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2화 : 단단하게 받아쳐라.
담배가 작은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태건은 하늘을 보며 빨아들인 연기를 내뿜었다.
무릎에 팔을 댄체 의자에 앉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땅바닥에 담배를 톡 하니 털었다.
-쾅
경수가 헐덕거리며 들어왔다.
“진짜 없네.”
경수는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금고는 반쯤 열려져 있었고, 안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오기 직전 튄 것 같습니다.”
태건이 돌아 앉았다.
담배를 피우던 사내는 태건의 시선에 움찔하며 떨었다.
“저는 정말로 모릅니다. 진짜 아무것도 모릅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사내는 더듬거렸다.
슥!
경수가 바닥에 떨어진 칼 하나를 주워 들고 다가갔다.
경수의 시선이 심장 부위에 멈추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렸다.
“사실은.”
사내의 입술이 파랗게 변했고 온몸을 떨었다.
“예전에 회장님 심부름으로 한남동에 있는 유월이라는 술집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한남동?”
“거기 마담인 김옥정이라는 분께 생일 선물을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더 이상은 모릅니다.”
“정말이야?”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 좆에 못을 박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퍼억!
사내는 시멘트 바닥에 사정없이 무릎을 꿇었다.
툭!
태건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일어났다.
“가자.”
경수는 태건을 흘긋 바라보았다가 툭 하며 들고 있던 칼로 사내의 머리를 때리고 휴게실을 나갔다.
터억!
사내는 쓰러지듯 벽에 등을 기댔다.
“하악! 하아!”
입을 떠억 벌린 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살았다는 것이 이토록 짜릿한 것인지 오늘 처음 깨닫는다.
* * *
준모가 긴장한다.
나름대로 고위급 인물(두호, 수미, 채호)인물들을 태워봤지만 오늘은 또 다르다.
두호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리고 뒷자리에 부모님 두 분이 자리를 차지 한 것이다.
아버지는 시종 환한 표정이지만 어머니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은 듯 조금은 덤덤해 보인다.
끼이익!
빨간불에 차가 잠시 멈춰섰다.
“우리 저번에 집 근처에서 봤었죠?”
준모는 곧바로 상체를 틀어 뒷자리를 향해 꾸벅했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준모의 말에 어머니가 살짝 웃는다.
파란불로 바뀌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어머님, 아버님, 우리 두호 형님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두호가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은 눈으로 본다.
준모는 가슴팍을 탁 치면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두호 형님의 성공이 곧 저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준모의 진지한 너스레에 어머니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밝아졌다.
“우리 두호가 뭘 어쩐다고.”
“겸손하십니다. 정말 크십니다.”
두호는 급기야 고개를 돌려버린다.
준모는 차 안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차가 골목으로 들어선다.
“준모씨. 여기서 세워주세요.”
준모는 의아한 표정으로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네? 아직 자택까지는 조금 남았는데요.”
“그래도...”
아버지는 길 반대편의 한 가게에서 시선이 멈췄다.
상평갈비.
이 동네에서 가장 큰 고깃집이었다.
“이런 날 갈비 한번 뜯어야 하지 않겠소. 저 앞으로 대요.”
준모는 방향지시등을 켜면서 천천히 갈비집 앞으로 다가가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열어주기 위해 내렸지만 셋 모두 이미 땅을 밟고 서 있다.
준모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연락주시면 또 모시러 오겠습니다.”
준모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두호 아버지가 붙잡는다.
“어디 가요?”
“집에 가야죠. 가족분들끼리 편하게 시간 보내십시오”
탁!
어머니가 준모의 팔을 잡았다.
“우리 두호를 이렇게 잘 챙겨주니 식구 아닌가요?”
“어...어머니!”
준모의 목소리가 떨린다.
탁!
두호가 준모의 어깨를 툭 치고 갈비집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는 뜻이다.
“어머님 아버님과 식사를 할 수 있다니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두호 아버지가 호탕하게 말했다.
“그래요. 좋은 날이니 우리 오늘 배 터지게 먹어봅시다.”
네 사람은 모두 상평갈비 집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손님은 가족으로 보이는 한 테이블 말고는 한가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아버지가 손을 번쩍 든다.
“여기 갈비 5인분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소주부터 먼저 줘요”
“네!”
직원이 밝게 웃으며 돌아섰다.
갑자기 아버지가 멈칫했다.
준모를 바라보았는데 운전하는 사람이니 술을 먹으면 안된다.
먹으면 같이 먹고, 아니면 모두 먹지 말아야 한다.
“소주...”
소주 됐다는 말을 하려는데 준모가 말렸다.
“오는 술 막지 마십시오. 대리라는 아주 합리적인 시스템이 있습니다.”
“아 그렇지.”
그제야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진다.
“여기 대리 되죠?”
소주를 내놓은 직원에게 물었다.
“예! 언제든지 불러드립니다.”
딱!
아버지가 소주 마개를 따고 준모에게 권했다.
준모가 양손으로 공손히 받았고 이어 두호를 바라본다.
두호는 아무 말 없이 소주잔을 내밀었다.
또르르!
“감사합니다.”
잔을 받고 난 두호는 재빨리 소주병을 쥐었다.
“아버지!”
“오냐!”
두호는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채워 주었다.
“두호야!”
아버지가 두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생했다.”
단 네 마디였지만 여느 아버지들의 백 마디 천 마디 보다 더 뜨겁고 절절한 마음이 넘치도록 들어있다.
자식의 방황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 주먹을 나쁜 곳에 쓰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오늘 직접 보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었다.
“아버님, 제가 감히 건배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아주 좋아요.”
“두호 형님 만세! 어머님 아버님 만만세! 건배.”
푸웃!
