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6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사건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두호지만 박래진의 입국은 매우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옐로우 맘바에서 뭔가 일이 벌어진건가.”
한국인이면서도 용병업계에서는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인물.
고래가 움직이면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박래진은 고래였다.
* * *
가구 회사 직원들이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내부를 완전히 뜯어내고 새롭게 바꾸는 작업 중이다.
경수를 비롯한 직원들도 가구회사에서 나온 사내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으. 덥다. 사람 잡는 날씨구만.”
목에 수건을 두른 경수가 백평파전 앞에 있는 단풍나무 그늘에 앉아 생수를 마셨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경수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낡은 가죽 가방을 멘 낯선 사내가 바로 등 뒤에 서 있다.
경수는 순간적으로 숨을 크게 쉬었는데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덥수룩한 수염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너덜한 바지에 소매를 걷어 붙인 셔츠는 영락없는 거지 행색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르신 안에 계십니까.”
수미를 찾자 경수의 눈이 가늘어진다.
“핫핫! 나쁜 사람 아닙니다. 박래진이라고 하면 알 것입니다.”
“잠깐!”
경수가 안으로 사라졌다.
박래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군. 예나 지금이나, 하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좋지.”
그때 안으로 들어간 경수가 나오더니 조금은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박래진은 경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수미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제 황성태가 ‘침묵의 대화’라는 책 한 권을 보내주어 읽고 있는 것이다.
“모셔왔습니다.”
수미가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박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하곤, 죽은 줄 알았네.”
어떻게 연락 한 번 없었느냐는 말이다.
“어르신은 점점 회춘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 늙은 사람한테 뭔 소리, 앉아.”
박래진은 수미 맞은편에 앉았다.
래진은 실내를 스윽 훑더니 눈을 좁혀 떴다.
“오면서 보니 그 친구만 안보이더군요. 아주 야무진 친구.”
“석희 말인가. 떠났네. 멀리.”
래진은 살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다.
“내가 부탁한 것은?”
래진은 자신이 메고 온 가방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주었다.
수미는 벗어두었던 안경을 다시 끼고 봉투 속에 담긴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건 왜 필요하신 겁니까.”
“양지에서는 양지의 돈이 필요하지.”
수미는 가까운 시일내에 PRIDE-K의 격투기 브랜드를 출범할 예정이다.
단순히 대회가 아닌 XFC같은 격투기 단체.
지금 수미가 읽고 있는 것은 여러 스포츠 종목에 투자를 하고 있는 거물급 명단이다.
선수들과 PRIDE-K가 해외 진출을 하려면 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야한다.
지명도와 영향력이 있는 그들과 연결이 된다면 이름을 얻는 건 시간문제다.
서류를 꼼꼼하게 살핀 수미가 고개를 들어 래진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는 장갑차가 달리고 하늘에서 폭탄을 쏟아내는 전장에만 용병이 있는 건 아니다.
이제 용병은 21세기 경호시장의 가장 큰 축이 되었다.
그동안의 돈 많은 사람들의 경호가 수비 위주였다면 용병의 등장은 선제 타격이다.
특히 남미와 중동의 부호들은 누군가 자신을 공격할 기미가 보이면 선수를 쳐서 미연에 화를 막는 것이다.
용병만큼 공격적인 경호를 해내는 부류는 없고 그 가운데 엘로우 맘바가 있다.
그야말로 용병시대(傭兵時代).
박래진은 엘로우 맘바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박래진은 자신이 아는 세계적 부호들중 스포츠에 각별한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인물들 명단을 가져온 것이다.
“눈에 좀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네가 노력 많이 했군. 모두가 마음에 들어.”
래진은 빙긋 웃었다.
“한국은 얼마나 있을 예정인가.”
래진은 담배 하나를 빼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부친다.
후우!
연기가 천장을 타고 흘러간다.
흘러가는 연기속에 몇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태어나긴 했어도 내 생활권이 아닌 나라에 뭐 오래 있을 이유 있습니까?”
“오랜만에 왔는데 저녁에 식사나 같이 하지.”
“노우! 됐습니다.”
래진이 빙긋 웃었다.
“더 이상 된장찌개는 먹지 않겠습니다.”
수미는 만나면 된장찌개를 사주었다.
“노 땡큐, 노 땡큐.”
지켜보던 경수가 고개를 돌리고 웃는다.
채호의 집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번 PRIDE-K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직원들에게 저녁 한 끼를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준모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릇과 접시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채호가 빙긋 웃는다.
“좋습니까?”
“그럼요. 술은 항상 좋다마다요. 더군다나 대표님 술은 아주 비싼 것 아닙니까?”
준모는 채호를 보며 히죽 웃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채호의 인터폰을 확인했다.
탁현이다.
오늘 좀 늦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온다.
잠시 후 탁현이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여러분.”
“탁 코치님.”
“오셨어요.”
음식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아는 체를 했다.
“저녁 편히 얻어 먹으려면 좀 거들어야겠죠.”
탁현이 벽에 걸린 앞치마 하나를 두르고 주방쪽으로 사라졌다.
넓은 거실에 화려한 음식들이 수북하게 차려졌다.
모두가 앞에 잔을 채워 놓았고 채호가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들 고생하셨습니다. 필린의 무한한 번창을 위하여.”
