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접니다. 채호.”
“네.”
“박래진 보스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두호의 눈이 찌푸려진다.
“이유는요?”
“만나서 말씀 드리겠답니다.”
“왜 날 만나자는 거지?”
두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문자로 남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두호는 핸드폰을 넘겨 주었다.
예수는 핸드폰을 받아 주머니에 넣더니 수건으로 두호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짝짝짝!
채수가 박수를 탁 치면서 주위를 집중시켰다.
“2시간 훈련 후에 마지막 훈련인 컨디셔닝을 실시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봅시다!”
훈련장의 사람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두호의 표정만큼은 밝지 못했다.
***
조리킨은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산을 오르고 있었다.
조금씩 먼동이 터오고 있다.
밤길을 달려왔다.
선자령 아래 등산로 입구를 통과하여 작은 골짜기를 건너다 걸음을 멈춘다.
벌컥벌컥!
엎드려 흐르는 계곡물을 마시며 소리나게 트림을 했다.
시원함도 잠시뿐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가슴팍으로 넘어온 탄의 충격으로 인하여 쇄골이 부러진 듯 싶었다.
옷을 찢어 어깨를 단단히 조여 맸지만 산길이다 보니 호흡하는데 지장이 컸다.
탁!
마른 나무 하나를 발로 부러뜨려 지팡이로 삼는다.
지팡이 때문인가 오르는 발길이 한결 나아졌다.
‘사유지 외부인 출입금지’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오른쪽으로 샛길이 나 있는데 사유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조리킨은 팻말을 지나 걸었다.
이십여 미터 더 걸어가자 묵직한 차단봉이 길을 가로막는다.
차단봉을 옆으로 돌아 산길을 돌아가자 한 채의 통나무 산장이 나타났다.
통나무 산장은 아름드리 전나무들에 둘러쌓여 있는데 여명으로 어둠이 조금씩 밀려난다.
조리킨은 돌계단을 올라 산장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끼익.
육중한 현관문이 열리고 들어서던 조리킨은 얼어붙는다.
“나요. 나.”
총구가 이마에 딱 맞닿아 있다.
“자네였나.”
문 바로 옆에서 한 사내가 권총을 겨눴다.
문소리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사내들이 나타났는데 들어서는 조리킨의 상처를 보며 이마를 찡그린다.
“임무는?”
“모두 갔소. 완전 전멸이요.”
조리킨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앞에 주저 앉았다.
갑자기 거실의 공기가 가라앉고 사내들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늙은 개들이 잡기에는 뱀이 너무 컸나봅니다?”
현관을 들어설 때 이마에 권총을 겨눴던 우두머리 사내가 옆 의자에 앉았다.
“으음!”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조리킨은 이를 문다.
탁!
그때 벽난로 앞으로 놓인 탁자에 라디오를 닮은 물건 하나가 놓여졌다.
위성전파통신기.
감청이 쉽지 않은 첨단장비로 날씨와 지형 지물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는다.
툭!
투투!
우두머리 사내가 버튼 몇 개를 누르며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뭔가-
쇳소리 같은 탁한 음성이 통신기에서 흘러나왔다.
우두머리 사내는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산티나 마크. 29명 사망, 1명 생존입니다.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잠시 통신기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누가 살았지?-
우두머리 사내는 흘긋 조리킨 한 번 살핀다.
“산티나 마크 A 조리킨 캡틴 입니다.”
-조리킨은?-
“기다려 주십시오.”
우두머리 사내가 눈짓을 했다.
조리킨은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통신기 앞으로 다가 앉았다.
“캡틴 조리킨입니다.”
-당사자 입으로 듣는 것이 정확하겠지-
말해보라는 뜻이다.
조리킨은 한숨을 내쉬며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옐로우 맘바 찰리팀과 래진이 오히려 자신들을 역추적해 본부가 습격 당했다.
또한 생존자들까지 모조리 제거했다는 말에 거실의 사내들이 부드득 이를 간다.
통신기 너머는 잠잠했다.
토톡!
난로속 장작 타는 소리만이 실내를 울린다.
-찰리가 왔단 말이지. 뉴(NEW) 브라보가 아니라.
