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갑자기 들개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스윽!
한 명이다.
일곱 명 중 딱 한 명만 죽었다고 믿는다.
물론 여섯 명의 의견이 옳다고 여길 수는 없지만 무시할 수는 더욱 없다.
“싱가폴 쁘락치한테 연락해.”
바르코프는 급기야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거지들한테 줄 돈을 다섯 배로 올린다고.”
“예!”
들개 하나가 자리를 빠져나간다.
“앞으로 김도혁이 살아 있다는 전제로 움직인다.”
바르코프의 지시에 들개 한 명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백두호가 김도혁? 하긴 신분 세탁이라는 것도 있지. 과거를 완전히 지우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당장은 박래진부터 잡는다.”
“조리킨으로부터 연락이 없는 것이 박래진에 대한 정보가 없는 모양인데.”
“사냥을 꼭 뒤쫓아가면서 하던가. 먹이를 놓고 불러들이는 방법도 있고.”
그러면서 바르코프는 피범벅이 된 사내를 내려다 보았다.
흠칫!
바르코프와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는 몸을 떨었다.
“살려준다고 했잖소.”
바르코프가 눈썹을 꿈틀했다.
“먹을 것을 차려놓으면 손님이 오겠지.”
-푸슉푸슉.
사내는 축 늘어졌다.
김영욱(金英旭).
백평식당의 주방장이자 두호가 오면 항상 맞이하는 털보사내다.
출세까지는 아니어도 주먹 좀 썼고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군데 뿐이었다.
그렇게 이 바닥에 들어와 나름 안정된 주먹이라는 평도 들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넌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아무리 봐도 넌 음지 체질이 아니다’
모질지 못한 그의 주먹은 걸핏하면 온정을 배풀었다.
그렇게 살아 돌아간 이는 보복을 가해 왔고 몇 번 죽을 뻔한 일도 경험했다.
그러다 수미를 만났고 남자지만 깔끔한 요리 솜씨에 식당의 주방장이 된 것이다.
‘어...어르신이 저녁시간 기다리실텐데.’
마지막 말까지 맺지 못하고 영욱은 축 늘어졌다.
***
황석희가 떠나고 한 가지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누웠다 하면 코 골기 바쁠 만큼 잠을 잘잤고 잠이 보약이라면서 넌 오래오래 살 것이라고 했던 황석희였다.
끼익!
가게 문을 열고 나온 태건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한숨을 토하듯 담배 연기를 내뱉다 말고 태건은 깜짝 놀랐다.
후우!
자기 말고 어디선가 또 하나의 한숨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소리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태건의 눈이 좁혀졌다가 점점 커졌다.
태건은 담뱃불을 끄고 다가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
수미였다.
여름이라고 해도 산 아래다보니 밤에는 서늘하다.
발목까지 내려온 주름치마에 얇은 가디건 하나를 걸친 수미가 고개를 돌렸다.
“자네 안잤나?”
“아니 어르신?”
“영욱이가 안와.”
“네에?”
태건이 깜짝 놀란다.
“늙으면 주책이지. 갑자기 잔치국수가 먹고 싶지 뭔가. 그래서 영욱이에게 말했더니.”
“국수를 사러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전화도 안 받고, 자네가 한 번 가보지 그래. 아무래도 불안해. 요즘 며칠 꿈자리도 그렇고.”
“국수를 사러 백화점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남양 5일장이라고 하는 곳 갔지.”
남양이면 여기서 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이다.
“알겠습니다!”
태건은 곧바로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 자동차 키를 들고 나왔다.
“걱정마시고 들어가 계시죠.”
태건은 빠르게 차를 몰고 사라졌다.
자동차 미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수미는 다시 한 번 숨을 내쉬었다.
영욱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게 무슨 냄새니?’
언젠가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으로 다가오던 수미가 코를 벌름 거렸다.
‘맞춰 보시죠.’
‘너무 좋은데, 흠흠 이게 뭐더라. 고추 볶음 아니냐?’
가까이 다가온 수미가 식탁 위에 올려진 고추 볶음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제 남양 5일장에 나갔다가 꽈리 고추가 너무 좋더군요. 그래서 좀 볶아 봤습니다.“
슥!
