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5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수미가 앞장서고 태건이 뒤를 따른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는 수미는 말이 없다.
분명 좋은 날이다.
오늘을 얼마만큼 절절하고 필사적으로 기다렸는가.
지금쯤 쾌재를 부르고 이를 부드득 갈아야 하는데 도대체 가슴속에서는 어떤 느낌도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 산 줄 알았지만.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군.’
밖으로 나온다.
수미의 눈에 경수가 들어왔다.
수미를 발견한 경수는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수미가 멈칫했다.
경수의 셔츠에 붉은 피가 말라 붙었다.
“별 것 아닙니다.”
경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씨익 웃었다.
“이 바닥은 몸이 재산이야. 소중히 돌봐야 한다구.”
“명심하겠습니다.”
수미는 저만치 세워져 있는 승용차를 향해 걸어갔다.
누군가 차 안에서 몸부림 치는 듯 차가 출렁 거렸다.
경수가 재빨리 다가가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에는 손이 묶이고 청테이프로 입을 막은 모영배가 요란하게 몸을 뒤틀었다.
“이이이이!”
뭐라고 말을 하는 듯 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다.
짝!
경수가 단번에 테이프를 떼어낸다.
“하아! 하아!”
이제 조금 살만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손도 풀어줘.”
모영배는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지만 트렁크 벽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툭!
경수가 갖고 있던 회칼로 손을 묶은 밧줄을 끊자 모영배는 재빨리 일어났다.
트렁크에서 내린 모영배가 움찔했다.
수미가 가디건을 여민 채 서 있다.
“오...오랜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미가 돌아섰다.
사륵!사륵!
치마가 땅바닥을 끄는 소리를 흘리며 수미는 멀어져 갔다.
수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렸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모영배는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마시게. 무척 귀한 차일세.”
황성태에게서 얻어 온 것이다.
“자네 요새 눈은 잘 보이는가?”
수미가 묻는다.
“늙어서 제일 불편한 건 뼈 따위가 아니야. 그건 대체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정말 세고 셌으니까.”
수미가 흘긋 한쪽에 치워진 실과 바늘을 바라본다.
“그런데 눈은 참 불편해. 이건 대체해 줄 만한 사람이 없거든.”
모영배의 눈이 흔들린다.
단순히 뜨개질 할 때 침침해지는 눈을 갖고서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뭔가 메시지가 담긴 말인 듯 보이는데 얼른 잡히는 것이 없다.
들썩!
모영배의 어깨가 가는 경련을 일으킨다.
눈이 인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눈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해 줄 수 없다는 것.
‘황석희’
수미에게 황석희는 눈이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눈을 자신이 제거해 버렸다.
“모회장과 내가 싸울 이유가 있었나? 더 늙기전에 각자의 삶을 좇아 떠나자는 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안되는 일이었나?”
“어이 자네 담배 있으면 하나 주게.”
태건이 다가와 담배 한 개비를 내밀고 불까지 붙여준다.
딸칵!
모영배는 길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아시면서.”
동업을 깬 것에 대한 복수는 핑계일 뿐이었다.
수미 같은 여자는 같은 편이면 몰라도 절대 갈라서면 안되는 존재였다.
너무 버겁다.
아무리 이 바닥을 떠난다고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나중 무슨 일로 수미와 충돌할지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불안하게 살 바에는 제거해 버리는 것이 두 다리 뻗는 일이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가 벅찬 여자.
화근이 될 것은 아예 뿌리 채 뽑아 버려야 한다.
모영배 부고를 받으면 과연 몇 명이나 올까.
그러나 수미의 부고가 떨어진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능력자들은 일제히 몰려들 것이다.
“거기 캐비닛 좀 열어봐.”
입구에 서 있는 태건에게 지시했다.
태건이 한쪽에 놓인 캐비닛 문을 열었다.
“하얀 수건에 쌓인 것 있지. 이리 가져와.”
태건이 흰 수건에 쌓인 무언가를 들고 왔다.
수미는 태건이 건네준 수건 뭉치를 받아 찻상 위에 올렸다.
스으윽!
직접 보라는 듯 수건뭉치를 모영배에게 내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미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안쪽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모영배는 한참동안 수건뭉치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열었다.
슥!
스으윽!
수건이 열리고 모영배는 흠칫했다.
수건에는 피가 묻은 칼 한 자루가 있었다.
칼 날에 묻은 피가 검게 변색 된 것이 오래되어 보인다.
팟!
그리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사람 하나가 있다.
‘황석희의 칼’
틀림없다.
그날 자신의 부하들을 상대로 싸우던 황석희의 칼이다.
툭!
길게 늘어진 담뱃재가 찻잔으로 떨어졌다.
히죽!
모영배가 짧은 웃음을 지었다.
황석희의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뜻이다.
결국 황석희의 칼에 죽는 셈이니 자연스럽게 복수가 되는 것이다.
부하의 원혼을 기어이 위로하려는 수미의 모습에 숨이 막힌다.
그녀 곁에 왜 유독 똑똑한 사내들이 몰려드는 건지, 이런 주인이라면 한 번쯤 목숨을 내놓아도 그리 아깝지 않을 일이다.
콱!
모영배는 칼을 잡았다.
오래 버티고 있어봤자 더욱 초라해질 뿐이다.
싸움에서 패하면 적장의 목은 베어지기 마련이다.
촥!
손에 잡힌 칼이 목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그어버렸다.
주르륵!
금새 피가 흘러 내리고 잠시 바둥거리던 모영배가 찻상으로 엎어진다.
퍼어억!
찻상이 엎어지고 찻물이 쏟아진다.
