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다음날 어김없이 두호와 뜨랑크가 마주보고 있었다.
두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치다.
더군다나 다른 낙무아이들보다도 훨씬 농익은 경험치를 가지고 있는 뜨랑크.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줄 사내이다.
어제 밤에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밤늦게 걸려 온 두호의 전화에 채호가 놀란 듯 했다.
“얼마 줬냐?”
“뭐가요?”
“뜨랑크.”
채호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웬 돈 얘깁니까? 마음에 들기는 해요?”
“고맙다.”
“형님!”
딸칵!
뭐라고 한마디 더 건네려는데 두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르다.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선수들은 전부 아마추어들이다.
나오와의 격전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 한참 아래의 실력을 가졌을 것이다.
뜨랑크는 나오의 상반된 스타일.
특히 무예타이 특유의 빠른 발을 이용한 치고 빠지는 현란한 공격은 PRIDE-K에서는 전혀 구경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어제밤 상당히 끙끙 앓아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스파링 파이트머니가 웬만한 프로대회 랭킹전보다 많다.
스파링 파트너는 내가 싸우게 될 선수와 가장 근사치에 있거나 아니면 나의 단점을 보강하기 위해 부르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해 부른 만큼 그에 상응한 댓가를 요구한다.
채수는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어제는 입식룰이었지만 오늘은 종합룰로 진행하겠습니다. 뜨랑크 선수가 종합격투기 선수가 아니니 테이크 다운이후 게임은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스파링에서는 복싱 글러브를 착용했지만 오늘은 연습용 오픈핑거 글러브를 사용한다.
“자, 각자 코너로!”
두 사람 모두 몸을 돌려 코너로 이동했다.
오픈 핑거 글러브는 일반 글러브와 다르게 가드 따위는 우습게 뚫린다.
타격으로 빈틈을 공략하기에 수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플링 자체에서도 손가락 사용이 자유로워지기에 딱히 두호에게도 불리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채수가 손을 내린다.
“자 오늘은 두분이서 직접적으로 기술 교류를 하시면서 스파링을 하겠습니다. 파이트!”
스파링은 시작되었고 때 마침 채호가 조그만 상자 한 개를 들고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탁현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간다.
“오셨습니까.”
“수고 많아요!”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민다.
상자를 받아 안을 들여다 본 탁현이 놀라는데 커피와 먹을 수제과자들이 들어 있었다.
채호는 잠시 케이지를 바라보았다.
삼십여 초 꼼짝않고 경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 탁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예!”
채호가 고개를 돌렸다.
탁현은 어제 뜨랑크쪽 코치 한 명의 전화통화를 채호에게 보고했다.
“거지들을 불렀다구요?”
채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사인을 전달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사인이라고 하면?”
“글쎄요? 아무튼 어제 밤 내내 불편했습니다.”
채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참 스파링 중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과거 PRIDE-K 대회 때 일준이 떠오른다.
해외라고 그럴 일이 없을까.
오히려 더욱 심할 것이다.
더군다나 블랙러프의 접근이 자꾸 두호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예수씨!”
채호는 품에서 수첩 한 장을 꺼내 숫자 몇 개를 적더니 종이를 쭈욱 찢었다.
“뜨랑크 코치진중에 사적으로나 포드탱선수와 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요. 이 전화번호는 뜨랑크 선수의 매니지먼트 필린 담당자 연락처입니다.”
“알겠어요.”
예수가 종이쪽지를 갖고 돌아설 때 케이지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채호는 고개를 돌렸다.
뜨랑크가 나동그라진다.
힙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뜨랑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이게 말이 되는건가.’
어제 딱 한 번이었다.
이 선수와 자신이 정식으로 붙어 본건.
오늘이 두 번째다.
그런데 두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질근!
경기 재개 의사를 밝힌 뜨랑크의 표정에 긴장이 묻어난다.
‘밤 새워 복기를 했다고 해도 그렇지’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놓고 밀고 당긴다.
거리.
그건 승패와의 거리를 의미한다.
자신의 타격거리에 상대를 끌어다 놓고 쳐야 한다.
만약 상대 거리에 말려들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어 낼 수 없다.
슉!
어제와 달리 공격의 시작은 두호였다.
기습적으로 거리를 줄이며 날리는 앞손 리드어퍼컷.
하지만 거리가 분명치 않았다.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근접전이라고도 부르기 부족한 간격.
그런데도 채수는 웃는다.
‘완전히 감을 잡았구나.’
무에타이의 단타 압박은 원거리일수록 빛이 난다.
먼 거리에서는 딥킥과 더불어 로우와 하이등 선택지가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접근전에서는 복싱 스킬의 완성도가 떨어지기에 이를 보완하고자 빰 클린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근거리에서는 뺨 클린치.
원거리에서는 길고 강한 킥.
뜨랑크에게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붙게해준 그의 승리공식을 간파한 것이다.
두호는 인 앤 아웃을 포기하는 대신 그 사이로 파고든다.
이름하여 포켓존(POCKET ZONE 근거리와 원거리 사이. 애매한 타격거리를 의미한다).
두호가 경쾌한 원투 스트레이트를 꽂는다.
거리가 애매하자 롱가드로 깊게 안면을 잠그는 뜨랑크.
그 모습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그의 하체를 노리는 두호였다.
-쾅
강력한 로우킥.
뜨랑크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상체를 붙인다.
차라리 거리를 좁혀 뺨 클린치로 맞받아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 팔을 뻗는다.
그러나 두호는 자신이 차지한 거리를 내줄 생각이 없는 듯 강하게 뜨랑크를 밀어낸다.
다시 진입한 포켓존.
파팍!
뻑!
두호의 냉정한 타격이 정확하게 터진다.
‘더 이상 끌려다니면 안된다.’
