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예.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흘긋 멀리 걸어가는 래진을 바라보았다.
‘래진 형님 잘 가, 그런데 말이야 그런 인사는 우리끼리 있을때나 통하지 주위에 다른 사람들 많은데 당연히 몽둥이 들고 경찰에 신고하지.’
두호인들 왜 모를까.
래진은 지금 자신에게서 도혁의 냄새를 분명하게 맡으면서 순간적으로 흥분했다.
그래서 공격(인사)을 한 것이다.
두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큰 흔적을 남기고 간다.
뭔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옛날 같았다면 내가 알아볼게 하면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겠지만 이제 그 바닥의 김도혁은 죽었다.
자신은 백두호.
대한민국 PRIDE-K 챔피언이다.
자신은 양지에 남아있어야 한다.
래진은 허름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마을버스다 보니 운행시간에 딱딱 맞춰 올 리가 없다.
오면 좋고 안 오면 기다린다.
딸칵!
래진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도혁이한테 동생이 있었다니.”
사람과 사람사이에 깊은 유대는 그 본질을 알아보는 힘이 있다.
하루 이틀을 가르친 것이 아닌 듯 깊게 새겨진 그 움직임.
도혁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엘로우 맘바를 맡기려 했다.
-날 찾아오신 내님 어서오세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철 지난 유행가가 래진의 주머니에서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 바라보던 래진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음, 나왔어?”
잠시 말이 없다.
점점 전화를 받는 래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무래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 듯하다.
“결국은 직접 쑤셔야 한다 이거지.”
그때 멀리서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래진의 의자에 올려놓았던 자신의 낡은 가방을 집어들고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내가 하지. 니들도 조심해라. 겁이 없는 놈들이다.”
전화를 끊은 그의 앞에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기사가 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래진을 반겼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 몇몇 시간대를 제외하고는 손님 한 명 못 태울 때가 많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손님을 태우니 기분이 좋은 것이다.
“반갑습니다.”
래진 역시 활짝 웃으며 기사에게 인사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천 원짜리 두 장을 요금대에 넣은 래진은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기사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래진에게 물었다.
“등산 가시다 오시나봐요!”
“네. 월계봉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월계봉 좋죠. 경치 보면 고민도 확 풀리고 그냥 가슴이 쏴아아아 맞죠?”
래진은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하죠.”
버스는 천천히 출발하였고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멀리 사라졌다.
오로지 훈련이다.
훈련을 열심히 하는 건 기술 습득을 위한 것도 있지만 부상을 덜 당하기 위해서다.
훈련으로 잘 만들어지는 몸은 외부의 충격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학학!
몸 상태가 많이 올라왔는지 훈련 강도는 더욱 세졌다.
탁현과의 그래플링 스파링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호가 탁현의 목을 노리고 길로틴 초크를 감았다.
탁현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젖혀 올리며 오히려 두호를 들었다.
옆에 서 있던 김태훈이 크게 소리쳤다.
“두호씨 길로틴은 상대의 허리를 완벽하게 제압해야 쉽습니다.”
PRIDE-K 주짓수 코치로 활동했던 그는 이제 두호의 개인 주짓수 코치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탁현이 거칠게 땅으로 내려 꽂는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 두호의 손은 탁현의 다리로 옮겨간다.
쉽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호는 이를 악물어가며 포지션을 유지했다.
그 모습에 탁현은 만족스러운지 슬며시 미소 짓는다.
‘일취월장이 이런거구나.’
어느덧 그래플링 자체만으로도 제법 탁현과 공방이 되는 두호였다.
삐잉!
라운드가 끝나는 종이 울리고 두 사람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진다.
10라운드가 넘는 거친 공방에 두 사람 모두 지친 것이다.
예수가 다가와 물과 수건을 건네주었고 김태훈 역시 다가온다.
“포지션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기술의 완성도는 더욱 신경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벌컥벌컥!
예수의 손에 들린 수건을 받아 얼굴의 땀을 닦았다.
몸 상태 역시 많이 호전되었고 자신도 느낄만큼 실력적 상승도 있었다.
이대로만 차분히 준비한다면 앞으로 있을 여러 매치들을 무리없이 소화할 것 같았다.
삐이익!
훈련장의 문이 열리며 채호와 직원 여럿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간단하게 요기를 할 수 있는 도너츠와 커피가 들려있었다.
“훈련은 아직 남았나요?”
탁현이 자신의 바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닙니다. 딱 맞춰오셨습니다.”
오늘 채호의 중대발표가 있다고 하여 훈련장에 모두 모인 것이다.
채호는 박수를 치며 모두를 집중시켰다.
“자자! 모두 정비하시고 회의실로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장비들을 제자리에 놓고 간단한 청소를 한 뒤 회의실로 향했다.
그때 두호가 채호에게 슬쩍 다가온다.
흘끗!
채호가 뭐냐는 듯 바라보다 두호의 시선이 던지는 의미를 간파한 듯 옆으로 좀 더 붙는다.
자신이 알아보라는 것에 대해 소득이 있나는 질문을 한 것이다.
“네. 회의 끝나고 따로 말씀하시죠.”
채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샤워실로 사라진다.
필린의 주요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가 각자 앞에 놓인 서류를 살피고 있을 때 머리에 수건을 얹은 두호가 들어왔다.
두호는 안쪽 빈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파팍!
큰 화면의 PPT가 틀어졌다.
“오늘 킹 챔피언십에서 매치를 수락한다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직원들과 코치진은 모두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의 강자들과 경쟁할 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채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러나 매칭 조건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특이할 게 뭡니까?”
킹 챔피언쉽에 자문위원으로도 있었던 탁현이다.
그가 모를만한 상황이 없는데 매칭조건이 까다로워졌다는 말에 의아한 것이다.
