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3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얼굴에 살아 있는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창백한 안색에 퀭한 두 눈은 마치 지금 막 죽어 버린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누구신데?”
“모 회장님 잘 아시죠?”
김옥정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린다.
하지만 그녀는 덤덤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아, 모 회장님 찾으시는군요? 나도 요즘 잘...”
-짝.
벼락같이 태건의 손이 김옥정의 뺨을 후려친다.
휘청!
넘어질 듯 비틀 거리다 몸을 세운다.
“모 회장님과 좋은 관계를 갖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옥정은 당황하면서도 분노했다.
열아홉 살에 이 바닥에 들어와 온갖 사내들을 거치고 겪었어도 이렇게 뺨을 맞아 본 적은 없다.
“너 이 새끼 내가 누군 줄 알고.”
쫘악!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김옥정은 벽에 몸을 부딪치며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았는데 사방이 흔들거린다.
쿵쾅!
갑자기 계단이 요란하게 울린다.
누군가 다급히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수가 문 뒤 벽 쪽으로 빠르게 붙는다.
덜컹!
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경수는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맨 앞의 사내를 벼락같이 덮쳤다.
와락!
상대의 목을 휘감고 곧바로 땅에 메쳐버린다.
-쾅
사내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뻗는다.
이어 물 흐르듯이 바로 뒤에 있는 사내의 머리채를 움겨쥐더니 옆 전신거울에 박아 넣는다.
빠악!
-쨍그랑
거울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얼굴에 핏물이 흘러내리며 늘어진다.
두 사내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자 뒤따르던 사내들이 회칼을 뽑아 들었다.
히죽!
경수가 웃는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건을 향해 말했다.
“일 보십시오.”
태건은 알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김옥정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김옥정의 왼쪽 뺨에 태건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고 귀고리 또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헉!
아이고!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김옥정의 시선이 돌아갔다.
두 사내가 나동그라졌고 홀로 남은 사내는 투기를 잃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회장님의 행방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옥정은 마른 침을 삼켰다.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지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두 번 묻지 않겠습니다. 모회장 어디 있습니까.”
* * *
두호는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나들이와 술자리로 피곤하셨는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코를 골며 잠에 떨어진다.
화장실을 다녀온 두호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약을 드시는 듯 손을 오므리고 물 한 컵을 따라든다.
손에 있는 약을 한입에 털어넣고 컵의 물을 마셨다.
컵을 싱크대에 넣고 몸을 돌리던 어머니가 두호를 보며 화들짝 놀란다.
“안 들어가고 뭐하니?”
두호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식탁 의자 하나를 빼내어 앉는다.
“많이 안 좋으세요?”
웬만해서는 그냥 이겨내시는 분이다.
그런 분이 말없이 약을 한 주먹 드실 정도면 몸이 많이 아픈 건 분명해 보였다.
“안 좋긴, 나이들면 다 이러지.”
어머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표정을 했으나 두호의 표정에 그늘이 내려 앉는다.
“어서 자거라.”
“내일 같이 병원가시죠.”
두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일 필린에 연락해 시간 약속해 놓겠습니다. 큰 병원 한 번 가셔서 검진 받아보시죠.”
어머니가 말없이 두호를 바라본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나이에 비해 이렇게 철이 든 아이들이 마음고생이 많다던데.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시죠!”
“그러자꾸나.”
“약속했습니다.”
“그래. 알겠다니까.”
두호는 그제서야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두호는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켰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온다.
자신의 책상에 앉아 열린 창문을 통해 캄캄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두호의 복수와 꿈.
두 가지 모두를 이뤄냈다.
또한 무가 말한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선한 영향력을 갖춘 사회적 인물이 되었다.
“으음!”
어깨를 들어 올리며 크게 숨을 쉬더니 책상 서랍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펼쳤다.
과거 주민에게 건네 받았던 자료였다.
서류에는 사진 한 장이 끼어 있었는데 당당한 체구의 외국인이다.