어머니가 사이다 잔으로 건배를 하려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추에 고기를 얹어 싼 뒤 입으로 밀어넣는다.
오 인분 시켰던 고기는 이미 십 인분으로 늘어났고 소주병은 세 개째 비우고 있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준모가 좌석을 휘어잡고 놔주지 않는다.
“그때 형님이 딱 나서면서...”
준모가 눈썹을 팔자가 될만큼 사정없이 꺾는다.
“우리 준모 건드리면 내년 오늘이 네 기일이다. 라고 하니까 상대가 그 있잖습니까. 100m 세계신기록 보유자. 그 우사인 볼트인가 하는 놈처럼 도망가더라구요. 그때 느꼈습니다.”
허풍이 잔뜩 붙은 이야기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즐겁고 진지하게 듣는다.
아들 얘기다.
아들얘기, 그것도 칭찬이라면 밤새 들어도 즐거운 법이다.
* * *
유월 맞은편 길가에 승용차 한 대가 멎는다.
차 문이 열리고 태건과 경수가 내렸다.
두 사람은 맞은편 유월이라는 클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스핑크스 동상을 한 간판에 유월이라는 글씨가 깜빡거린다.
“촌스럽긴!”
경수가 피식 웃는다.
딸칵!
태건은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가게 앞에 있는 정장의 두 사내를 살피듯 보고 있었다.
“가죠!”
경수가 앞장을 섰다.
두 사람은 도로를 횡단하여 유월 앞으로 걸어갔다.
“회원이십니까?”
덩치 좋은 사내가 앞을 막고섰다.
“여기 김옥정 여사 계신가?”
순간 덩치가 상의 안쪽에 숨긴 칼을 뽑으려 했으나 경수의 주먹이 더 빨랐다.
빠악!
한 방에 뻗어 버린다.
경수는 반쯤 삐져 나온 사내의 칼을 뽑아 달려오는 다른 사내를 향해 집어 던졌다.
휘익!
날아간 칼은 달려오는 사내의 허벅지에 박혔고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다.
툭!
태건이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 지하계단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내려가 원목으로 된 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 벽을 향해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는데 룸이 없을 때 잠시 기다리는 대기실로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호텔 카운터처럼 1미터 30센티 정도의 대리석 바가 있고 안쪽으로 여자 두 명이 서 있다.
“회원 번호 불러 보시겠어요?”
태건은 안쪽으로 쭉 이어지는 양탄자 깔린 복도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했다.
여기가 술집인가 싶을 때 복도 왼쪽 문이 하나 열리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사내가 걸어 나왔는데 바로 그때 노랫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사내가 문을 닫아 버리면서 복도는 다시 정적에 묻힌다.
정치인들을 비롯한 재벌, 고위 관료들만 출입하는 회원제 클럽이라는 정보를 갖고 왔지만 이 정도 방음 장치일 줄은 몰랐다.
‘구린 놈들일수록 장막을 두껍게 친다더니’
태건이 돌아섰다.
“김옥정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경수의 말에 두 여자가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숨기며 짐짓 모른 척을 했다.
“마담 언니는 요새 가게 잘 안 나오세요.”
여자들이지만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다.
들어선 순간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직감했는데 사장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다.
그렇다고 곧장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사장님은 무슨 일로 찾으시죠?”
오른쪽 키가 큰 여자가 체크 하듯 다부지게 묻는다.
경수가 빙긋 웃었다.
“계시면 연락 좀 해주세요.”
키 큰 여자가 왼쪽 작은 여자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오른쪽 여자가 카운터를 나와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혼자남은 여자는 태건과 경수를 번갈아 살핀다.
그리고 좀체 오지 않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등을 벽에 기댄 채 한쪽 발로 바닥의 양탄자를 콕콕 찍고 있는 태건이 마음에 걸린다.
뜨거운 불일수록 불꽃이 없다.
개 기름이 번들한 두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얘길 나눈다.
한쪽으로 앉은 마흔 중반 가량의 여인이 과일을 깎고 쪼개어 접시에 놓는데 가끔 두 사내의 대화속에 관여를 하기도 했다.
“허면 얼마나 태우실 겁니까.”
쉰 중반 가량의 대머리 사내가 물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강팍한 인상에 눈썹이 짙은 비슷한 또래의 사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열 장은 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 장, 역시 우리 최 사장님의 배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대머리는 큰 소리로 웃으며 양주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 듭시다.”
쨍!
두 사람은 양주잔을 부딪치며 잔을 비운다.
한 사람은 이 지역 구청장이며 눈썹이 짙은 사내는 노동판에서 잔뼈가 굳은 건설회사 사장이다.
지금 두 사람은 지역의 재개발 건으로 미래 지향적인 얘길 나누고 있는 것이다.
슥!
그때 희고 하얀 손이 두 사람의 빈 잔에 술을 채운다.
그야말로 백옥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하얀 피부에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앞가슴 깊이 늘어뜨린 여자.
이곳 비즈니스 클럽 유월의 사장이며 모영배의 내연녀라는 소문이 도는 김옥정이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문이 살짝 열리며 키 큰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김옥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일이냐는 듯 다가갔다.
여자는 김옥정의 귓가에 대고 뭐가 중얼 거렸는데 그녀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말씀들 나누고 계세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사내들은 얼른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김옥정은 방을 나왔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여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김옥정의 얼굴이 싸늘해진다.
홱!
김옥정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복도를 걸어갔다.
코너를 돌아간 김옥정이 멈칫했다.
태건이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그러더니 흘긋 자신을 돌아보았는데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어디서 왔죠?”
김옥정이 다가갔다.
태건이 몸을 바로세운다.
다가오는 김옥정을 가만 바라보던 태건이 불쑥 물었다.
“김옥정 사장님?”
김옥정은 태건과 가까이 섰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