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채수부터 시작해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고 맨 마지막에 두호의 손을 잡은 아흐마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백두호 선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나눴다.
“안으로 가시죠.”
모두가 아흐마드를 따라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자신들의 체육관과 비교하더라도 딱히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중 제일 시선을 끄는 것은 유리막으로 덮인 천장이었다.
푸른 하늘을 떠가는 흰구름이 훤히 올려다 보인다.
크지 않았지만 작다고 열악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3일간은 자유롭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사흘 동안 이곳의 주인은 여러분입니다. 주인이 오래 있으면 손님이 불편한 법,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흐마드는 미소를 지은 후 돌아섰다.
아흐마드가 떠나고 본격적인 체육관 구경이 시작되었다.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운동기구는 물론 샤워실 휴게실, 심지어 영상분석실까지 갖춰져 있다.
긴급 사태를 대비한 간단한 의료장비도 비치되어 있다
“오히려 분위기가 좋으니까. 시설이 더 좋게 느껴지네요.”
준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일단 나와 탁현이 그리고 두호씨는 이곳에 남아서 웜업 트레이닝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세컨들은 모두 짐을 호텔로 옮겨주시고 숙소에서 휴식 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준모씨는?”
왜 안가냐는 듯 채수가 바라보았다.
준모는 눈을 치켜떴다.
“무슨 말씀을, 큰 경기를 앞둔 지금이야 말로 형님과 행동통일을 해야죠.”
두호를 지키기 위해서는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채수는 좋을 대로 하라는 듯 두호를 돌아보았다.
“웜업 트레이닝 준비합시다.”
두호는 탈의실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두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거 잘 들어.”
두호는 전화기에 대고 빠르게 말을 뱉었다.
***
승용차 한 대가 밝아오는 여명을 등지며 달려오고 있었다.
승용차는 백평식당을 향해 다가왔는데 운전자는 태건이었다.
밤에 나갔다가 지금 돌아오는 것이다.
탁!
차에서 내린 태건은 담배를 피워 물더니 식당 맞은편 느티나무 아래 있는 벤치에 주저 앉았다.
담배를 피우며 태건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좀체 그치지 않는 한숨, 암울한 그림자에 덮인 얼굴, 담배를 쥔 손끝이 미미하게 떨린다.
툭!
길다란 담뱃재가 떨어졌고 태건은 필터 밖에 없는 담배인데도 쥐고 있었다.
“흐흐흠!”
산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길게 숨을 쉬고 일어난 태건은 천천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선 태건이 소스라친다.
수미가 꼿꼿하게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가디건을 걸친 어제밤 복장 그대로다.
그건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름이라고 해도 밤 이슬을 맞았으면 몸이 으스스 할텐데 따듯한 차 한 잔 하게!”
“아...아닙니다. 어르신!”
이미 수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기 주전자 코드를 꽂았다.
그리고 한쪽에 놓인 찻상을 끌어 당겨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덮어 놓은 보자기를 벗기자 다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엎어 높은 다기들을 반듯하게 놓았다.
“밤 이슬 맞은 몸을 녹이는데는 따뜻한 차 한 잔이 제격이야”
전기주전자 물끓는 소리가 나고 끓는 물을 숙우에 적당히 부었다.
태건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올라가 찻상 앞에 앉았다.
“자네도 이제 나이가 있어 밤 새는 일은 버거울 텐데 야무진 아이가 없어.”
평소의 수미답지 않게 말이 많다.
그건 불안하다는 뜻이다.
자기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몰라 초조한 것인데 말을 많이 하여 가슴속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다스려 보려는 것이다.
숙우에 부었던 물을 찻주전자에 다시 옮겨 붓고 차 잎을 넣었다.
“며칠전 그분께서 또 차를 보내 주셨어.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우전(雨前)이라는 것이 가장 고가라고 들었는데.”
수미의 입에서 그분이라는 표현을 받는 이는 대한민국에 딱 한 명있다.