‘알도프 코와르키.’
현 MMA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알려진 미들급 챔피언이자 과거 자신에게 총알을 쏟아 부은 자.
두호의 눈에서 오랜만에 붉은 빛이 돈다.
설욕과 복수할 기회가 다가오자 설렘과 흥분이 도는 것이다.
두호가 씨익 미소 짓는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도 않은 이른 새벽 정류소에 버스 한 대가 멈춘다.
버스 뒷문이 열리고 몇 명의 아주머니들이 내렸다.
첫차로 출근하는 올레 시장의 상인들이며 맨 마지막으로 두호의 어머니가 내렸다.
두호의 어머니는 총총 걸음으로 시장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불이 켜져 있지 않은 시장은 어두컴컴 했는데 한참을 걸어가던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걸음을 세웠다.
무대 위 조명처럼 가게 한 곳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소복상회였다.
“맙소사!”
가까이 다가간 어머니는 또 한 번 놀랜다.
그야말로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
가게 앞 매대에 소복상회에서 판매하는 여러 가지 건어물들이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안쪽에서는 두호가 탁자를 닦고 있었다.
인기척에 허리를 세운 두호가 어머니를 발견하고 싱긋 웃는다.
“얘!”
어머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호를 바라보았다.
두호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스윽 훔치며 탁자 의자를 꺼낸다.
“앉으세요.”
“언제 나온거니?”
어머니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아침 운동도 할 겸 해서 나왔어요.”
어머니가 가방을 뒤지더니 통장 한 개를 꺼내 두호 앞에 내밀었다.
두호는 무슨 통장이냐는 듯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직접 보라는 듯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통장을 든 두호는 쭈욱 살펴보다 어느 한 부분에 눈이 멈췄다.
처음에는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본다.
“왜요?”
“무섭다.”
“어머니!”
“왜 그 돈이 엄마 통장으로 들어와야 하는거니? 그 돈은 네가 상처입고 피 흘리면서 번 돈 아니냐.”
우승상금 10억이 어머니 통장으로 들어 온 것이다.
한평생 그렇게 큰 돈을 만져본 적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놀랍고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어머니가 관리하셔야죠.”
두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동 때문에 그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앞치마를 풀어 벽에 걸고 손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 놓는다.
가게를 나가던 두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탁자 의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실컷 쓰세요. 제발!”
그리고 가게를 나가 새벽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가게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태건과 경수가 차에서 내렸다.
딸칵!
경수가 담배 하나를 꺼내물며 어딘가를 바라본다.
아침이 밝지 않아 자세히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멀리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는 저택 한 채가 희미하게 들어온다.
앞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월화산이 버티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
김옥정에게 알아낸 모영배의 별장이다.
두 사람은 아스팔트가 깔린 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 길 끝에 별장이 있다.
묵묵히 걸어가던 태건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터치를 했다.
“예 어르신!”
전화를 걸어온 이는 수미였다.
태건은 가만 듣고 있더니 한 마디 했다.
“우리도 곧 만날 듯 싶습니다.”
그러면서 별장을 바라본다.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전화를 끊는다.
“모리해피캐피탈 본사도 지금 경찰이 밀고 들어간 모양인데.”
수미는 과거 모영배의 범죄 증거들을 은닉해준 적이 있었다.
부하들에게는 모영배를 찾아올 것을 지시하고 경찰을 끌어들여 모리해피캐피탈을 거덜내려 하고 있다.
“경찰에 자칫 신변이 넘어갈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서두르라는 뜻이다.”
모영배의 경제적 몰락은 경찰에 맡기고 인간적 목숨은 자신이 틀어쥐길 원하는 것이다.
반드시 모영배의 목을 갖겠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신속히 이동하여 별장에 도착했다.
족히 4미터는 될 것 같은 담장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얘긴데.”
경수가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CCTV요.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태건이 CCTV를 바라본다.