“계약 체중 87KG에 수분 테스트까지 하자는군요.”
순간 코치들 눈썹이 찌푸려졌다.
무슨 의도인지 모두가 간파한 듯 했다.
현재 두호의 몸무게는 83.
계약체중이 87KG 라고 한다면 최소 평체가 93까지는 가야한다.
하루의 회복기간 동안 몸무게는 다시 불릴 수 있기에 신체조건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더욱 높은 체중을 만든 다음 감량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분 테스트.
킹 챔피언십은 단순히 감량한 몸무게 뿐만아니라 몸속 수분량까지 확인한다.
잔인한 감량으로 선수 생명의 치명타가 오는 경우가 많아지자 선수 보호 차원에서 만든 규정이기도 하다.
격투기에서 체중은 살이 아닌 근육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수분량까지 채워가면서 만들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이벤트성이 강한 이런 경기에 이런 깐깐한 룰을 적용한다는 것은 매치는 잡아주지만 두호에게 순순히 져줄 생각이 없다는 의지 표명인 셈이다.
“순순히 잡아주지는 않겠다는 뜻이군요.”
채호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대로 경기를 물릴 수는 없다.
“5분 5라운드로 진행될 겁니다.”
탁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가지가지 하는구만.”
누가 뭐라고 해도 두호가 불리한 조건이다.
단기간에 체급을 맞추는 것도 불리한 일이지만 그 몸무게의 적응하는 시간 역시 필요하다.
새로 만든 몸의 적응기간 없이 5분 5라운드는 평소보다 배 이상의 체력을 요구한다.
“두호씨. 괜찮겠습니까.”
채호의 질문에 두호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탓할 수는 없다.
스포츠에서도 기득권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이 그런 경우다.
이쪽에서는 어서 빨리 커리어를 쌓고 싶고 그러다보면 상대의 무리한 요구도 감수해야 한다.
“지금부터 전력 분석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채수가 가까이 다가갔다.
화면에 동남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왔다.
“두호씨와 붙게 될 킹 챔피언쉽에 현 미들급 챔피언 마우뜨 포드탱 입니다.”
채수가 선수를 소개하자 이내 화면은 그의 경기 영상으로 바뀌었다.
중량급에서 보기 힘든 속도를 보여준다.
스피드, 예상하지 못한 각도에서 뻗어 나온 주먹, 간헐적으로 장작 쪼개듯 내려치는 발길질은 섬뜩할 정도다.
“P4P 현 시점에서 가장 강한 낙무아이(무에타이 선수를 지칭하는 말)라고 손꼽히는 선수입니다.”
P4P (파운드 포 파운드).
모든 체급의 선수들이 하나의 체급이라고 가정하여 평가하는 것.
몸무게나 키 따위에 신체적인 조건을 제외하고 기술적으로 가장 완벽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포드탱은 태국 왕실에서 주관하는 무에타이 대회의 우승자 출신이다.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끝없이 전진 압박하는 것이 특징이며 중 단거리에서 파괴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스타일입니다.”
두호는 포드탱의 경기 화면에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과연 채수가 말한 대로 중단거리에서 화력은 자신 역시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저런 선수니까 수분체크까지 하자는 거겠지.”
채호가 눈을 좁히며 짜증투의 말로 말했다.
중단거리에 화력전은 펀치력 만큼이나 몸의 내구도 역시 중요하다.
포드탱에 맞춰 룰을 유리하게 바꾼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어쨌든 우리 게임 플랜은 하나입니다. 저런 선수와 5라운드 내내 화력전을 하는 것은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신체 부담이 큽니다.”
앞으로의 남은 무대들은 철저한 계획으로 움직여야 한다.
게임도 좋고 쇼도 좋다.
하지만 두호라는 상품에 큰 기스가 나길 원치 않는 채수였다.
탁현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찐득하게 가자 이거지?”
채수 역시 씨익 미소를 짓는다.
“빙고, 제 풀에 지치게.”
***
한 복면 사내가 훌쩍 담장을 넘는다.
정원을 돌아다니는 경호원들의 눈을 피해 바싹 몸을 낮춰 움직이는데 먹이에 접근하는 표범 같다.
경호원 둘이 그 사내의 옆을 지나간다.
둘 중 한 명이 핸드폰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박박 긁는다.
“아이씨. 또 꼴았네.”
“병신아. 월급 다 축구에 걸 거야?”
“진짜 봐라. 내가 나중에 한탕 무조건 친다. 인천 FC 애들이 계속 배신하네.”
스포츠 토토가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그때 걸어가던 경호원 한 명이 눈을 좁히며 코 앞에 있는 물건을 발견한다.
가방이었다.
경호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숨어있던 복면의 사내가 벼락같이 달려든다.
순식간에 달려든 그가 가방을 주우러 고개를 숙인 경호원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탁.
신음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쓰러져버린 그.
토토로 돈을 잃은 경호원이 당황하여 재빨리 권총을 빼들었다.
“너 뭐야...!”
복면 사내는 권총을 빼드는 손을 부드럽게 누른 다음 얼굴에 펀치를 꽂는다.
뻑!
그리고는 물 흐르듯이 사내의 뒤로 돌아가 초크를 건다.
얼굴이 붉어진 그가 발버둥을 쳐보지만 이내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털썩 쓰러진다.
건장한 체구의 경호원 둘이 늘어져 있다.
복면의 사내는 두 사람을 끌고 가 보이지 않는 곳에 눕혀놓고서 복면을 벗었다.
“어휴. 냄새.”
미리 준비하지 못해 손수건으로 가렸는데 땀 냄새에 골이 쑤신다.
‘그나저나 총이 귀한 한국에서 버젓이, 그것도 글록 19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