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사내는 경호원들 손에 쥐어진 권총을 보며 중얼 거렸는데 래진이었다.
래진의 눈이 어둠 속을 살핀다.
자신들의 부하가 알아낸 블랙러프의 한국 투자자가 거주한다는 저택에 도착했다.
수미를 제외하고 대한민국에서 그런 거액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는 점을 공략하자 쉽게 알아낸 것이다.
글록 19는 저택 주인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강하게 암시했다.
“어디 한 번 볼까.”
래진의 자신의 품에서 권총을 꺼낸 뒤 앞에 소음기를 돌려 끼운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다시 복면을 뒤집어쓰려다 멈칫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게으르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건지를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냄새나는 손수건 복면을 뒤집어 썼다.
옥상의 빗물 내려오는 우수관을 잡고 건물 외벽으로 뛰어올라간다.
양손으로 외벽에 매달려 재빠르게 창문으로 올라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유리 창문을 슬쩍 열어 몸을 집어넣었다.
커튼 뒤 창문에 숨어있는 래진.
그의 앞으로 두 사내가 지나감을 확인하고는 털썩 내려왔다.
래진은 눈을 좁혀 복도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경호 인력을 부릴 정도라면 상당히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개인투자자라고 보기에도 힘든 정도이다.
래진은 발걸음 소리를 죽여 천천히 방을 돌아보았다.
일반적인 방문과는 달리 양 옆으로 달려있는 여닫이 문이 보이자 래진이 눈을 빛낸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슬쩍 꺼내든다.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래진.
그러나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다.
책상 의자에 죽은 듯 앉아있는 한 노인.
자신이 찾던 한국의 투자자였다.
래진은 문을 닫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입에 피를 흘리고 가슴에 총상으로 보이는 상처가 보인다.
슬쩍 손을 뻗어 그의 목 부분을 만져본다.
맥은 끊어져 있었지만 몸은 아직 따듯했다.
‘죽은 지 얼마 안됐다는 이야기네.’
그 순간 총소리가 들려오며 래진이 서 있던 맞은편 책상에 총알이 박힌다.
- 탕탕.
시체 뒤 서있던 서랍장과 책장의 유리들이 모두 깨지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쨍그랑.
‘젠장.’
래진은 곧바로 낙법을 하듯 책상 위로 뛰어넘어가 등을 기대앉아 몸을 숨겼다.
자신이 들어온 입구가 다시 열리며 사내들이 등장한다.
백인부터 흑인까지 인종은 다양했지만 한국인들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야. 이렇게 거물을 직접 잡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내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는다.
그 들 역시 옐로우 맘바가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보스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래진은 침착하게 깨진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등 뒤를 비춰 사내들을 확인한다.
총 8명.
하지만 이제 곧 바깥 경호원들도 모두 쫓아올 것이다.
“노란 뱀의 시대는 이제 끝났어. 구시대 인물은 이만 사라지라고.”
사내가 래진이 들고 있는 유리 조각을 총으로 쏜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래진의 유리조각이 깨져버렸다.
래진이 손을 집어넣는 그 순간.
한 사내가 미끄러지듯 래진이 몸을 숨긴 책상 옆에서 뛰쳐나온다.
래진을 향해 총구를 겨눠보지만 래진의 손이 훨씬 빨랐다.
망설임 없이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래진.
-푸슉푸슉.
가슴에 총알 두 발이 꽂히자 맥없이 쓰러지는 사내.
그런 모습을 보며 맨 앞의 있던 흑인의 사내가 슬쩍 미소 짓는다.
‘반응속도는 엄청 나구만.’
래진 역시 가만 있지 않았다.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총을 격발했다.
사내들은 황급히 좌우로 몸을 던지며 래진의 총알을 피했고 순식간에 방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래진은 곧바로 죽은 사내의 몸을 방패막이 삼아 뛰쳐나갔다.
그를 놓칠 수 없던 사내들도 그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무조건 죽여!”
날라오는 총알을 시체로 막아내며 달리던 래진의 눈이 빛난다.
빨간색 소화기.
몸을 던지듯 소화기 앞으로 굴러간 래진이 소화기를 뽑아들고 사내들에게 던졌다.
-탕
그 순간 래진의 어깨의 총알이 한 방 날아와 박힌다.
“윽!”
어깨를 관통하는듯한 고통을 참아내고 래진이 사내들을 향해 날아가는 소화기를 권총으로 맞춘다.
- 푸슉!
곧 소화기 내부에 분말들이 뿌옇게 방안으로 퍼진다.
잠시 찾아온 정적.
한 사내가 고개를 일으켜 래진이 서 있던 방향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순간 어두운 신형이 나타나자 사내는 놀라 소리를 지를뻔 했다.
래진은 곧바로 사내의 입을 틀어막으며 복부와 턱에 총을 쐈다.
-푸슉푸슉
소음기를 단 총이긴 하지만 모두에게 들릴 만한 소리였다.
총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다시 사내들이 총을 갈기자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소음기 소리가 들려왔다.
-푸슉.
그러더니 이번에는 천장의 등이 펑 하고 터지며 방 안의 불이 깜빡거린다.
더욱 래진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소음기 소리가 들려왔고 집기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곧 문을 열고 경호원들이 들이 닥친다.
“뭐야!”
그 순간.
다시 한번 쨍그랑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바람으로 인하여 뿌옇던 방 내부가 제법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깨진 것을 확인한 흑인 사내가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친다.
래진이 이 아수라장을 빠져나간 것이다.
“제...제길...”
곧 거친 목소리로 크게 외친다.