“저런 돔 카메라는 열상감지로 표적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전혀 꼼짝하고 있지 않습니다.”
경수가 주춤거리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카메라는 꼼짝하지 않았다.
“천하의 모영배가 가짜를 설치할 리는 없고, 어쨌든 정상 작동을 안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몇 번에 걸쳐 더 실험을 해보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경수가 재빨리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았다.
태건이 어깨를 밟고 올라서자 쭈그리고 있던 경수가 일어났다.
하지만 담장이 워낙 높아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는다.
파앗!
태건이 자세를 낮추더니 힘껏 뛰어 올랐고 담장 끝에 손을 걸쳤다.
손이 닿은 담장을 어렵지 않게 올라선 태건이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태건이 밧줄 하나를 내려준다.
경수는 태건이 내려준 밧줄을 잡고 담장을 올라가 집안으로 사라졌다.
별장은 불이 꺼져 있고 조용했다.
두 사람은 정원의 나무 사이를 빠르게 이동했다.
화악!
앞서가던 태건 앞에 뭔가 불쑥 튀어 나왔다.
쇠파이프다.
태건은 고개를 뒤로 젖혀 쇠파이프를 피하고 상대의 목젖을 강하게 주먹으로 때렸다.
‘커억.’
사내는 한 손으로 목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했다.
뻐억!
태건은 사내의 머리채를 잡고 정원석에 얼굴을 찍는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늘어졌다.
화악!
이번에 뒤쪽이다.
경수가 상체를 숙여 피하더니 빙글 돌아서서 사내의 등 뒤를 잡았다.
그리고는 쥐고 있던 칼을 박는다.
두 사람은 어둠속 별장을 다시 살핀다.
황급히 도망친 모영배이니 그다지 많은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사삭!
두 사람은 별장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자주 입던 한복이 아닌 등산복 차림이다.
어둠속에 웅크리듯 앉은 모영배의 두 눈이 새파랗게 번득인다.
순식간에 무너졌다.
만약을 대비해 항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대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워낙 규모가 크고 흥행에 성공한 대회기 때문에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언론을 포함한 수많은 매체에 필린을 광고하느라 틈을 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딸칵!
모영배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수미의 부하들이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모영배는 탁자 위에 올려진 가방을 쳐다보았다.
가방 안에 담긴 것은 현금인데 급한대로 집에 있던 걸 모조리 쓸어왔다.
당분간은 피하는 것 말고는 어떤 전략도 필요없다.
거기다 조금전 아는 경찰로부터 자신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했다.
동남아쪽으로 나가 육 개월이나 일 년쯤 지내다 조용해지면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된다.
“아주 천하의 모영배꼴이 쥐똥이구만.”
그러다 탁자 위 핸드폰을 흘긋 바라본다.
조상무에게 한국을 뜰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덜컹!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조상무가 들어섰다.
“어떻게 됐어?”
“준비 끝났습니다. 내일 새벽 2시 군산항입니다. 목적지는 필리핀입니다.”
그러면서 종이 한 장을 내놓는다.
어둠속에서 서류 내용이 보일 리 없다.
그걸 눈치챈 조상무가 불을 켜려고 하자 모영배가 버럭 소릴 질렀다.
“켜지마!”
조상무는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콱!
모영배는 주먹을 쥐었다.
주먹을 떨며 이를 갈아 붙인다.
“떠나시면 언제쯤 오실 생각입니까?”
모영배가 담배를 책상에 비벼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먹어 하는 타향살이가 쉽겠나. 잠잠해지면 돌아와야지.”
조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년.”
수미를 떠올리며 두 눈에서 독기를 뿜어낸다.
“잠시 휴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때 조상무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래, 들어와.”
그리고 잠긴 현관문을 열어준다.
“누군데?”
“영준입니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영준이 들어섰는데 손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갑작스런 야구방망이에 모영배의 눈이 커진다.
히죽!
조상무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