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
모두가 잠든 시간.
호텔의 객실 문 하나가 열린다.
-띠리리
이마에 가득 땀이 맺힌 두호가 들어선다.
불을 켜고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샤워기 앞에 선 그는 호스에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옷과 피부에 묻어있던 피가 물에 쓸려나간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거울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결국은 제자리인 건가.’
몸과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과거는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손을 들어 보인다.
훈련으로 인해 투박해진 손.
그리고 팔뚝과 목에 남은 어린 시절 두호가 남긴 상처들.
‘똑같군’
오늘따라 얼굴만 다를 뿐 모든 것이 김도혁이다.
바둑에서 하나의 수는 그 전에 놓은 수가 문제가 된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과거의 자신이 남긴 자국들로 인한 것이다.
피식!
실소가 나온다.
그러보니 지나치게 백두호가 되고자 노력했다.
김도혁이든 백두호든 주어진 여건에 최선만 다하면 되는 것을 말이다.
감상에 젖을 필요가 없다.
늘 그래왔듯이 장애물이 있으면 치우고 극복하며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두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검은 바다 위로 깜빡거리는 불빛이 지나간다.
어디론가 떠나는 배일 것이다.
필린의 사람들이 호텔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가져다 놓고 앉았으나 두호는 달랐다.
호텔에 특별히 부탁을 하여 따로 식단을 꾸몄다.
소금간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닭가슴살에 브로콜리뿐이었지만 두호는 아무런 불평 없이 맛있게 먹었다.
“확실히 격투기 선수들이 제일 고생인 것 같아요.”
브로콜리를 크게 한입 베어문 두호를 보며 예수가 말했다.
“밥도 맛없게 먹는데 매까지 맞으니까 불쌍하죠?”
두호가 농담을 던지자 예수는 살짝 웃었다.
“뭐 다 그런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니까요.”
퍽퍽한 음식이지만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수 없다.
예수가 옆에 앉아 있는 건 혹시라도 정해져 있지 않는 음식에 손을 댈까봐 감시하는 것이다.
“오늘 일정은 뭡니까?”
“킹 챔피언쉽 본사로 가 기초검사를 받고 조나단 왕과 만나게 될겁니다.”
“조나단 왕?”
“네. 그 분 입장에서 두호씨는 정말 좋은 캐릭터이니까요. 자신의 단체로 회유하기 위해 만나자고 하는 것입니다.”
두호가 눈을 빛냈다.
“혹시 포드탱 선수도 만날 수 있습니까?”
“네. 오늘은 경기가 잡힌 모든 선수들이 모이는 날이니까요. 아마 구열씨도 올 거에요.”
구열이란 이름을 들은 두호가 웃었다.
좋은 친구다.
결코 포기를 모르는 집념의 선수.
오랫동안 만나도 기억에 지워지는 사람이 있고 짧게 보았지만 오랫동안 각인되는 사람이 있다.
구열은 후자였다.
“오늘 대표님도 구열씨와 함께 올겁니다.”
두호는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에서 내리는 코리안 몬스터팀이었다.
준모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내뱉는다.
“와 건물이 진짜 멋있네요.”
초고층의 빌딩은 아니었지만 전체가 U자형 건물이라 그런지 재밌고도 멋이 흐른다.
“가운데를 기준으로 왼편이 사무국. 오른편이 킹 챔피언쉽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대회 운영과 마케팅을 담당의 사무국.
오늘 두호가 가야할 곳은 오른편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일행이 유리 회전문을 들어서자 벌써부터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킹 챔피언십 직원들과 이번 대회 출전 선수들의 세컨들이다.
준모는 눈이 휘둥그레져 두리번거렸다.
“어째서 생긴 것들이 전부 불한당 같을까요”
두호 일행을 바라보는 눈들이 조금은 차갑다.
어쩌면 경기는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한 사내가 일행을 향해 걸어왔는데 탁현이 한 걸음 빨리 나선다.
“데이비드.”
“미스터 탁.”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며 포옹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너무 오랜만입니다.”