“무조건 잡는다! 싹 다 뛰쳐나가!”
“네!”
사내들이 래진을 쫓아 밖으로 서둘러 뛰어나가자 흑인의 사내가 방 안을 돌아본다.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그리고 깔끔한 타격으로 제압된 듯 총상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여전히 날카롭다 이거지.’
흑인은 권총을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꼭 죽여야 된다. 거의 다 왔는데 이런데서 발목을 잡힐 수는 없지.’
***
회의장에는 두호와 채호가 마주 앉아있었다.
채호가 두호를 위한 개인적인 비즈니스를 소개하고 있었다.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채호가 서류를 탁하고 덮는다.
그러나 두호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이지 않았다.
어떤 고민이 있는 듯 표정이 굳어있었다.
채호가 싱긋 웃으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무슨 고민 있습니까?”
“고민 보다는 추측.”
“예?”
얼마 전 이모에게 다녀오고 나서 자신이 투자자 목록에서 윈스턴을 발견했다는 얘기를 채호에게 해주었다.
그러자 채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다.
자신 역시 어떻게 잊겠는가.
공식적으로 그날의 생존자는 자신밖에 없다.
“옐로우 맘바랑 엮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블랙러프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채호는 두호의 말뜻을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 한번 엮였으면 좋겠다 이런거죠?”
“그래. 해줄 수 있겠어?”
“이번 경기에 투자자로 한번 감아보겠습니다.”
채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게?”
“네. 킹 챔피언쉽이랑 매듭지어야 하는 일도 있고 해서요. 그럼 알아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줘.”
채호는 곧장 회의실로 빠져나갔고 두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자신보다 더욱 분노하는 것은 채호일 것이다.
그 모든 비극에서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 아니라 저주일 테니까.
두호가 회의실을 빠져나오자 반가운 얼굴이 한 명 보였다.
구열이었다.
대회 중 다친 다리는 이제 완전히 나았는지 깁스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발견한 구열 역시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두호씨!”
“오랜만이네요. 구열씨.”
“잘 지내셨습니까?”
대회 중 구열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무언가에 쫓기는 듯 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표정은 완벽히 밝은 표정이었다.
그 역시 대회를 통하여 성장한 것이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이번에 두호씨 메인 경기 앞 매치로 경기가 잡혔습니다.”
일반적인 단체에 경기는 메인 경기 4~5경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브게임이다.
그러나 메인 경기에 포함될 정도면 구열이라는 선수 역시 킹 챔피언쉽에서 눈여겨 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좋은 소식에 두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구열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돌아본다.
“하지만 제가 아직 코치가 없어서 필린의 도움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코칭 스태프를 맡아준다고 했습니다.”
구열 역시 PRDIE-K에서 관객들에게 강렬한 모습을 심어준 사람이다.
필린의 입장에서도 타 단체가 탐내는 선수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탁현이 큰 목소리로 구열을 부른다.
“구열씨! 곧 훈련 시작하겠습니다.”
“네!”
구열은 두호에게 고개를 숙이며 활기차게 대답했다.
미소를 찾은 그의 얼굴을 보며 두호 역시 좋은 기운을 받는 듯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같이 또 운동할 기회가 있음 좋겠네요.”
“네. 몸 조심하시고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구열은 몸을 돌려 곧바로 탁현에게로 걸어갔고 두호 역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두호의 옆에 바짝 예수가 붙어섰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두호를 올려다보자 두호는 말없이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체육관을 나서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미리 말이 되어있던건지 준모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시죠. 형님!”
두호가 차 뒷문을 열고 타려는 직전 멈춰섰다.
“예수씨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예수가 잠시 멍해졌다.
이내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어디든.”
준모를 바라보며 예수가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듯 손짓한다.
“잠시만요! 가방 좀 챙겨올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예수를 기다렸고 얼마 되지 않아 예수가 다시 나와 차에 탑승했다.
예수가 안전벨트를 메며 두호에게 물었다.
“어디 가시는건데요?”
“여유가 있을 때. 약속 좀 지키려구요.”
예수나 준모 둘 다 두호를 바라보았다.
“약속이요?”
두호는 미소를 지으며 풍경 감상을 위해 창문을 열었다.
준모가 룸미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차는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일단은 백평산으로 모실까요?”
“그러자.”
조수석에 탄 예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두호를 돌아보았다.
“백평산이요?”
예수는 백평산과 수미의 대한 존재를 전혀 모른다.
그 사실을 깨달은 두호가 싱긋 미소 짓는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아직 못 먹었어요.”
“그럼 저녁이나 드실겸 같이가요. 아주 맛있습니다.”
“아. 네네.”
단순히 저녁이나 먹는 걸로 깨달은 예수는 이내 순응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차는 백평산으로 향했다.
채호는 차에서 내렸다.
괜히 술이 한 잔 땡겼는데 두호가 거절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곧장 온 것이다.
누군가는 혼자 마시는 술이야 말로 시름을 풀어내는데 최고라고 했지만 자신은 아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마시는 술은 인생을 밝혀준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아쉽네.”
혀로 입술을 몇 번 닦으며 주차장을 걸어나가던 채호가 걸음을 세웠다.
알 수 없는 싸늘한 공기.
처음 두호에게 미행을 당했을 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채호는 이마를 찡그리며 주차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으스름하지만 충분히 살필 수 있는 밝기였다.
“뭐지.”
찝찝한데 보이는 건 없다.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고개를 돌리려던 채호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었다.
주차장 바닥에 뭔가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차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인 줄 알았는데 색깔이 조금 다르다.
채호는 좀 더 허리를 숙이고 내려다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