수미는 젓가락으로 고추 한 개를 입에 넣고 씹더니 눈이 커졌다.
‘어...어떻습니까?’
약간 긴장한 듯 묻는 영욱을 향해 수미는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본다.’
두호가 집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두호를 맞이한다.
“아들 왔니?”
두호를 보며 어머니가 배시시 웃는다.
“왜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응...”
어머니가 방 한쪽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두호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눈을 크게 떴다.
안마의자.
최근 티비 방송에서 유명 아이돌이 CF모델로 나오는 이른바 효도전신안마의자였다.
“나는 괜찮다는데. 너희 아빠가.”
어머니는 민망한 듯 아버지를 슬쩍 끌었고 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다.
“아들이 잘나니. 집에 이런 것도 하나 생기고 좋다야.”
두호가 안마의자에 덥석 앉았다.
“좋은데요. 이제 어머니 따로 침 맞으러 다니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아버지와 세운 계획이다.
어머니 손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돈을 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에 들여 놓도록 했는데 마침내 오늘 설치된 것이다.
두호는 서로 번갈아 가며 앉는 부모님을 잠시 바라보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두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사진 몇 장을 보고 있었다.
한국인부터 백인과 흑인 그리고 히스패닉계까지 여럿이다.
과거 자신이 캡틴으로 있던 브라보 팀의 SNS의 계정인 것이다.
바닥을 떠나서일까.
사진 속 인물들과 사선을 넘나들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잠시 밝았던 두호의 얼굴은 어느새 싸늘하게 굳어진다.
저들중 살아 있는 이는 채호 말고는 없다.
자신을 포함해 모두 죽었다.
타타탁!
자판을 두들긴다.
‘블랙러프’
자료가 없다.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검색을 해봤지만 블랙러프에 대한 신문기사 하나 볼 수가 없다.
벌컥!
옆에 어머니가 가져다 준 냉수를 마신다.
직감(直感)이다.
그러나 증거가 있는 어떤 사실보다 더 자신감 있는 확신.
‘2,3등이 연합하여 1등(엘로우 맘바)을 궤멸시키려는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건 겉으로 드러난 핑계, 즉 위장일지 모른다’
진짜는 엘로우 맘마 소탕이 아닌 김도혁을 찾고 있다는 예감.
김도혁은 죽었다.
자신은 백두호인 것이다.
‘호랑이가 멧돼지 옷을 입는다고 멧돼지로 볼 것 같나. 아무리 위장을 해도 대호의 기세 만큼은 감추지 못하는 법’
얼마전 래진이 했던 말이다.
김도혁을 둘러싸고 뭔가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몇 번 더 블랙러프에 대한 검색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소득을 얻지 못한채 컴퓨터를 껐다.
‘내일 10시 비행기라고 했지’
핸드폰 시계를 보며 방의 불을 껐다.
***
인천공항이다.
채호를 포함한 필린의 팀들이 하나둘 몰려 들었다.
포드탱과의 경기를 위해 결전의 땅 싱가폴로 떠나는 것이다.
“정말 미안합니다. 알람을 맞추고 잤는데.”
늦게 나타난 예수가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탑승수속까지 여유가 있어요.”
사람들은 예수를 달랬다.
그러면서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정작 와야할 사람 한 명이 오지 않았다.
“준모씨는요?”
채수가 두리번거리다 전화를 걸려하자 탁현이 피식 웃는다.
“저기 오네.”
채수는 고개를 들었다.
한 사내가 걸어온다.
돌고래가 헤엄치는 하와이언 셔츠.
밀짚모자와 함께 접시만한 미러 선글라스를 끼었고 거기다 끌고 오는 캐리어는 진하디 진한 빨강색.
거기다 하의는 포켓몬스터 파이리가 그려진 반바지다.
준모였다.
예수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다.
“아니. 무슨 휴가 가세요?”
그러자 준모가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외국을 처음 나가봐서.”
얼마전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은 준모가 싱글벙글하던 모습을 떠올린다.
“왜들 그러세요?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전혀 아니야.”
두호가 어깨를 툭 쳤다.