“위하여!”
일제히 채호를 따라 잔을 들어 마신다.
이어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접시를 들고 차려진 요리를 원하는 만큼 가져다 먹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음식을 먹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그동안 마음 졸이며 고생한 것을 하나둘 털어 냈다.
특히 약물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제일 힘들었고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수미가 알고 지내던 언론사 간부들에게 협조 요청을 하고 시간이 지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한 고비 넘긴 것이다.
아무리 아닐지라도 일단 언론에 보도가 되어버리면 끝장이다.
대중은 언론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채호는 불콰한 얼굴로 직원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예수씨 수고했어요.”
“대표님 감사합니다.”
술을 받은 예수가 환하게 웃는다.
“준모씨도 한 잔 받아요.”
“물론이죠.”
준모는 재빨리 잔을 들이 밀었다.
“그런데 대표님 이제 두호 형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준모의 질문에 주위 직원들이 돌아보았다.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이다.
“현재 두호씨 입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스포츠 선수로 자리매김 했다는 걸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하면 국내시장에서 만큼은 두호씨의 가치가 최고조로 올랐죠.”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았다.
모든 직원들이 채호를 바라본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가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백두호는 최고지만 세계시장에서는 많이 모자랍니다.”
고개를 끄덕인다.
더욱이 한국 선수중 어떤 체급에서도 세계 챔피언이 된 일이 없다.
그건 향후 두호가 미국 시장에 진출해도 단번에 인정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다.
격투기 관계자들 머릿속에 한국선수, 아시아권은 아직이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두호는 그걸 깨부셔야 한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모든 선수가 정상에 올라서기까지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 아침 XFC에서 두호씨와의 미팅을 원한다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준모는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치! 우리 형님이 안 가면 누가 거길가는데!”
예수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그러나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느냐죠,”
직원들은 채호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호는 코와르키에게 빨리 도전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선수가 챔피언에 도전하는 길은 쉽지 않다.
즉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싸우며 올라가야 할텐데 그러다 코와르키가 은퇴라도 해버린다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버린다.
격투기 선수에게 목표물이 사라진 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다.
누군가를 타겟으로 정할 때 무자비한 투혼과 의지가 살아나는 것이다.
방법은 XFC에서 확실한 매칭조건을 제시할 덩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한가지 수(數)를 쓸까 합니다.”
“무슨 수!”
모두가 궁금해할 때 문이 열리고 두호가 들어섰다.
아버지가 약속이 있다면서 가게를 비워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가게를 지키고 온 것이다.
“챔피언! 챔피언!”
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두호는 빙긋 웃었고 채호를 향해 늦어 미안하다는 듯 눈을 깜빡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채호가 어서 자리에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방금 전 모두에게 한 말을 간단하게 예수가 두호에게 요약해주었다.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채호를 바라보았다.
채호는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증명은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킹 챔피언쉽 조나단 왕의 명함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순번표를 무시하고 달려볼 겁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상징성있는 MMA 단체는 총 네 곳이었다.
미국의 XFC.
중국의 쿤룬.
싱가폴의 KING 챔피언쉽.
일본의 J-2.
“일단은 KING 챔피언쉽 미들급 챔피언과 매치를 잡을 겁니다. 그쪽 선수도 배려하는 차원에서 타이틀 전이 아닌 이벤트 매치로 말이죠.”
채호는 자신의 컵에 물을 한입 마셨다.
“그런식으로 모든 단체의 챔피언들과 싸울 겁니다.”
사람들의 눈이 빛난다.
이슈와 궁금증.
마케팅은 과연 사람들의 관심을 얼마나 끌어낼 수가 있는지가 생명이다.
XFC를 제외한 타 단체의 챔피언이 모두 두호에게 꺾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미들급의 판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코와르키랑 백두호랑 싸우면 누가 이겨?
타 챔피언들을 모두 꺾어버린 무관의 제왕과 명실상부 세계 최강.
모든 면에서 팬들을 반으로 나눠 싸우게 만들 엄청난 매치업인 셈이다.
그런데 예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채호를 바라보았다.
“과연 XFC가 이 부담스러운 매치업을 받아줄까요?”
아무리 돈을 최우선으로 치는 XFC라도 자신들의 간판스타를 쉽게 내놓을 만큼 어수룩한 단체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직 프로전적이 없는 두호에게 내놓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XFC가 더 원할 겁니다.”
예수는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굳은 판을 다시 흔들 존재인데 과연 보고만 있겠습니까. 몸값이 문제지만.”
두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XFC에는 한가지의 고민이 있다.
코와르키로 인하여 미들급의 랭킹이 획일화 되버린 것.
-어차피 코와르키가 이길텐데.
굳어버린 면면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랭킹에 시청자들은 식상해 있다.
무료하고 침체되어 있는 시장을 뒤흔들만한 매치업이 아니면 시큰둥 할 것이다.
굳어 있는 판을 흔들어 다시 예전의 춘추전국시대같은 미들급을 바라는 것이 XFC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두호를 고인물을 뒤집을 만한 허리캐인 급으로 만들면 된다.
채호의 비즈니스 능력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형님, 자신 있죠?”
두호가 말없이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