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공장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바늘만 살짝 대도 뻥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은 숨막히는 순간이다.
입을 여는 사람도,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후우!”
조리킨이 쏟아내듯 숨을 토했다.
“후우!”
달아오른 공기가 잠시 식는다.
“이라크 모술 기억합니까?”
첫 만남은 아프카니스탄 자란즈였지만 서로가 가장 치열하게 얽힌 곳은 모술이었다.
찰리 팀원들의 손이 꽉 쥐어진다.
특히 영철의 손이 꽉 쥐어진다.
모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 사내의 죽음이다.
선배이면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존경하던 김도혁이 한솥밥을 먹던 팀원들과 같이 죽었다.
“너희 짓인가.”
래진이 긴장하는 듯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소. 김도혁이 죽은 것 맞소?”
꿈틀!
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느닷없이 김도혁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묻는다.
자신들이 벌인 제거 작전이었다면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했을 테니까 모를리 없다.
그런데 김도혁이 죽었는지 묻는다.
언뜻 자신들의 범죄가 아니라는 걸 은연중 부인하는 것일까.
“당신들이 죽였지 않는가?”
“시체가 발견됐다는 얘기가 없었소.”
문득 래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았는가’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다.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사마의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추격한다.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촉나라 군사들이 깃발을 올리며 북을 쳐댔다.
놀라운 건 그들이 세운 깃발에는 ‘대한승상제갈무후(大漢丞相諸葛武侯)’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제갈량은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저건 뭔가.
그때 촉나라 병사들이 사륜거에 윤건을 쓰고 깃털부채를 든 제갈량을 태우고 나타났다.
사마의는 덫에 빠졌다고 여기며 줄행랑을 친다.
그만큼 제갈량이란 존재는 그와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김도혁 역시도 그런 위치에 있었다.
잔인할 만큼 깨끗하게 청소를 해버린다는 다소 부정적인 시선도 있지만 어쨌든 김도혁이 나타나면 상대는 반드시 죽는다.
‘원한을 맺지 말던가. 만나지 않던가’
김도혁을 피하는 방법이었다.
감도혁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 주변 인물들을 닥치는대로 공격했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김도혁이라면 자기 주변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죽었소.”
조리킨은 래진을 보았다.
선뜻 받아 들이기도,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이제 내 질문을 답해주지.”
래진이 턱을 쓰다듬는다.
“블랙러프가 왜 우리를 치는 거요?”
“우리가 옐로우 맘바를 친다.”
조리킨이 빙긋 웃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비아냥 거림도 엿보인다.
“실망스럽습니다? 시장에서 동종 업계끼리 이전투구는 당연한 것 아니오.”
“경쟁업체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다?”
“그것보다 더 분명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굵직한 메이저 용병회사들의 자산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기업처럼 주식 상장도 되어있는데 대표적인 기업이 아카데미(옛 블랙워터)다.
얼마전 포브스 발표에 의하면 아카데미의 자산가치는 10조원을 훌쩍 넘었다.
그들은 대개 국가 단위의 일을 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정부를 대신하여 벌이는 대리전쟁 사업이다.
미국 정부가 나설 수 없는 일을 그들이 도맡는 것이다.
나중 문제가 생겨도 미국은 국제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아카데미 역시 수많은 후발주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견제를 당하지만 여전히 업계 1위다.
조리킨은 비록 소수 정예로 구성되었지만 옐로우 맘바가 업계 최고 아니냐.
그래서 공격한 것이라는 뜻이다.
시장경제에서 일등은 분명한 타겟이다.
그 일등을 추월하고자 아랫것들끼리 뭉치는 것도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단순히 일등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그랬다?”
사실 그보다 더 분명한 명분은 없다.
지금도 수많은 2,3등 짜리들이 머리를 싸매고서 일등 해치우는 일에 발버둥이다.
래진은 어두운 공장을 걸었다.
꺼림칙하다.
말한 그대로를 받아 들이기에는 뭔가 불편하다.
마치 볼일을 보고 뒤를 닦지 않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뭔가.
척!
걸음을 세우고 조리킨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에이미였던가? 딸 말이오?”
“중학생이오.”
래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 아이가 벌써 그렇게 컸단 말이오?”
“블랙러프는 총 12개의 용병 연합이오.”
조리킨이 화제를 바꾼다.
래진이 딸 얘기를 꺼내자 불쾌한 모양이다.
“그중의 핵심은 포그스컬스 (FOG SKULLS.)”
포그스컬스.
안개 속 해골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용병은 정규군인 출신이거나 군 관련 인사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다르다.
소말리아 해적 출신들로 이루어진 악명높은 집단.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는 논리라면 이들이야 말로 강하다.
그들이 지나가면 풀 한 포기도 남지 않는다.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래진의 좁혀진 이마는 좀체 펴질 줄 몰랐다.
찝찝하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개운찮은 일은 없었다.
뭔가 놓치는 것이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뱉어낸 조리킨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실속에 거짓을 감춰 버리면 그건 절대 찾을 수 없죠.’
생전 김도혁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탕
방아쇠를 당겼다.
조리킨은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쿵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엎어져 죽은 조리킨을 내려다보던 래진이 돌아섰다.
“철수!”
찰리 팀원 하나가 물었다.
“생포한 놈들은?”
“우리가 언제 포로를 뒀나.”
래진은 문을 열고 나갔다.
쓰고 있던 투시경을 벗을 때 안으로부터 총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날은 소주 한 잔이 딱인데’
래진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영철아, 넌 맨 나중에 와라.”
더 이상 래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장 안은 피 냄새로 가득했다.
꿈틀!
갑자기 시체들 중 하나가 꿈틀거리더니 벽을 잡고 일어섰다.
우욱!”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총에 맞은 왼쪽 심장부위를 본다.
