”
무는 뒷짐을 진 체 천천히 몸을 돌린다.
이윽고 손을 뻗어 자신이 떨어트린 간판을 다시 올리기 시작한다.
공중부양을 하듯 두둥실 떠오른 간판이 외벽으로 착하니 붙는다.
“그 면죄부를 쓰겠습니다.”
무가 고개만 돌려 자신의 어깨 너머로 두호를 바라본다.
“저로 인해 벌어진 일.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렇게 쓰라고 준 게 아니야.”
사실 두호는 면죄부를 줄 만큼 충분하게 잘해주었다.
선한 영향력.
도전과 극복.
이미 한국에서는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면죄부를 사용하게 둘 수는 없었다.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 무가 작은 한숨을 내쉰다.
“결자해지(結者解之).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하지.”
천천히 걸어와 두호의 앞에 다시 다가선 무.
“지금부터 블랙러프와 너의 과거. 이 모든 건 김도혁의 이름으로 해결해.”
두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무가 답답하다는 눈으로 두호를 흘겨본다.
“에휴. 앞으로 그쪽 일을 할 때 김도혁의 몸으로 돌려주겠다는 얘기야.”
충격적인 무의 발언에 두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
사람을 되살린다는 것은 상상만 해보았지 정말로 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어. 일 처리 하기 전에는 미리 말하고.”
“네. 알겠습니다.”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
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먹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풍의 눈을 지나쳤는지 멈췄던 비가 다시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악인이 악인을 지우는 것이 인간사의 유일한 자정작용이겠지.”
평소와 달리 무는 힘 없이 몸을 돌렸다.
“간다. 나중에 또 보자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두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을 그녀가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걸어 집 앞 돌계단을 올라가는 두호였다.
“형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두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흰 와이셔츠만 입은 체 서류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채호였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어떻게 된 일이세요.”
채호 역시 뉴스를 통하여 소식을 접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예수에게 보고를 받게 되었다.
병원을 나섰다는 말에 급히 두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 집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집 앞 계단에 나란히 걸터앉은 두 사람.
두호는 병원을 나선 뒤에 벌어진 일을 천천히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채호는 이를 갈았다.
“이 새끼들이 정말...”
“하나는 도망쳤고. 나머지는 이모에게 수습 부탁드렸다.”
“어르신께서도 얼마 전 아끼시는 부하가 죽었다 하더군요.”
“채호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사뭇 낯설었다.
과거 용병시절 도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다.
단 하루였지만 두호는 어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 옛날에 쓰던 장비들 기억하지? 그것 좀 구해다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두호의 부탁.
그 부탁에 숨은 의미를 생각하니 채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진지한 두호의 눈빛에 그는 만류하기를 포기했다.
채호의 걱정을 이해한 듯 두호가 싱긋 웃는다.
“별일 없을 거야. 나 믿지?”
채호는 그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네. 믿죠. 그럼 언제까지 구해다 드리면 됩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XFC 입성하기 전까지 미리 처리 해놓을게.”
“네. 그리고...”
채호가 부채질을 할 때 사용하던 서류 봉투를 두호에게 건네주었다.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어서 말씀은 안 드렸지만, 이렇게 되면 형님한테 더욱 필요한거네요.”
두호가 서류 봉투를 곧장 열어보았다.
옐로우 맘바 델타팀이 밝혀낸 포드탱에게 송금한 예상 인원 목록이었다.
“그 시간대 동시 다발적으로 200만불을 송금한 사람이 전 세계에 4명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윈스턴이 있으니 사실상 맞을 겁니다.”
“그래. 고맙다.”
두호는 서류 봉투를 집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채호는 자리에 앉은 채 담배 하나를 꺼내 문다.
그러자 채호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걸어가는 두호를 불러세웠다.
“아 형님! 작업 시작은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왜?”
“래진 보스가 작전 장소를 외국으로 옮기려나 봅니다.”
“그래. 얘기 들어오면 바로바로 알려줘.”
두호는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낀 채 집으로 걸어가 버렸다.