뜨랑크는 발을 단단히 땅에 박는다.
그리고 허리가 돌면서 고무줄 튕기듯 나오는 뒷손 스트레이트.
그 순간.
두호의 신형이 흔들리며 사라진다.
‘어?’
손 끝에 걸리는 감각은 정타 느낌이 아니었다.
주먹이 스치듯이 두호의 귀를 지나갔다.
“헛!”
자신도 모르게 놀란다.
갑자기 뜨랑크의 몸이 붕 떴다.
-콰앙.
두호의 그림 같은 카운터 태클이었다.
땡-
마침 경기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두호는 누워있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뜨랑크는 눈을 깜빡 거린다.
잠시 내려다보는 두호를 바라보던 뜨랑크는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다.
“두호 선수.”
두호가 몸을 돌리려다 말고 쳐다본다.
“만약 누구든 두호 선수와 싸운다면 저는 딱 1차전만 하라고 조언할 것 같습니다.”
두호는 싱긋 웃었다.
“과찬입니다.”
무슨 수를 쓴다면 단 한 번의 경기는 두호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경기엔 운이란 것도 있고 붙어보지 않으면 의외라는 것이 생기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다르다.
습관도 루틴도 아무것도 없다.
상대에 약점에 맞춰 자신이 변화하는 완벽한 싸움꾼.
‘자질이 다르다 이건가.’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스파링 훈련을 마친 두호는 에어바이크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강한 운동량이 아니라면 오히려 마무리 운동의 유산소는 몸의 긴장을 낮춰 부상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두호가 에어바이크를 타기 시작하자 채호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다.
“요새 체중은 몇 정도 되십니까?”
“90정도?”
“꽤 올라왔네요. 기간내에는 가능하겠습니다.”
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호는 에어바이크의 계기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채호는 멋쩍게 웃었다.
포커 페이스라는 말을 듣지만 두호 앞에서는 숨겨지지가 않는다.
자신의 속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낸다.
“조금 전!”
채호는 탁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만에 하나이지만 두호 스스로도 각별히 주변 정리 잘하라는 뜻이었다.
“챔피언 되는 길이 어디 꼭 실력만으로 되겠어.”
길을 가다보면 바람도 불고, 소나기도 내린다.
장애물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포드탱은 어떤 친구야?”
단순히 격투기 선수로서만 묻는 것이 아니다.
운동 외적인 면을 묻는 것이다.
“태국 내에서는 형님처럼 자수성가의 상징이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출신은.”
“태국 도박장 갱단 출신으로 알고는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좀 알아봐줘. 그가 문제를 겪고 있는 것들이나 원한관계 이런 것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알아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채호는 몸을 돌려 걸어가다 돌아섰다.
잊어먹은 말이 있는 듯 다가온다.
“이번 킹 챔피언쉽에서 윈스턴과 투자 계약 체결했습니다.”
“직접 볼 일이 생기겠네?”
“그렇죠.”
두호는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모든 경호는 9대 1이다.
아무리 뛰어난 경호원도 완벽히 지켜줄 수는 없는 것이다.
피경호자 스스로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사내 한 명이 나동그라졌다.
피로 물든 몸은 걸레조각이나 다름 없었는데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일단의 사내들이 문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검정색 선글라스를 낀 선두의 사내는 바르코프였다.
다가온 바르코프가 쭈그리고 앉아 반쯤 일어나 앉아 있는 사내를 빤히 본다.
“좋아. 아주 좋아.”
만족스럽다는 듯 웃더니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 사람들 알지?”
“모...모른다고 했잖소.”
-푸슉.
바르코프는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뽑아들더니 사내의 허벅지를 쐈다.
“으악!”
콱!
바르코프는 총구를 사내의 입속에 집어 넣었다.
“와악!”
사내는 숨이 막힌 듯 온 몸을 움찔했다.
바르코프의 검지가 방아쇠에 걸린다.
당기면 뒤통수가 터져나가면서 죽을 것이다.
끄덕끄덕!
사내는 말을 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바르코프가 입에서 권총을 빼고 사내는 구토를 했다.
웩!
피가 섞여 나온다.
총구가 쑤시면서 이빨 몇 개를 작살낸 것이다.
스윽!
바르코프는 다시 사진을 들이댄다.
“필린의 이채호 대표다.”
“이채호?”
그러면서 들개들을 바라보았다.
“옐로우 맘바의 그 이채호가 맞는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하나 남았다는 브라보 놈인가.”
이번에는 다른 사진 하나를 꺼내 보여준다.
“이 친구는 뭐야.”
사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백두호다. 김도혁이 동생.”
“김도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놀라 소리쳤다.
어떤 들개는 눈을 부릅뜬 것이 충격을 받은 듯했고, 어떤 들개는 두 눈에 불을 지폈는데 분노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들개들 얼굴에는 짧았지만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성이 다른데?”
“친동생은 아니라고 들었소. 하지만 후계인이라고 밝혀 수미 어르신이 그가 남긴 모든 재산을 넘겨주었소.”
사내를 쏘아보듯 바라보던 바르코프가 일어나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
보헴시가의 희뿌연 연기가 허공을 뻗어나간다.
바르코프는 거미줄 쳐진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김도혁’
단지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뛰는 이 심장은 뭔가.
최고가 되기 위해 수 많은 사냥꾼들이 덤벼 들었지만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성역(聖域)이 되어 버린 사내.
누구도 그 성역을 침범하지 못했고 침범해서도 안된다.
그건 용병업계 스스로가 만든 묵시적 경외였다.
뻑!
뻐버벅!
갑자기 담배를 거칠게 피워댔다.
과거 그에게 느꼈던 굴욕이 떠오른다.
그를 찾아갔다가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살기 위해 도망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김도혁이 죽었다고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