탁현의 안부를 묻고 난 데이비드가 고개를 돌려 두호를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코리안 몬스터.”
“백두호입니다.”
탁현이 데이비드의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XFC의 기술자문이자 미국 최대 MMA 체육관 골드스피릿의 수석코치인 데이비드입니다.”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호씨 미국에서도 이번 매치에 기대가 많습니다.”
그때 누군가 데이비드를 불렀다.
데이비드는 그쪽으로 고개를 한 번 돌렸다가 빨리 말했다.
“저희 선수 검사가 시작된 모양입니다. 또 보죠.”
데이비드가 사라졌고 탁현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골드스피릿 체육관에 두호씨 목표인 알도프 코와르키가 속해 있습니다.”
두호는 듣고만 있었다.
“저 친구가 코와르키와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언제가 그와 만나게 된다면 유용하게 사용할 패라는 의미로 던진 말이다.
“두호 선수 메디컬 테스트 가죠. 나와 두호씨만 입장할 수 있으니 다른 분들은 모두 여기서 대기해주세요.”
두호는 예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국의 자랑! 코리안 몬스터 입자앙!”
준모가 거침없이 소리친다.
필린 사람들 모두가 깔깔 거리며 웃었다.
“엇, 대표님!”
준모가 돌아섰다.
회전문을 들어서는 채호를 발견한 것이다.
“여러분 코리아 필린의 이채호 대표님께서 오십니다. 박수.”
준모가 힘껏 박수를 쳤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채호는 껄껄 웃었다.
“준모씨야말로 정말 우리 회사에 필요한 인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니까 말이에요.”
“두호군은?”
“방금 막 들어갔어.”
채호가 대답했다.
“구열씨.”
사람들이 구열이 다가오자 환하게 맞이했다.
“네가 구열씨 데리고 메디컬 테스트좀 다녀와라. 난 일이 있다.”
“그러죠.”
채호는 구열의 어깨를 툭 쳤다.
“긴장하지 마시고, 잠깐 난 사무국 좀 다녀오죠.”
채호는 양해를 구하고 사람들을 헤집고 사라졌다.
포드탱이 거칠게 소리쳤다.
“장난해? 그걸 하나 처리 못해서.”
수화기 너머의 사내는 변명하는 듯 했지만 그는 분노한 표정으로 전화를 종료했다.
“거지 새끼 아니랄까봐.”
소파로 패대기치듯 전화기를 던져버고 털썩 주저 앉는다.
돈.
언제쯤이면 그놈의 돈 앞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맞는 것도 돈이고, 때리는 일도 돈을 벌기 위함이다.
실패를 전혀 예정하지 않아서일까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진다.
만약 이번일이 바깥으로 터지기라도 하면 선수 생활은 끝이다.
논타이틀 매치의 파이트 머니 치고 조금 많은 액수를 받긴 하지만 족보도 없는 놈이라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거슬렸다.
돈을 보면 한 번만 눈 딱 감고 경기를 할 수도 있다 싶지만 미국 진출을 위해서 쌓아야 할 커리어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던 차에 돈의 유혹은 포드탱을 완전히 흔들어 버린 것이다.
딸칵!
“이런 아늑한 공간도 있고. 확실히 선수들에 대한 복지가 좋네요 킹 챔피언쉽은.”
이곳은 메인매치 선수들에게 제공되는 대기실이다.
마음을 다스리며 최선의 경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킹 챔피언십만의 특실이다.
“넌 뭐냐?”
가방을 들고서 채호는 빙긋 웃었다.
“포드탱 선수, 이번 백두호씨 매니지먼트인 필린의 대표이사 이채호입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포드탱은 움찔했다.
“무슨 일입니까? 정해진 약속도 아니고?”
아무리 상대 소속사 대표지만 이렇게 불쑥 쳐들어와도 되느냐는 불만이다.
“드릴 것이 하나 있어서.”
채호가 가방으로 손을 넣었다.
작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포드탱에게 내밀었다.