총알은 윗주머니에 넣어둔 지포라이터를 때리면서 어깨에 박혔다.
“살았다.”
이를 악물고 공장 문을 열고 나간다.
“난 살았다”
조리킨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복싱 8체급 석권.
아시아의 복싱 영웅.
필리핀이 낳은 최고의 복싱스타 파퀴아오는 이렇게 말했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매번 내게 싸움을 걸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
주민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찡그린다.
그 옆에 서 있는 예수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런 훈련을 시도하는 탁현도 탁현이지만 그 훈련을 거침없이 소화해내는 두호가 경이롭다.
자신들 같으면 이미 줄행랑을 쳤을텐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탁현의 훈련은 가혹했다.
하지만 두호는 군소리가 없다.
중량 조끼와 더불어 팔다리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저 무거운 무게들을 벗어던진 그의 펀치는 얼마나 빠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무거워진 몸으로 탁현과의 레슬링이었다.
훈련 룰은 두호가 탁현에게 카운터 태클을 하면 성공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킥과 펀치를 낼 수 있었다.
결국 종합룰이지만 레슬링으로 상대를 그라운드로 끌어내리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슉!
슈슈슈!
탁현의 원투가 두호의 귀를 스친다.
원래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타격이지만 지금 두호의 몸은 훨씬 더 무겁다.
정타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타격을 허용하는 횟수가 늘었다.
-어찌됐건. 기본체급은 무조건적으로 포드탱이 우월합니다. 그런 그를 잡으려면 쉬지않고 움직이는 발, 그리고 상대의 발을 묶어놓을 레슬링입니다.
두호가 이를 악물고 펀치를 던지지만 턱없이 느려진 주먹속도.
탁현이 고개를 숙여 피해낸 다음 팔로 두호의 양쪽 언더훅(겨드랑이 안쪽을 팔로 파고드는 것)을 파고든다.
완벽하게 달라붙은 클린치.
이내 탁현이 스프링처럼 몸을 뒤틀자.
붕하고 몸이 떠버리는 두호였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두호.
예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려가려 하자 채수가 이를 제지한다.
지금 두 사람이 보여주는 훈련의 집중도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흐름이다.
이 흐름에서는 평소보다 배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게 됨을 안다.
지금은 두 사람의 흐름을 놔두어야 한다.
탁현은 거친 숨을 내쉬는 두호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몸이 힘들다고 큰거 한 방을 노리려 하면 안됩니다. 신체적 우월함은 힘으로 이겨내는게 아닙니다. 기민한 머리로 이겨내야지.”
두호가 끙하는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이미 체력은 한계치다.
5분 8라운드가 넘는 스파링이 이어지며 이제는 서 있는 것이 용할 정도의 몸 상태다.
체력이 소모되면서 동작은 느려졌지만 처음 그대로인 것이 하나 있다.
두호의 이글거리는 눈빛이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두호는 지금 이긴다는 의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탁현이 희미하게 웃는다.
‘그렇지. 이게 챔피언의 눈빛이지.’
이번에는 오히려 두호가 몰아붙인다.
금방 주저앉을 것 같았는데 15kg가 넘는 중량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다.
푸!
푸푸푹!
소나기 같은 펀치를 쏟아내며 순식간에 탁현의 사각을 잡아낸다.
탁현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건 위험하겠는데.’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엔 두호가 언더 훅을 뻗으려 손을 뻗는다.
상대의 양쪽 겨드랑이를 제압하면 무게중심을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다.
그래플링 상황에서 최고의 상황인 셈이다.
탁현은 두호의 손을 걷어낸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레슬러의 커리어를 증명하는 움직이었다.
그러나 겨드랑이로 향할 줄 알았던 손이 탁현의 가슴을 밀어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탁현이 뒤로 기우뚱한다.
앞다리에 무게를 싣고 뒷손을 던지는 두호.
허리 중심이 뒤로 넘어가 있어 탁현이라도 이 펀치가 적중한다면 위험하다.
결국 탁현은 손을 X자로 교차해 얼굴을 막는다.
두호의 팔이 움직인다.
방향은 얼굴이 아니었다.
급격하게 탁현의 허벅지로 방향이 틀어진다.
이윽고 그를 밀며 살짝 몸을 튕겨 높게 쳐든다.
공중에 붕 뜬 탁현.
두호가 기합을 내지른다.
“으자자자!”
-쾅
그림같은 더블렉 태클 이후 완벽한 슬램 테이크다운이었다.
잠시 케이지 안에는 정적이 휩싸인다.
이윽고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박수소리의 주인공은 탁현이었다.
“브라보오!”
평소와 달리 큰 웃음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박수를 치는 탁현이었다.
뒤이어 체육관 안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채수가 손을 모아 소리친다.
“아시안게임 이후로 탁현 등이 땅에 붙는거 보는 게 얼마 만이냐! 두호씨 만세!”
두호는 링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탁현이 번쩍 일어나 누워있는 두호의 중량조끼를 벗겼다.
이윽고 양 손에 찬 모래주머니도 풀어준다.
학! 하학!
가슴이 터질 듯 올라왔다가 꺼지는 거친 숨이다.
“됐습니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두호가 말하자 탁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중량조끼와 모래주머니. 그리고 자신보다 윗 체급인 그래플러를 이 정도로 메칠 정도면 포드탱이 아니라 세계 정상급인겁니다.”
보기 드문 탁현의 칭찬이 쏟아졌다.
두호는 피식 웃으며 한동안 케이지에 누워있었다.
그 순간 예수가 전화를 들고 다가온다.
“힘들겠지만 잠시 전화를 받아보시죠.”
두호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 준 예수가 말한다.
“대표님입니다.”
“여보세요.”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네.”
-박래진 보스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