“네.”
-스노프, 한국에 있는 요원들 총 몇이나 되나.
이번엔 우두머리 사내가 대답했다.
“20여 명!”
다시 침묵이다.
숨막히는 침묵이 오 분여 흐르고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들개 몇 마리 보낼테니. 그들의 지시를 받도록-
“저희가 정리할 수.”
딸칵!
통신이 끊어졌다.
스노프의 얼굴이 우그러진다.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스노프는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상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건 위치가 위험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좌천은 민간기업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바닥에서도 좌천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더욱 놀라운 건 팀장이 하루 아침에 말단 요원으로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조리킨을 경멸의 시선으로 봤는데 자신도 도긴개긴인 꼴 아닌가.
꽈앙!
스노프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나, 조리킨을 노려보았다.
곁에 있다 괜히 자기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간 기분이다.
들개.
사람들은 개를 친숙하고 귀여운 동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개가 무리와 주인을 떠나 들판에서 생활을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블랙러프팀 중 하나의 이름이 들개다.
러시아 SVR에서 해고된 인력들로 구성된 팀.
SVR은 러시아 외부의 첩보전을 담당하는 팀으로써 한명 한명이 괴물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그들의 장점은 세계 곳곳에 자신들이 박아놓은 프락치(fraktsiya : 첩자)들로 인하여 정보력 또한 어마어마 하다.
조리킨의 이마는 펴질 줄 몰랐다.
물론 어깨의 부상이 가져온 통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한 자들까지 보내는 이유는 뭐지?’
죽이고 죽는 전투만 한다면야 지금 이들로도 충분하다.
이 상황 너머에 꾸미는 일이 무엇일까.
자신 같은 말단은 알 수가 없다.
싱가폴 셀레타 공항 활주로가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천장 높은 건물 하나가 있었다.
언뜻 공장처럼 보였는데 안에서는 묵직한 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뻑!
뻐버벅!
체육관이다.
지금 한 사내가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떨 듯이 진동하는 샌드백.
주먹의 무게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삐잉
종이 울리고 사내는 동작을 멈췄다.
“수고하셨습니다! 포드탱!”
포드탱은 글러브를 벗어 던지듯 놓고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낸다.
포드탱의 타격코치가 그의 옆에 앉는다.
“야 얼굴 좀 펴라.”
포드탱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킹(킹 챔피언쉽)도 너의 값어치가 떨어질까봐. 이런 매치 잡는 거야.”
탁탁!
어깨를 툭 친다.
포드탱의 눈썹이 꿈틀한다.
“아무리 돈도 돈이지만 프로전적 1전도 없는 놈이랑 이런 매치가 말이 되요?”
“좋게 생각해. 너가 걔 짓밟으면 아시아 팬들은 다 너를 향하는 거야.”
승자독식은 어디에서나 통한다.
특히 격투기가 강성한 유럽과 남미 그리고 미국은 이긴다고 하여 팬을 독점하는 경우는 적다.
하지만 아시아인은 세계적인 선수 한 명만 배출한다면 단기간에 인기와 돈을 독식하게 된다.
그렇기에 코치는 그것을 위안삼아 참아내라고 달래는 것이다.
“나 갑니다.”
“집에 가서 푹 쉬고! 내일보자.”
포드탱은 손을 흔들며 후드티를 뒤집어 썼다.
달빛이 곱다.
포드탱은 파도치는 바닷가를 뛰며 쉐도잉을 했다.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좌우로 스탭을 밟아보던 포드탱이 멈춰섰다.
십여 미터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자신처럼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듯 다가온다.
“뭡니까?”
뉴욕 양키즈 모자를 눌러쓴 사내를 바라보던 포드탱은 슬쩍 몸에 힘을 뺐다.
엄격한 법체계로 질서와 치안유지가 잘된 싱가폴이지만 그렇다고 범죄가 없는 건 아니다.
며칠 전에도 여행객을 죽이고 돈을 털어간 강도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더군다나 이런 늦은 시간 혼자 바닷가를 돌아다니는 사내라면 표적이 될 법하다.
“아저씨. 나 돈 없어. 다가오지마 다친다.”