“형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가긴 어딜 가요. 곧 비행기 탈텐데.”
예수가 눈을 흘겼고 모두가 소리내어 웃었다.
“킹 챔피언쉽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준 비즈니스 티켓은 두호씨와 총괄매니저인 진예수님 둘입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한두 명도 아닌 일행 모두에게 비즈니스 클래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채호 대표님께서 전원 비즈니스 클래스로 탑승하라고 티켓을 모두 업그레이드 해주셨습니다.”
채수의 말에 모두가 휘파람을 불며 기뻐했다.
두호가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는다.
얼마 전 두호와 채호가 회의실에서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두호가 무엇이 문득 떠오른 듯 채호에게 말했다.
“우리 항공권은?”
“킹 챔피언쉽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준 티켓은 두 장입니다. 형님이랑 예수씨요.”
두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채호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른분들은?”
“저희 필린에서 해결해 줄겁니다. 대신 이코노미겠죠?”
두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모두 비즈니스로 해줘. 싱가폴까지 한 7시간은 가야할 것 아니야.”
“형님 인원이 너무 많아서 비용이 너무 커집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다구요.”
두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는다.
“나한테 청구해.”
“형님 상금 그거 빚 갚는데 다 쓰신거 아니에요?”
“나 어르신한테 맡겨놓은 돈 있잖아.”
“아.”
가끔씩 두호가 돈이 많다는 사실을 잊곤한다.
-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청류항공은 여러분의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비행기는 싱가폴 창이국제공항으로 가는....
부드러운 피아노 운율과 함께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와! 원래 비행기 좌석이 이렇게 넓어요? 너튜브에서 봤을 때는 안 이러던데.”
준모의 호들갑에 스튜어디스들까지 웃음 짓는다.
“잠깐만 주목해 주세요. 싱가폴 창이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킹 챔피언쉽 직원들과 미팅...”
말을 하다말고 채수의 눈이 두호에게 멎었다.
두호는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살펴보고 있었다.
예수가 입을 열려고 하자 채수가 검지를 입술에 대고 내버려 두라는 신호를 보낸다.
지금 가장 예민해 있을 사람은 두호다.
촥!
예수는 가림막을 채워 주었고 두호를 제외한 일행은 회의에 들어갔다.
두호는 저번 수미에게 부탁한 군수산업체 리스트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주거래 국가나 업체를 대조하다보면 블랙러프의 실체를 좀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저히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주변이 말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애써 운명을 거슬리려 하느니 오는 바람은 맞는 것이 현명하다.
좀 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함을 느낀 것이다.
팔랑!
서류를 넘기면서 두호의 눈살이 조금씩 찌푸려지고 있었다.
싱가폴 창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킹챔피언십에서 두 명의 안내 직원이 나와 일행과 악수를 나눴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그들이 가져온 밴에 올랐다.
“우리는 일단 체육관부터 들러 살핀 후 숙소인 뜨레밀 호텔로 이동할 것입니다. 스케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우웅!
밴이 공항을 떠났다.
두호에게 싱가폴은 처음이 아니다.
엘로우 맘바 시절 작전을 위해 몇 번 온 적이 있어 눈에 익은 거리가 제법 보인다.
“예수씨 거울 갖고 있죠?”
맨 뒤에 앉은 두호가 물었다.
“거울은 왜요?”
그러면서 작은 손거울 하나를 백에서 꺼내준다.
두호는 얼굴을 보는 것처럼 이리저리 거울을 돌렸는데 표정이 굳어진다.
‘계속 따라 오는군.’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면서 두호는 불쾌감을 느꼈다.
동남아 특유의 덥고 눅눅한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영리한 사냥감은 사냥꾼의 존재를 느낀다.
누군가 숨어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 차렸는데 승용차로 밴을 미행해 오고 있었다.
두호는 거울을 돌려주고 눈을 감았다.
자신들의 위치를 계속해서 확인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너무 이르다.
밴이 멈췄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는데 깜빡 잠이든 두호는 준모가 소매를 당기자 눈을 떴다.
“도착했습니다.”
두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렸는데 마흔 초반 가량의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일행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난 플랑트 체육관의 관장인 란디 아흐마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