화천에 있는 보육원장 황성태.
사회초년생 시절 반란세력에 의해 사경을 헤매는 수미를 구해 줬다는 것 말고는 자신도 황성태에 대한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마시게!”
연분홍빛 찻물이 찻잔을 채웠고 태건은 가볍게 입술을 대고 한 모금 마셨다.
좋긴 좋다.
공복에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는 따듯한 차는 물과는 또 달랐다.
물보다 좀 더 부드럽고, 특히 입과 코에서 느껴지는 맛과 향기는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어르신!”
언제까지 침묵할 수는 없었다.
“영욱이를 데려왔습니다.”
뚝!
찻잔을 올리던 수미의 손이 멈췄다.
사람을 데려왔으면 면전에 세워둬야 하는데 지하실은 두 사람 말고 없다.
“어딨나?”
태건은 남은 차를 마셨다.
덜컹!
그때 지하실 문이 열리고 경수가 축 늘어진 영욱이를 끌어 안고 나타났다.
경수는 적당히 다가오더니 지하실 바닥에 영욱을 반듯하게 눕혔다.
파르르!
수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탁!
수미는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내려갔다.
사라락!
입고 있는 긴 치마가 바닥을 끌고 가까이 다가간 수미는 피로 범벅이 된 영욱을 내려다 보았다.
“여...영욱아!”
수미는 천천히 쭈그리고 앉더니 중얼거렸다.
“이놈아, 빨리 일어나 밥해야지. 어제밤도 굶었는데.”
덜덜덜!
영욱의 손을 쥐는 수미의 가녀린 손이 떨린다.
***
“자! 한 세트 더!”
탁현이 응원하듯 크게 소리친다.
두호는 차분하게 호흡을 내쉬며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밴드를 발목에 걸어 천천히 뻗어주고 당겨주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웜 업 트레이닝(Warm up).
직역하자면 몸을 따듯하게 덥히는 운동.
본 운동이나 경기전 가볍게 몸을 풀어주는 훈련을 뜻한다.
싱가폴과 한국에서의 시차는 고작 한 시간이지만 운동선수에게는 그것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시차의 맞춰 생체리듬을 바꾸어주고 몸의 긴장을 완화하여 부상을 방지하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전략전술은 중요하지 않다.
경기 당일날 전략을 이행할 최선의 컨디션을 만들어주는 것.
마지막 세트를 마치자 채수가 곧바로 물과 수건을 건넨다.
“좋아, 좋아!”
두호가 싱긋 웃는다.
훈련은 한국 때와 비할바가 아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컨들의 멘탈 트레이닝이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경기.
심리적 압박은 누구나 피하지 못한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몸 또한 거기에 휩쓸린다.
평상심.
세컨들은 지금 두호의 마음을 가장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쯤하고 숙소로 돌아가 휴식하시죠.”
“난 좀 더 있겠습니다.”
채수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두호가 미소 지었다.
“생각할 것도 좀 있고 몸을 움직여야 오히려 편안하게 휴식할 것 같습니다. 런닝이나 좀 하다 들어가겠습니다.”
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시고.”
탁현과 채수가 훈련가방을 챙겨들고 자리를 벗어났다.
준모는 발걸음이 떠나지 않는 듯 했지만 이내 두 사람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떠난 체육관은 조용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있던 트레이닝 복을 걸쳤다.
사방이 캄캄하다.
두호는 부둣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부두에는 관광선과 어선이 빼곡하게 정박해 있었고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마치 야경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처럼 부두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두호의 걸음이 커다란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아침 일찍 수산물 경매가 이뤄지는 곳이다.
경매가 없는 지금은 불이 꺼져 있었는데 두호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순간 어둠이 두호를 삼켜 버린다.
“분명히 여기로 들어왔는데.”
초라한 행색의 사내들이 도끼와 칼을 들고 들어선다.
이름하여 태국의 거지들로 불리는 갱들이다.
