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피.’
채호는 사방을 쓸어 보며 차고 있던 넥타이를 벗었다.
스으으윽!
오른손에 넥타이를 감으며 경계했다.
구두발자국 소리를 가급적 줄이며 핏방울이 떨어진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했다.
따라가다 보니 겨울철 청소도구와 염화칼슘을 보관하는 창고 문 앞이다.
회색 페인트가 칠해진 철문이 굳게 잠겨 있다.
채호는 문을 한참 바라보았는데 눈썹이 여러차례 꿈틀거린다.
‘있다.’
칼이면 몰라도 총을 가졌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벽쪽으로 바짝 붙은 뒤 재빨리 문을 잡아 당겼다.
총을 가졌다면 문소리에 한 발 당겼을텐데 조용했고 대신 약간 거친 숨소리가 들려나온다.
부상을 입었다는 걸 간파하고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던 채호의 눈이 커졌다.
“아니!”
창고 안에는 한 사내가 초췌한 몰골로 웅크리고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감싸쥐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린다.
바닥은 피가 흥건했다.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채호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래진이 창백한 안색으로 웃는다.
“미안하다. 살짝 다쳤다.”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채호는 래진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읽었다.
채호는 래진의 상처에 넥타이를 감으며 재빠르게 지혈했다.
단단하게 조여 맨 그는 눈을 좁혀 주위를 살폈지만 별 위험한 상황은 없는 듯했다.
채호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119에 전화를 하려다 멈췄다.
한국에서 총기 사용으로 인한 상처는 병원에서 경찰로 신고를 하게 되어있다.
채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듯 듣고 있더니 래진을 보고 묻는다.
“혈액형이.”
“O형.”
“안녕하십니까. 이채호입니다. 환자가 있는데 혈액형은 O형입니다.”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전화를 끊은 채호는 뒤로 돌아 자세를 낮췄다.
“업혀요!”
“피 묻는데.”
“살만한가보네.”
그제서야 래진이 업혔고 채호는 재빨리 주차장을 나갔다.
래진을 들춰업고 엘리베이터를 탑승한 채호는 마지막까지 주위를 조심히 살피며 탑승했다.
이내 문이 닫히고 천천히 올라간다.
두호의 일행들은 백평산에 도착했다.
채호에게는 집으로 간다고 했지만 사실 이쪽에 용무가 있었다.
채호를 속이거나 숨기려는 건 아니었고 개인적인 일이기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 안다고 해도 섭섭해할 일은 전혀 없다,
두호는 옆에 놓인 흰색의 네모난 상자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여기 어디에요?”
어두워지면서 별빛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저 멀리 백평산 대극봉이 보였는데 예수는 여행 온 사람처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여기도 마음에 드십니까?”
준모가 묻는다.
“네. 미국에 있을 때 산을 너무 좋아해 시간만 나면 올랐거든요.”
“미국에서 젤 높은 산이 뭡니까?”
준모가 묻는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예수가 얼른 대답을 못했다.
“산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막 이런 빙벽을 오르고 그런데, 예수씨도 그런 곳 다녔어요?”
“아뇨 난 그냥 트래킹 차원의 등산, 아 생각났다. 매킨리 마운틴이죠. 6천 미터 조금 넘을거에요.”
“에게, 아니 그 큰 나라에서 고작 6천 미터 짜리가 제일 높아요? 미국 산 초라하네.”
예수는 길게 숨을 쉬었는데 가슴이 탁 트인다는 표정이다.
“여기 백평산 알아줍니다. 주말이면 나무보다 사람이 많죠.”
그때 두호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고 준모는 재빨리 쫓아갔다.
예수 또한 빠른 걸음으로 따라간다.
백평파전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짤랑.
문에 달린 종소리에 경수가 나왔다.
“어!”
두호가 들어오자 경수가 놀란다.
두호 역시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황석희를 대신할 엄연한 부사장이지만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탁자들이 정리되지 않은 걸 보면 얼마 전까지 손님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온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파전 생각이 나서 들린 겁니다.”