채호는 담배의 불을 붙이며 연기를 뿜는다.
“후우.”
단 한 번 와봤지만 이곳 언덕에서 내려보는 두호의 동네는 묘한 기분을 들게한다.
“나나. 형님이나. 용병 바닥을 떠나기에는 글렀구만.”
경기도 청평의 한 야산.
어둠속에서 플래쉬 하나가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한 듯 빛이 비치는 모든 곳에 연갈색 워커들이 보인다.
래진이 마지막으로 장비 점검을 마치고 천천히 팀원들을 돌아본다.
오늘은 왜인지 두꺼운 방탄조끼까지 착용한 찰리팀의 모습은 어딘가 결연함까지 보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래진.
“영철. 준비 됐나?”
“네. 찰리팀 전원 스탠바이 끝났습니다.”
“그래. GPNVG 착용.”
래진의 명령에 곧바로 찰리팀 전원이 검정색 캡 모자를 살짝 벗어 머리에 고글을 뒤집어쓴다.
모두가 고글을 뒤집어 쓰니 서 있는 공간이 기우뚱하며 흔들린다.
-끼익.
-덜컹.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에서 한 사내가 큰 소리로 외친다.
- 택배요!
- 뭐야. 지금 시간에도 택배가 와?
이윽고 팀원들이 서 있는 뒤쪽에 문이 활짝 열린다.
래진이 무전기에 대고 조용히 속삭인다.
“지금.”
래진의 신호에 들어오던 빛이 꺼지고 번개처럼 찰리 팀이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윽고 벌어진 총격전.
-푸슉푸슉
“으악!”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밝은 곳에 있던 인간은 갑작스러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다.
옐로우 맘바가 사용한 것은 GPNVG.
야간 전투를 위하여 활용되는 최신형 4안 야시경이다.
택배차로 위장하여 목표물 접근.
이윽고 래진의 신호에 맞춰 전력 차단기를 내린다.
기습적인 야간 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입구를 뚫고 들어간다는 래진의 전략이었다.
작전명 윙 스크류(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나선형 스크류로 뽑아 올리는 방식).
야간의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엄청난 전략적 우위를 가져온다.
입구를 지키던 경호 병력들은 저항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쓰러진다.
모든 병력이 정리가 되었는지 더 이상의 소음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입구 열어!”
래진이 거친 목소리로 소리치자 한 사내가 트럭을 향해 달린다.
이윽고 차의 시동이 걸렸고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 대저택의 철문을 들이받는다.
콰앙!
굉음과 함께 철문이 부셔지며 옐로우 맘바가 진입에 성공한다.
래진은 권총을 재장전하며 영철에게 말한다.
“1조는 영철 따라서 뒷문 방향으로. 2조는 나와 함께 바로 내부로 침투한다. 실시!”
“실시!”
찰리팀은 래진과 영철을 필두로 둘로 나뉘어 흩어졌다.
깨지고 부셔지는 소리만이 저택 안에 가득했다.
귀를 아프게 하는 총성 소리는 없지만 바람을 찢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침실에서 한 사내가 겁에 질린 채 이불을 뒤집어쓴다.
“이런 씨발...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어서 이 상황이 정리되길 바라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곧 자신의 방문으로 많은 숫자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저벅저벅.
점점 발소리가 커지더니 이윽고 자신의 침실 문 앞에서 소리가 멈췄다.
사내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불을 살짝 들춰 실눈으로 문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쾅
문짝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며 사내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순식간에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를 포위한 그들.
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겁을 집어먹은 사내가 양손을 들어 항복의사를 전한다.
그 순간 어둡던 방의 전기가 깜빡거리며 돌아왔다.
방탄조끼에 야시경을 쓴 사내들.
정면의 두 사내가 자신을 향해 권총을 겨눈다.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뭡니까. 누구에요!”
“이재하 씨.”
이윽고 정면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사내가 야시경을 벗어던지며 씨익 웃는다.
래진이었다.
“같이 해외 여행 좀 가야겠습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내에게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