화장실을 다녀온 수미가 엎어진 모영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들이 한 명 있을 걸세. 범죄자가 주는 돈으로는 결코 학교를 다니기 싫다며 집을 나가버린 옹골찬 친구지. 청량리 어디에서 정육점을 한다고 들었는데.”
태건이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가 싫어 집을 나간 아들에게 시신을 전달한다.
누가봐도 잔인한 짓이다.
그동안 전화 한 통 내왕 한번 없이 살던 남보다 못한 아버지다.
설마 수미가 아들까지 괴롭힐 작정으로 벌이는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화악!
태건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모영배는 여기저기 숨겨 놓은 재산이 적지 않다.
어차피 부자의 연을 끊고 살았지만 법적으로 인정되는 아들의 지위까지 없앨 수는 없다.
보기 싫은 아버지지만 남겨진 유산이 힘들고 어려운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수미는 다시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태건은 몸을 돌려 지하실 밖을 빠져나갔다.
지하실 밖에 앉아있는 태건.
그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꼭 자신의 손으로 갚아주고 싶었지만 왜인지 내키지가 않아 수미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그.
자기 인생에 없을 줄 알았던 순간과 있어서는 안될 순간이 가득한 올해가 유독 길게 느껴지는 그였다.
“여름이라 확실히 별이 좋아.”
어둠속에서 뒷짐을 진 채 나타나는 수미.
태건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오셨습니까.”
어서 앉으라는 듯 태건에게 손짓하는 수미.
태건의 어깨를 두드리며 옆 자리에 앉은 그녀였다.
“별이 좋습니다.”
“자네도 변했어.”
“네?”
태건이 의아한 눈으로 수미를 바라보자 수미가 빙긋 웃는다.
“옛날에는 참 생기가 없는 눈이었는데. 이런 경치도 감상할 줄 알고.”
“아.”
태건이 쑥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띄었다.
사실 자신도 느낀다.
예전보다 확실히 감정이 다양해졌음을 느꼈다.
이제껏 못해본 색다른 경험들을 연거푸 겪어서 그런 듯 싶었다.
“보이는 걸 보지 않는 것도 문제야. 그런게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든.”
“네. 항상 생각하겠습니다.”
수미가 미소를 지으며 태건의 어깨를 두드린다.
“경수는 같이 일 다니니 어때?”
이번 부사장으로 임명된 경수의 대한 평가를 묻는다.
그녀 역시 경수를 알아봤을 테지만 굳이 태건에게 물어보는 이유는 뻔했다.
황석희처럼 경수와도 친해져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다.
“일 머리도 좋고. 실력도 좋습니다.”
“그래봤자. 자네보다 밑 아니겠나.”
“아닙니다.”
“그래.”
수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태건 역시 재빠르게 그녀와 함께 일어났다.
“자네가 잘 좀 도와줘. 내가 보기엔 그 친구도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미는 이내 다시 뒷짐을 쥔 채 지하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태건은 다시 자리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떨 때는 히죽 웃기도 또는 인상짓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의 표정에는 생기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 * *
두호와 채호는 로비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는 뭐 하십니까?”
“별 일 없지. 대회도 끝났고.”
“그러면...”
채호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꺾는 시늉을 했다.
술 한 잔 하자는 뜻이다.
두호가 피식 웃었다.
원래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리 몇 개월을 금주를 한 상태였다.
“그래. 오랜만에 제대로 한번 먹자.”
“하하. 좋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예수와 함께 어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두호야.”
어머니가 반색했다.
표정이 어둡지 않은 것이 나쁜 결과가 나온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검사 결과는 나와봐야 알지만 크게 문제될만한 것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두호는 안도하며 예수를 향해 말했다.
“식사해야죠.”
“어머니 어제 금식 하셨을테니 죽 종류로 먹는 게 어때요?”
“좋습니다.”
채호가 손을 들어 대답하더니 재빨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두호에게 전화 좀 받겠다는 사인을 하고 한쪽으로 비켜 떨어졌다.
“여보세요.”
* * *
인천공항 8번 게이트의 유리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기지개를 피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장신의 거구였다.
거기에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에 덮여 있었지만 밝은 느낌을 주었다.
구겨진 옷차림에 노숙자 살림 같은 낡은 가방을 멨다.
퍽!
급히 나오려다 뛰어오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부딪치고 말았다.
“으아앙!”
나동그라진 아이가 소리내어 운다.
“아이고 미안해.”
사내는 재빨리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떨어진 장난감 칼을 쥐어준다.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우라랑!”
아이를 달래기 위해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뾰족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켜욧!”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매섭게 노려보며 데리고 가버린다.
사내는 멍한 얼굴로 걸어가는 여자를 보며 투덜거렸다.
“아이씨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내는 잠시 후 전화를 걸었다.
“어 채호 잘 지냈냐. 박래진이다.”
전화를 받은 채호는 몹시 놀란 듯 눈이 크게 떠졌다.
“보스? 어쩐 일로 연락을 다 주셨습니까.”
래진 역시 채호가 반가운 듯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한국 왔는데 얼굴이나 보고갈까 해서. 이 대표 괜찮지?
채호는 뒤를 돌아 두호를 바라보았다.
“제가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한국에 계십니까.”
- 아쉽구만. 이번달 말까지는 한국에 있으니까 연락달라고!
“네. 알겠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고생해라.
전화를 끊은 채호의 표정이 무겁다.
저만치 걸어가던 두호가 흘긋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채호는 두호에게 다가가 툭 뱉었다.
“박래진 보스가 들어왔습니다.”
“어디? 서울?”
채호는 두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박래진은 과거 자신의 팀 캡틴이었고, 현 옐로우 맘바의 보스이다.
그는 자신들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로 옐로우맘바 제일의 히트맨이라고 불린 사내였다.
세상을 등지듯 그동안 연락 한번 없던 인물이 별안간 한국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