사내가 히죽 웃었다.
“포드탱씨.”
자신을 알고 있음에 슬쩍 놀랐다.
더군다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을 알아본다.
‘이 시간에 로드웍을 한다는 건 체육관 식구들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포드탱은 거리를 만들며 물었다.
“당신 뭔데?”
사내는 안심하라는 듯 양손을 빼고 살짝 들어올렸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됐습니다. 그런건 매니지먼트 통해서 하세요.”
무시하고 돌아서려는 그 순간 사내가 핸드폰을 들어올린다.
“킹 챔피언쉽도 너무하지. 태국이 자랑하는 국보급 파이터한테 겨우 5억이 뭐야.”
포드탱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는다.
백두호와의 대전료다.
“바하마 계좌 있으시죠? 핸드폰으로 확인해보세요.”
“무슨 개소리야. 비켜.”
“속는셈 치고 확인해 보라니까.”
웃으며 말하지만 눈동자는 빛난다.
포드탱은 이마를 찡그리며 핸드폰으로 바하마 계좌를 확인했다.
허걱!
포드탱의 눈이 커졌다.
“200만 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해 보는데 200만 불이 입금 되어있었다.
“과거 먹고 살기 위해 갱단에서 활동하다 실력을 인정받아 무에타이 선수로 전향. 이후 황실대회까지 우승하신 분이 그 정도는 받아야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다른 부분만 잘라 듣는다면 분명한 칭찬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단단히 조사하고 온 모양이다.
포드탱의 눈이 좁혀진다.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추가로 천만불 입금 드리죠.”
천만불.
이백만 불이 없었다면 꺼지라고 한 방 날렸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말해봐요.”
사내가 모자를 벗으며 씨익 미소 짓는다.
“가난한 나라에는 배고프지만 겁 없는 친구들이 많죠?”
사내가 모자를 툭툭 털며 주머니에 넣는다.
“그 친구들 좀 씁시다.”
***
두호는 한 양꼬치 집으로 들어간다.
“껍데기만 먹던 양반이 입이 변했나.”
직원 한 명이 밝게 미소지으며 마중 나왔다.
“예약하셨나요?”
이런 곳도 예약 하느냐고 물으려다 재빨리 바꿨다.
“네. 박래진이라고 되어 있을 겁니다.”
직원은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
사내는 두호를 데리고 작은 복도를 돌아갔다.
똑똑!
미닫이 문을 두 번 두드린 직원이 문을 열고 말했다.
“들어가시죠. 좋은 시간 되십시오. 백두호 선수.”
두호는 꾸벅 마주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는 래진과 반가운 얼굴이 한 명 있었다.
영철이었다.
김도혁으로는 알지만 백두호로서는 전혀 모른다.
“인사해. 영철아. 도혁이 동생이다.”
“네?”
영철은 빤히 두호를 바라보았다.
도혁에게 동생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더군다나 그 동생이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스포츠 스타라니.
“친동생은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과거 형님 되시는 분의 직장 동료였던 부영철입니다.”
영철이 손을 내밀었다.
둘은 굳은 악수를 하며 살짝 웃었다.
커어!
두호는 냉수 한 컵을 완전히 비우고 래진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에 자신은 무조건 빠지려 했는데 왜 또 이렇게 보자는 걸까.
슥!
래진이 윗주머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건넸다.
시체들이다.
특징이라면 러시아군 위장복 상의를 입고 있는 사람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급소에 정확하게 한 방씩.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다.
“지금 우리와 총구를 맞대고 있는 놈들이야. 그리고 이들이 당신의 형을 죽인 사람이고.”
두호의 눈썹이 꿈틀한다.
그러면서 다시 사진을 살피는데 이번의 눈빛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블랙러프요?”
“현재까지는 그렇게 드러났어.”
적이 아닌 용병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쪽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즉 작전을 마치고 돌아가려다 기습을 받아 채호만 남기로 모조리 당한 것이다.
일등을 잡아먹으려는 2,3등의 반란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이유가 약하다.
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이 변치 않는 두호의 생각이었다.
“으음!”
두호의 눈빛이 가라앉고 평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