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9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박래진 보스. 채호입니다.”
-어이. 채호 무슨 일이야.
“오늘 시간 어떠십니까?”
-난 무조건 좋지.
채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호를 바라보았다.
약속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래진 역시 승낙의 의사를 비쳤고 곧 전화는 끊어졌다.
두호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만나겠대?”
“저녁에요”
두호는 약간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이번 PRIDE-K가 어디까지 알려졌을까?”
채호는 두호를 가만 보았다.
갑자기 그건 왜 묻냐는 시선이다.
“글쎄요. 싱가폴을 포함한 아시아는 당연하고,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 유럽도 크게 소개된 걸로 알고 있죠. 왜요?”
“그냥! 참 하루 정도 화천에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지?”
가방을 챙겨 돌아서던 채호가 고개를 돌렸다.
“화천이요?”
채호는 과거 두호가 화천에 있었다는 걸 기억한 듯 웃는다.
“네. 무슨 일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혼자 가십니까?”
“준모랑 가야지.”
채호는 알겠다는 듯 손을 흔들고 곧바로 체육관을 빠져 나갔다.
두호 역시 침대에서 털썩 내려와 탈의실로 향했다.
“벌써 가세요?”
예수가 묻는다.
아직 재활을 위한 회의도 여러 개 남아있고 다른 일정 역시 조율해야 한다.
“내일 어디를 가야해서요.”
예수가 눈을 빛낸다.
“어디 가시는데요? 매니저가 모르는 일정이 있으시면 안됩니다. 난 이제 두호씨의 총괄매니저임을 기억하셔야 해요.”
“화천에 가려고 합니다. 준모도 데리고.”
“나도 가요.”
두호가 멈칫했다.
“두호씨는 이제 일반인이 아니에요. 일거수일투족을 관리받아야 하는 엄연한 필린의 선수입니다.”
예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같이 이동하시죠.”
두호는 마지못한 듯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호는 탈의실 문을 닫고 사라졌다.
* * *
너무 크게 벌어졌다.
과연 인간의 입이 얼마만큼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승용차.
그리고 아름다운 키.
준모는 자신의 손에 쥔 키와 두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형님...이게 정말?”
“얼른 가서 봐봐. 나한테 필요 없는거다.”
준모는 체육관 주차장을 향해 빛의 속도로 뛰어갔다.
그리고 자동차 키의 열림 버튼을 누르는 순간.
번쩍하며 차의 불이 들어왔다.
준모는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뺨을 쎄게 후려쳤다.
-따악
아프다.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말이다.
‘이게 진짜. 내 차라고?’
풀 옵션이면 2억을 넘어간다는 대한민국 프리미엄 세단의 자존심.
T-90.
이번 PRIDE-K 의 부상으로 걸린 자동차이기도 했다.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바닥의 조명으로 한대모터스의 로고가 그려진다.
두호가 씨익 미소지으며 놀란 준모에게 다가왔다.
“마음에 들어?”
“혀...형님, 충성...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부복할 듯 축축해진 눈가였다.
“시범 운행할 겸. 집에나 가자.”
“형님. 그 어떤 지옥이라도 옆에서 함께 걷겠습니다.”
준모가 빠르게 달려가 뒷문을 벌컥 열며 두호를 바라보았다.
“타십시오. 회장님.”
두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준모가 열어준 차의 뒷문으로 탑승했다.
이번만큼은 준모의 기분을 맞춰주기로 한 것이다.
준모는 두호가 탑승하자 얼른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핸들을 쓸어만지며 차량 내부를 확인했다.
“와아!”
“끄아!”
입은 헤벌레해져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룸미러를 다시 두호를 향해 재조정한 준모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형님 출발하겠습니다!”
차는 미끄러지듯 체육관을 출발했다.
두호는 창문을 내렸다.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 * *
채호는 자리에 앉아 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돼지 껍데기 집이다.
주위는 온통 퇴근길 아저씨들로 북적거렸고 소주잔이 채워지면서 목소리들이 커진다.
