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벽에 등을 기댄 사내는 신음을 쏟아냈다.
“으으으!”
두호는 사내가 떨어트린 권총을 집어들었다.
탁!
타타탁!
순식간에 권총을 분해하여 땅 바닥에 쏟아버린다.
“고개만 돌리면 총알은 빗나간다. 그래서 목을 조준해야 하는 거지.”
슥!
그 상황에서도 사내는 칼을 꺼내 들었다.
숨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공격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두호가 눈을 좁히며 상대의 칼을 확인한다.
‘비티아즈.’
명동에서 박래진을 덮쳤던 사내가 들고 있던 칼과 똑같았다.
사내는 한 손을 앞세운 자세를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두호를 노린다.
쉬이익!
사내가 엄청난 속도로 두호를 향해 쇄도했다.
두호 역시 그를 향해 마주 다가갔다.
두호는 찔러 들어오는 칼을 고개를 숙여 피해내며 상대의 앞 손과 허벅지를 잡아 번쩍 든다.
그리고는 바로 옆 가로등 기둥에 사내를 던졌다.
“커억.”
두호는 사내의 목을 손아귀로 친 다음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려 꽂는다.
-콰앙
케이지에서의 스포츠적인 움직임이 아닌, 완전한 살상기술과 그에 걸맞는 파괴력이다.
두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냐?”
사내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더니 히죽 웃었다.
말을 못하겠으니 차라리 죽이라는 행동이다.
두호는 말없이 사내를 내려다보다 뒷목을 때렸다.
사내는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두호는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박래진이 한국을 들어오고 길목에 숨어 권총을 겨눈 이 상황은 무슨 징조인가.
챔피언이 되었고 이제 좀 더 실력을 닦고 채워 아시아, 더 나아가 미국 시장 진출을 꿈꾸리라 마음 먹었는데 예전 김도혁 시절의 사내들이 들쑤신다.
두호는 이마를 잔뜩 찡그리며 돌아섰다.
부디 별일 없고,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길을 걸어갔다.
* * *
채호는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권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밝게 웃으며 커피잔을 들어 올린다.
사내는 제이슨리.
킹 챔피언쉽의 아시안 지부 총 책임자이자 단체 내 서열 4위의 인물이었다.
제이슨리는 커피잔을 내렸다.
“이번 PRDIE-K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겠습니다.”
“이제야 킹 챔피언쉽 발끝이라도 따라간 것 같아 기쁩니다.”
“대표님도 참!”
PRIDE-K는 한국 스포츠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투기종목 최초 10만 명의 관중을 달성했고 관련 기념품과 광고까지.
필린은 더 이상 한국이 격투기 불모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버렸다.
제이슨리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채호를 바라보았다.
두호라는 인재가 등장한 것 역시 대단하지만 어디 실력으로만 성공하겠는가.
그에 걸맞는 마케팅과 홍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보기엔 이번 PRIDE-K는 우승한 두호만큼이나 눈 앞에 있는 이채호의 비즈니스가 돋보이는 대회였다.
채호가 싱긋 미소를 지어보인다.
“대표님께서 보내주신 자료는 잘 살펴봤습니다.”
채호는 킹 챔피언쉽의 미들급 챔피언과 두호의 논타이틀 매치를 제시했다.
그런데 제이슨리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두호의 실력이 절정에 오른 상황이지만 한 번에 자신들 단체의 챔피언과 붙이려 하다니.
솔직히 건방진 생각이라 느꼈다.
“외람된 말씀이나 저희 단체와 계약하지도 않은 선수에게 곧바로 챔피언과 붙을 기회를 주는 것은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제이슨 리는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채호의 입가에 실낱같은 미소 한 가닥이 잡혔다.
제이슨 리는 여러 가지 이유와 여건을 들어 완곡하게 거절했다.
채호도 거절의 이유를 충분히 납득한다.
가장 큰 이유는 형평성의 문제일 것이다.
경력이 화려한 선수들도 킹 챔피언쉽 미들급 챔피언에게 도전할 기회가 쉽지 않다.
그들이 보는 두호는 피라미다.
이겨도 칭찬받지 못 할 일이고 지기라도 하면 개망신이다.
킹 챔피언쉽의 위상에 흠집이 생기기만 할 제의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채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다른 속셈을 간파했음을 알아차렸다는 뜻이었다.
제이슨 리는 형평성 운운하지만 실제 사유는 달랐다.
삭초제근(削草除根).
화근이 될 건 미리 제거해야 한다.
처음 자신들이 백두호에게 템퍼링을 시도한 시점에 필린은 명확하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런데 이제와서 챔피언과의 경기를 붙인다는 것은 백퍼센트 마이너스다.
아무리 주판알을 튕겨도 손해만 나오는 것이다.
흥행도 중요하고 돈벌이는 더 중요하지만 자칫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경쟁 선수의 성장을 도와줄 만한 낭만이 이 바닥에는 없다.
“이걸 한 번 읽어 보시죠.”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제이슨리에게 건넸다.
“뭡니까?”
제이슨 리는 자신의 거절에도 여유로운 그의 표정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바로 서류봉투를 펼쳐보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서류의 정체를 파악하는 순간 그의 표정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서류의 정체는 군룬에게 향한 제안서였다.
“동원 관객 10만. 더군다나 시청률은 말할 필요도 없죠. 지금 대한민국에서 백두호라는 사람이 가지는 마케팅 파워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채호는 자신의 커피를 한 입 마셨다.
“그런 그를 이용하고자 하는 대기업들이 줄을 섰지만 아직 저희는 아무 데도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를 제안할 곳이 딱 네 군데 있죠.”