태국에서 싱가폴까지 원정을 왔다면 뭔가 굵직한 사건을 만들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흩어져서 찾자.”
넓은 경매장에서 쉽게 두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한 사내가 경매사들이 올라서는 의자 쌓인 곳을 살폈다.
여기저기서 손전등이 번쩍 거렸는데 경매장은 소란스러워 졌다.
확!
누군가 의자 뒤를 살피는 사내의 목을 휘감는다.
뒤에서 목을 조르니 사내가 발버둥을 치지만 얼마안가 잠잠해졌는데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두호의 눈이 섬광처럼 빛난다.
‘일단 한 놈.’
두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 사내가 궁시렁 거리며 도끼로 머리를 긁적인다.
“왜 이곳으로 들어왔지.”
빙글!
사내는 등 뒤가 이상한 듯 번개처럼 돌아서며 도끼를 찍었다.
하지만 두호는 어느새 도끼를 쥔 팔 깊숙이 들어와있어 맞지 않는다.
두호는 도끼를 쥔 팔을 단단히 부여잡고 사내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로 때렸다.
퍽!
“윽.”
이윽고 손아귀로 상대의 목을 강하게 때렸다.
툭!
사내의 목을 부여잡고 그대로 주저 앉는다.
두호는 주저앉은 그의 머리채를 잡고 강하게 니킥을 꽂았다.
털썩!
쓰러진 그를 조심스레 치워놓고 다시 어둠속을 바라본다.
그렇게 태국의 거지들은 하나둘 두호의 손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야!”
주위가 너무 조용하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누군가를 불렀다.
“망껀, 나뎃!”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뭐지?’
순간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걸음소리.
사내는 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두호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전부.’
두호의 손에는 자전거 튜브가 들려 있었다.
“씨발...”
죽여야 돈을 받는다.
사내는 마체테를 강하게 쥐어잡고 두호에게 달려들었다.
쉬익!
두호의 머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마체테.
그러나 두호는 단 한 걸음을 옮겨 그의 칼을 피해냈다.
허공을 가른 칼.
그의 무너진 무게중심에 살짝 발목을 받혀 그를 땅으로 메쳤다.
그림같은 발목 후리기.
두호는 자신이 들고 있던 튜브를 사내의 목에 감아 어깨 너머로 들어버린다.
목이 졸린 채 두호의 등에 매달린 형국.
얼굴이 새빨개지며 몸부림을 쳐보지만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타이어는 숨을 조여오고 가슴이 터질 듯 했다.
“말...말하겠습니다.”
사내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두호가 손을 놓자 우두머리 사내는 바닥에 엎어졌다.
학학학!
거칠게 숨을 쉬며 튜브로 조여졌던 목을 만졌다.
두호는 누워 있는 우두머리 사내를 가만 내려다 보았는데 조금씩 호흡이 안정되면서 침을 삼킨다.
“포...포드...탱입니다.”
“누구?”
“포드탱!”
두호는 눈을 찌푸렸다.
포드탱이 자신의 목숨을 노릴 이유는 없다.
자존심이 상했다면 경기장에서 실컷 두들겨 패버리면 되는 것이다.
채호의 말에 의하면 포드탱 측에 지불한 파이트 머니도 적지 않다고 했다.
명성에 걸맞는 예우를 했다.
우두머리 사내와 시선을 맞춘다.
움찔!
화들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진짜...진짜!”
그런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인 두호가 마체테 손잡이로 뒤통수를 때렸다.
뻑!
사내는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잠시 서 있던 두호는 경매 창고를 걸어나와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다 본다.
사방에 죽음이 넘실댄다.
과거에 발목잡혀 미래가 주춤 거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용병업계라는 곳이 한번 발을 담그면 내일의 삶이 안정될 수가 없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이다.
군대와는 또 다르다.
군인은 전역을 하면 전장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지워진다.
하지만 용병은 틀리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근래 들어 너무 많은 총구들이 다가들고 있다.
과거 자신의 흔적들이 문제가 되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