‘얘나 지금이나. 입맛은 완전 아저씨라니까.’
통화가 끝나고 래진으로부터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돼지 껍데기 먹으면 안될까.’
그렇게 메뉴는 쉽게 정해졌다.
-짤랑
문이 열리더니 한패거리의 직장인들이 들어섰고 그 뒤를 벙거지 모자를 쓴 래진이 따라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채호를 발견한 래진이 손을 들었다.
“이대표!”
“반갑습니다. 보스”
껄렁거리는 걸음걸이로 채호에게 다가오는 래진은 인상을 찌푸린다.
“야. 무슨 보스야. 그냥 선배라고 불러. 퇴사도 한 놈이 무슨.”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자리에 앉은 래진이 손을 번쩍든다.
“이모 여기 껍데기 3인분이랑 찌개 하나요. 아 그리고 소주도 한 병!”
쟁반을 들고 이동하던 직원이 밝은 목소리로 묻는다.
“소주는 뭘로 드릴까요?”
“빨간걸로!”
채호는 래진의 자리에 수저를 놓는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못 지낸다. 니들 있을 때는 하는 일마다 잘됐는데 너희들 떠나고 완전 개죽이다.”
래진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채호는 알고 있다.
용병업계에서 옐로우 맘바가 가지는 무게감은 아직도 상당하다.
“사업 무한 번창인가봐. 신문에서 이 대표 얼굴봤는데?”
“열심히 합니다.”
휴지 한 장을 뽑아 코를 팽하고 푼 그가 고개를 젓는다.
“확 망해버렸으면, 다시 복귀했을텐데 아쉽다.”
“장난으로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제 총 못 잡습니다.”
“그럼, 당연히 그만 잡아야지.”
박래진.
도혁보다 한 세대 위에 인물로 그는 용병업계와 군인들 사이에서 전설이라고 불리운다.
최고의 히트맨이자 맡은 임무는 어떻게든 수행해내는 군인.
그가 옐로우 맘바의 보스로 임명된 이후 언제나 우상향 곡선을 그린다.
주문했던 음식과 술이 나왔다.
불판에 고기를 몇 장 올려놓은 채호가 이내 소주병을 집어들고 래진의 잔에 따른다.
“다시 만나게 되어서 참 좋습니다.”
“핫핫, 넘치게 따라!”
잔을 조금 남기자 완전히 채우라고 재촉했다.
-쨍
잔을 부딪힌 두 사람은 시원하게 술을 비웠다.
“한국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잘 오시지도 않잖습니까.”
“아. 긴밀한 클라이언트가 도움 좀 달라해서.”
채호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옐로우 맘바의 보스쯤 되는 사람이 클라이언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직접 움직인다.
특히 행색이 감을 잡지 못하게 한다.
복장을 보면 작전의 성격, 임무의 특징을 대략 유추할 수 있는데 거렁뱅이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의상이다.
보스는 집을 지키고 직원들은 돈을 벌어온다는 용병업계의 진리에 비춰 직접 한국에 온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해가 안갈거야.”
“사실 그렇습니다.”
빈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더니 단번에 비운다.
“도혁이가 죽은 것도 이상하고.”
래진의 중얼거림에 채호의 눈이 빛난다.
다시 소주병을 쥐고 따르려 하자 채호가 뺏어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알겠지만 기업쪽의 일은 고액의 의뢰비를 제시하지 않으면 받지 않거든, 개발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나 지역주민들과 싸우는 일이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자칫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을 위험이 있지. 그런데 그때는 워낙 고액의 액수가 들어왔어. 그래서 너희 팀을 투입 한건데...”
가장 편한 임무가 국가간의 전쟁에 투입되는 일이다.
돈은 돈대로 받으면서 일은 제일 수월하다.
두 번째가 개인, 즉 부호들 경호 업무이고 마지막이 기업일이다.
옐로우 맘바의 고객은 대체로 돈이 많은 개인.