제이슨리 역시 답을 알고 있다.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세 단체.
XFC, 군룬과 J-2.
그러나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은 군룬과 J-2 이다.
XFC는 업계 최고이니 한국에 진출하고 말고가 없다.
언제든지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군룬과 J-2는 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단체여서 한국에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껏 어느 단체도 한국 시장에서 재미는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백두호는 다르다.
백두호를 두 단체 중 어느 한 곳에 먼저 뺏긴다면 앞으로 아시아 시장에서의 지금같은 영향력 발휘는 힘들 것이다.
제이슨 리는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논 타이틀전은 계약체중이니 챔피언의 명예가 떨어지는 효과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프로모션의 관련 모든 것을 그쪽에 일임하고...”
채호가 씨익 미소 짓는다.
“한국에서 자리 잡으실 때 필요한 한국 기업들과의 자리 역시 우리가 나서서 주선하겠습니다.”
킹 챔피언쉽의 유일한 약점은 자본이다.
한국 시장에 끼어든다 할 지라도 거기서 살아남을 탄환이 부족하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채호는 그것을 한국 기업들의 자본으로 해결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제이슨리의 표정이 변했다.
절묘한 제안이다.
채호를 다시 본다.
‘필린의 이채호 대표를 만나면 주머니를 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업계의 소문이 사실인 듯 보였다.
아직까지 자신의 비즈니스 상대중에 이만큼 절묘한 제안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본 뒤 연락 드리겠습니다.”
다른 곳에 넘겨주기에는 너무 달콤한 제안이지만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채호는 가볍게 웃었다.
“이달 말까지만 답변 주시면 됩니다.”
제이슨 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채호는 자신의 대표실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제이슨 리가 사무실을 나가는 것을 보며 채호는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 경쟁자가 먹는 것은 독약이라도 뺏어 먹고 싶은 법이지.”
아마도 같은 제안을 군룬이나 J-2에 했더라도 제이슨리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채호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무엇인가 약속이 있는 듯 가방을 챙겨 방을 벗어났다.
사무실 직원 몇이 걸어오는 채호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채호는 일어나지 말라는 듯 손짓하고 자신의 퇴근 카드를 찍는다.
“대표님, 퇴근이신가요?”
“네. 내일 봐요”
채호는 손을 흔들며 문 밖으로 나갔다.
* * *
필린의 트레이닝 센터.
두 사람이 엉겨붙어 훈련중이었다.
“자 원투 치고 빠르게 태클!”
탁현의 우렁찬 목소리에 두호가 재빠르게 반응한다.
-쾅쾅
미트를 때리는 소리는 거의 전쟁통의 포성을 듣는 듯 하였다.
그리고 탁현의 시야에서 흐려지듯 사라지더니 어느덧 탁현의 하체와 허리를 잡아챈다.
탁현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팍!
타타탁!
말은 없고 서로의 신체를 잡고 가격하는 소리만 들린다.
두호의 부상을 염려하여 아주 강한 강도의 훈련은 아니었지만 일반인이라면 삽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만한 양은 분명했다.
-띠잉.
훈련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두 사람은 잠시 휴식을 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예수가 물병 하나를 가져와 두호에게 건네며 옆 자리에 앉더니 팔에 무엇인가를 두른다.
두호는 예수의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물맛이 조금 다른 것을 눈치챈 두호가 예수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씽긋 웃었다.
“전해질 물이에요. 빠른 수분 보충을 위해서 마시는 거죠. 아직은 재활적인 측면으로 훈련을 해야하기 때문에 마시는 것도 조금 달라야 해요.”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모두 비웠다.
그 사이 두호의 심박수를 체크한 예수는 팔에 두른 테이프를 걷어내었다.
“주민 코치님! 심박수 정상입니다.”
“오케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는 주민이 큰 칠판에 두호의 심박수를 시간별로 기록해놓고 있었다.
“두호씨 오늘 미트 트레이닝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두호는 곧바로 다른 곳에 준비된 물리치료실로 이동하여 침대에 누웠다.
주민이 침대 앞으로 걸어와 자신의 소매를 걷어 붙인다.
두호의 목부터 시작해서 발 끝까지 회복을 위한 마사지를 시작했다.
“두호씨 조금만 더 허리를 눕힐게요.”
“네.”
“좋습니다.”
주민의 안내에 따라 몸을 맡긴 두호는 가만 눈을 감았다.
“이야. 백두호군 벌써부터 챔피언의 아우라가 보이네요.”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채호가 들어섰다.
회사를 나온 채호는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고생 많아요. 주 코치!”
채호는 싱긋 미소지으며 주민의 어깨를 툭 쳤다.
“아닙니다. 대표님. 근데 어쩐일로...?”
채호가 주위를 돌아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잠시 두호군과 둘이서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주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두호 역시 침대에 정좌로 앉아 어깨를 빙빙 돌렸다.
채호가 의자 하나를 들고 와 두호의 앞에 턱하니 놓고는 앉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좋아!”
어제 두호가 습격을 당했음을 알고 채호는 굉장히 놀랐다.
더군다나 칼이나 쇠파이프 따위가 아닌 권총과 군용 나이프.
한국에서 일반인이 보기조차 힘든 것들 아닌가.
두호는 전화로 어제 수미의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준 것이다.
“어르신이 보여준 명단에 윈스턴이 있었다고 했죠?”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음!”
채호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그러나 딱히 이것이다 하고 그려지는 그림은 없다.
“일단 내가 박래진 보스를 만나 알아보겠습니다.”
“마음대로, 난 더 이상 그쪽은 떠올리기 싫거든.”
채호는 어색한 표정을 했다.
“걱정 마세요.”
채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