포드탱이 뭐냐는 듯 잠시 바라보다 주춤하며 받았다.
“보세요!”
포드탱이 손을 뻗어 서류봉투를 열어보았다.
사진 몇 장이 들어있었다.
자신이 보냈던 거지들이 포박을 당해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사진은 뜨랑크 세컨중 한 명이었다.
과거 자신의 세컨으로 활동했었다.
포드탱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갑자기 훅 들어온 칼이다.
더구나 칼자루를 쥔 사람이 백두호의 소속사 대표라는 것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대책이 없을 때는 빨리 상대 패를 묻는 것이 좋다.
버텨봤자 손해만 커진다.
채호가 가방에서 다시 서류 몇 장을 꺼냈다.
“당신이 벌인 일 그 모든 것을 함구하는 조건으로 제안 드리겠습니다.”
채호는 자신의 품 안에 있던 만년필을 꺼내 포드탱에게 건넨다.
포드탱은 만년필을 받아 쥐어야 했다.
“이번 논타이틀 매치를 타이틀 매치로 바꾸죠. 물론 그쪽 요구조건은 원래대로 안고 가고. 킹 챔피언쉽도 좋아할 겁니다. 언론쪽은 저희가 알아서 하죠.”
“이런 개 씨...”
단 한 경기로 미들급 챔피언의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
채호가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일을 저지를 거였으면 제대로 했어야지.”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렇지만 길은 없었다.
사사사삭!
싸인을 했다.
싸인을 하지 않고서는 나갈 길이 없다.
사인이 끝나자 채호의 눈빛이 사뭇 달라진다.
“이 일을 제안한 사람 누구입니까.”
포드탱이 이것만은 발설하기 꺼려하는 눈치이자 채호가 빙긋 미소 짓는다.
“편하게 얘기해주시죠. 어차피 이 일을 발설해봤자 저희도 얻는 게 없습니다.”
“그럼 왜 궁금해 하는 겁니까?”
“뭐. 간단하게 재발 방지라고 칩시다. 뒷일은 우리가 탈 없게 처리할 테니까요.”
포드탱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일은 틀어졌고 자신에게 나쁠 것도 없다.
더군다나 뒤처리까지 알아서 해준다니.
포드탱은 포기한 듯 말을 시작했다.
“2주 전. 매칭 준비를 하는 동안 한 사내가 날 찾아왔었습니다.”
포드탱은 자신이 거액의 돈을 송금 받았다는 사실과 의뢰를 했다는 사람의 인상착의를 설명해주었다.
채호는 눈을 좁혔다.
‘그 정도의 자금력을 겨우 신예 한 명 잡는데 쓴다고? 더군다나 없어져도 모를 거지들을 쓰다니.’
상당히 조심성이 강한 인물인게 분명하다.
“송금 시간이 언제입니까.”
바하마 송금자의 이름 역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름과 송금좌 관련 정보 일체는 모두 거짓으로 봐야한다.
“잠시만.”
자신의 핸드폰으로 바하마계좌의 입금된 시간을 확인해본다.
“11시 37분입니다.”
채호는 수첩을 꺼내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알겠습니다.”
채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푹 쉬시고 경기날 뵙겠습니다.”
채호는 정장 상의에 단추를 잠그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포드탱은 머리를 쓸어넘긴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일이야 어찌됐건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굴욕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리를 처음 보는 놈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내 왕관을 그렇게 쉽게 가져가게 할 수 없지.”
이를 갈며 경기날이 오기를 바라는 포드탱이었다.
대기실 밖으로 빠져나온 채호는 비상계단으로 들어섰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채호.
“네. 선배 접니다.”
박래진이었다.
-어.
채호가 자신의 수첩을 쳐다본다.
“2 주전 11시 37분. 포드탱 선수에게 바하마로 200만불이 입금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대에 200만불 출금된 계좌를 좀 찾아주세요.”
-며칠 걸릴거야. 델타팀도 바하마 서버 뚫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
“네. 알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고 채호가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