명성과 권력을 숨겨가며 일 처리를 원하는 속된 말로 뒤가 구린 사람들.
하지만 그때 워낙 액수가 커서 시그니쳐팀인 브라보를 배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채호를 제외한 전원 사망.
옐로우 맘바를 지탱하는 큰 기둥 하나가 무너진 것이다.
“그날 사고 이후로 용병업계의 판도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어. 우리를 제외한 다른 용병 업체들끼리 연합을 하며 우리를 견제하는데 장난이 아냐.”
업계의 1위는 언제나 모두에게 견제받는다.
그런데 용병이 받는 견제란 무엇일까.
“우리가 하는 일들이 대체로 위험하지만 지금은 살얼음 판이야.”
“직접적으로 노리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그정도면 내가 한국까지 왔겠어? 십여 곳의 업체가 카르텔을 형성했는데 이름이 블랙러프야. 주축은 아프리카와 러시아 애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채호는 이마를 찡그렸다.
바닥에서 은퇴한지 오래 됐지만 옐로우 맘바의 처지가 무척 다급하다는 것에 놀랍다.
“그럼 한국에 온 이유는?”
래진이 술 한잔을 싹 비웠다.
“한국에서 블랙러프에 투자를 한 놈이 있더라고. 그놈 좀 찾아서 뒤를 캐보게.”
“직접 하시는 겁니까. 위험하게.”
래진은 이제 일반적인 용병이 아니다.
단체를 이끄는 대장의 자리.
그런 그가 직접 움직이기에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오죽하면 정점의 인물이 직접 나섰을까.
“믿을만한 애들도 없고.”
래진이 술을 권했다.
“은퇴한 놈이랑 뭔 이런 얘길 하는지 나도 참. 얼른 받아.”
채호는 래진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정말 반갑다. 반가운데 찝찝한 이 기분은 뭐지.”
래진이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채호는 잔을 비우는 래진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져 있음을 보았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도와줄 일은 없다.
이제 전장의 용병이 아닌 스포츠 시장을 누비는 메이저 에이전시다.
* * *
화천 보육원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예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공기가 정말 좋아요! 서울을 벗어나니까 이렇게 좋네요.”
두호는 가볍게 웃으며 트렁크 짐을 챙겼다.
준모는 시동을 끄자마자 곧바로 차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소매로 차 보닛을 닦기 시작했다.
“미안해. 초롱아. 너한테 이런 험한 길을 달리게 하면 안됐는데.”
초롱이는 준모가 선물 받은 차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예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여간. 그렇게 아낄 거면 다른 차 타고 오지 그랬어요.”
준모는 손가락을 까딱 흔들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했다.
“예수씨. 질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예수씨요?”
예수가 준모의 호칭을 문제 삼자 준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솔직히. 같은 매니저인데 뭐 어때요.”
예수가 선글라스를 벗었는데 눈이 접시만 해졌다.
준모도 지지않고 노려본다.
“흥.”
예수가 콧웃음을 치자 준모도 지지 않았다.
“어이없어.”
예수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두호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보육원에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터 공간이 새로 정비되어있었고 화단에 더욱 많은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건물 외벽과 곳곳에 새로 페인트를 칠하여 무척 깔끔했다.
그리고 또 하나 변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허름한 반팔 모시옷에 반바지를 입은 황성태가 플라스틱 빗자루로 입구를 쓸고 있었다.
멈칫!
걸어오는 두호를 발견한 황성태가 놀라는 표정을 하며 비질을 멈췄다.
두호는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가방을 내려놓고 계단을 올라간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허리숙여 인사를 하는 두호를 향해 황성태가 환하게 웃었다.
“고생했네. 큰 고생했어.”
준모가 인사를 했다.
“원장님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오호! 자네도 왔군.”
그러면서 예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어서오십시오. 못 보던 분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백두호씨 매니저 진예수입니다.”
황성태는 반가운 표정으로 일행을 맞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