파전 하나 먹기 위해 여길 올 두호가 아니다.
그러나 파전을 먹겠다고 했으니 일단 세 사람을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준모는 가재눈을 하며 메뉴판을 살핀다.
“파전 뭐 드시겠습니까. 형님?”
“오늘 부추 새로 들어와서 부추전 괜찮습니다.”
경수가 옆에서 웃는다.
“난 부추전 안 좋아 하는데.”
꿈틀!
경수의 인상이 찌푸려지자 준모의 말이 신속하게 바뀐다.
“형님 부추전 어떻습니까? 벌써부터 침이 고여서 말이 헛나옵니다.”
“난 아무거나.”
“부추전 2개랑 이거, 이거. 그리고 막걸리도 주시고.”
“막걸리는 늘 드시는 걸로 드리면 되죠?”
“네. 그런데 오늘은 왜 가게를 보고 계십니까?”
부사장이라는 직함에 맞지 않는 일인 것은 사실이었다.
“아 오늘 직원들은 좀 쉬게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셔서.”
“어르신이요?”
“아뇨.”
경수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두호를 향해 웃고 지나갔다.
주방을 바라보자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태건이었다.
“제가 그랬습니다.”
태건이었다.
“어멋! 태건씨.”
예수가 알아보고 놀란다.
“여기서 일해요?”
태건은 그렇다는 듯 살짝 웃었다.
준모는 속으로 콧방귀를 끼었다.
‘나만 보면 곧 잡아먹을 듯 노려 보더니 예수씨가 묻자 웃어, 진짜 어이 없네. 확 그냥 막 그냥.’
태건이 의자 하나를 빼고 앉았다.
“요즘 바쁘죠?”
“조금!”
두호는 짧게 대답했다.
킹 챔피언십과 파이트머니와 경기룰에 관한 조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수미를 통해 들었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수미가 나타났다.
벌컹!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준모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이놈아 내 귀 아직 안 먹었어 살살 말해.”
준모가 재빨리 자리 하나를 빼주고 수미가 앉았다.
“오늘은 그냥 온 겁니다. 손님으로.”
두호가 맞은편에 앉은 수미를 보며 말했다.
수미는 가볍게 웃는다.
손님으로 찾아올 두호가 아니다.
그는 항상 목적과 용건을 갖고 움직인다.
“쭉정이 얼굴이 좋아 졌구나. 좋은 일 생겼니?”
준모가 도끼눈을 뜨며 수미를 노려보았다.
“아이 진짜. 할머니. 나 쭉정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랬죠.”
“넌 두호 옆에 찰싹 붙어있어. 떨어지면 죽을 팔자야.”
수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막걸리 잔 몇 개와 냉장고에서 막걸리 하나를 꺼내왔다.
그때 두호가 상자 하나를 꺼내 놓는다.
“이것!”
“뭐야?”
수미의 눈이 빛난다.
뭔가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 분명했는데 상자 뚜껑을 열어 확인한 수미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저번에 가져다준 것보다 더욱 많은 색깔의 실 뭉치들이었다.
수미가 아기를 만지듯 손등으로 털의 촉감을 느껴보았다.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곱게 감아넣은 뒤 뚜껑을 닫았다.
“내 자리 선반에다 올려놓게.”
태건이 일어나 상자를 들고 사라졌다.
수미의 시선이 이제야 예수를 향했다.
“자네는 누군가?”
예수가 자신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수미에게 건네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필린 소속 백두호씨 총괄 매니저 진예수라고 합니다.”
눈을 좁혀 받은 명함을 살펴보던 수미가 슬쩍 그녀를 쳐다본다.
“이런 시커먼 사람들이랑 같이 있기엔 너무 귀하구만.”
“시커멓다뇨?”
준모가 버럭 했다.
“나 양준모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요.”
예수가 깔깔 거리며 웃었다.
두호 또한 그 모습을 보며 함께 웃었다.
예수를 수미에게 인사시키기 위해 데려온 것이다.
지하실을 다녀온 태건 역시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파전과 음식이 나왔고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처음과 달리 분위기가 밝아졌다.
모든 건 준모덕이었다.
워낙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눈을 부라리며 밀고 당기는 농담이 대단했다.
“이모.”
두호의 부름에 수미가 막걸리 한 입을 비우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 할 말이 나오나 했는데 뭔가?”
두호는 살짝 웃었다.
“방위 산업체나. 아니면 군수품 관련해서 아는 데가 있습니까?”
수미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보았다.
“직접적으로는 없지만 몇 다리 타보면 있을거야. 근데 그건 왜.”
두호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얼마 전 자신이 피습을 당한 것부터 황성태와 래진까지.
“그러니까 자네 질문의 요지는 그것 아냐. 도혁이란 형의 죽음에 다른 용병 카르텔이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내 말이 맞나?”
두호는 수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수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지!”
“감사합니다.”
“산다는 것이 뭔지.”
수미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흘리며 막걸리 잔을 들어 올렸다.
사내가 일어났다.
마흔 중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구레나룻가 인상적이다.
“치료비는 이미 입금 했습니다.”
“사람 하곤.”
사내는 의료도구가 든 가방을 들고 돌아섰다.
용팔이.
돌팔이가 아니다.
의료사고로 의사면허가 박탈되었을 뿐이다.
결국 그는 방향을 틀어 병원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음지에서 살아가는 환자들을 상대로 일을 한다.
물론 의사 면허가 살았을 때보다 수입은 몇 배로 더 크다.
용병시절 알던 사람인데 래진으로 인하여 연락을 한 것이다.
탁!
용팔이가 떠나고 안방 침대로 오자 래진이 가느다랗게 웃고 있었다.
강한 사내다.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출혈량이지만 그는 약간의 휴식으로도 회복할 만큼 특출했다.
‘의지가 강하면 죽음도 피해가지.’
항상 그가 강조하던 말이다.
그래서일까 정말 살아난 것이다.
“쉬세요!”
채호는 돌아섰다.
문 앞에 있는 스위치를 내려 불을 끄려 할 때 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하지 않나?”
채호가 돌아선다.
“일단 나중에 듣겠습니다.”
우선은 몸을 먼저 생각하라는 채호의 배려다.
자신 역시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적당히 뜨거움이 식었을 때 더욱 정확하고 냉정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채호는 방을 나가며 불을 껐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채호가 이제야 자리에 눕는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그냥 눈만 감고 있다.
용병 업계는 주요 진출 지역이 있다.
이라크, 소말리아 등등 중동을 시작으로 러시아 최북단과 북유럽 끝지방.
수요가 확실하니 공급자들 역시 분쟁지역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필요가 없는 한국에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젠장!’
채호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눈을 떴다.
추리닝으로 옷을 갈아 입은 채호는 1층으로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신다.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안쪽 방으로 걸어가던 채호가 멈칫했다.
방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래진은 안 보인다.
의아한 표정으로 환기를 위해 커튼을 열어젖힌다.
없어졌던 래진의 모습이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인천의 풍경을 감상하는 래진.
“무리하는 것 아닙니까?”
래진은 피식 웃었다.
“내 인생이 무리인데 뭘.”
채호는 옆에 서지 않고 테라스 창틀에 등을 기댔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말 없이 쾌청한 하늘을 바라본다.
“아침인데 이렇게 덥냐. 핸드폰 좀 줘봐. 내껀 도망치다 떨어뜨렸다.”
채호는 주머니에 넣고 나온 핸드폰을 꺼내 주었다.
래진은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더니 번호를 눌렀다.
“YMB 2012다. 철창문 열어야겠다.”
상대로부터 아무 말이 없다.
-어느 뱀으로 풀까요?
이십여 초가 흐르고 난 뒤 반응을 보인다.
“찰리로 하자.”
찰리라는 말에 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